메뉴 건너뛰기

close

그 곳, 차가운 메르키스강이 푸른 들판을 지나, 오리나무 숲과 수풀이 우거진 언덕을 지나 내달리며 흐르고, 그 깨끗한 물을 드넓은 네무나스 강으로 내보내는 곳에, 모든 산 중에서 가장 높은, 가파르고 거대한 산이 있고, 그 산 위에는 모든 성 중에 가장 견고한, 이름난 메르키녜 성이 우뚝 서 있다.

사람이 아니라 거인이 그것을 지었다. 서쪽에서, 남쪽에서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7마일 떨어진 곳으로부터, 그들은 그 성 기초에 누운 무거운 돌들을 날라왔다.

더 높이, 물결치고 있는 숲보다 멀리 있는 푸른 낙원에는 하얀 성의 탑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곳에는 낮이고 밤이고 파수꾼이 서 있었다. 큰 돌로 거인들이 쌓은 벽은, 초록색 이끼로 푸르게 변한 채 준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운 겨울밤 늑대가 침울해하는가, 혹시 원수 오랑캐들이 보이지는 않는가...

벨라루시인, 폴란드인, 피에 굶주린 십자군들 같은 많고 많은 적들이 그것을 보았다. 그들이 메르키녜에 와서 그 돌의 가슴을 해하고 괴롭힌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그 성은 그들에게 암울하고 무섭게 굳건히 서 있었다. 마치 첫날처럼.

그곳에 많은 피가 흘렀다. 옆에서 공격하는 벨라루시인들도, 그리 용맹하지 않으면서 자찬만 하는 폴란드인들도, 자기들이 그 누구보다 더 사납다고 여기는 십자군도 그 곳에 머리를 내려놓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평온한 요새였다. 단지 스탕계강만이 산 주위를 도랑으로 개천으로 내달리며, 울창한 숲에서 푸른 초원에서, 깊은 호수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쉬지 않고 그 오래된 성에게 얘기해주었다.


▲ 게디미나스 언덕과 그 위에 있는 성터.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것을 산이라 부른다. ⓒ 서진석
이 구절은 리투아니아 영웅들의 이야기를 그린 '빈차스 크레베(Vincas Kreve)'라는 작가의 작품 '거인의 무덤' 도입부이다. 산과 그 주변을 둘러싼 자연경관이 아주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는 이 소설을 보면, 정말 리투아니아가 웅장한 산들과 계곡들로 가득 차, 다른 민족들의 침입이 어렵고 방어가 용이할 것 같지만, 사실 발트3국 전체를 통틀어 산이라고 할 만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발트3국을 통틀어 가장 높은 봉우리는 불과 해발 350미터에 이르지 못한다. '수르 무나메기(Suur Munamagi. 해발 318m)'라고 불리는 에스토니아에 있는 봉우리가 발트의 최고봉이다. 워낙 지역이 평탄하고 산이 없는 지역이다 보니, 발트3국에서 조금이라도 불룩 솟아오른 곳이 있다면 그곳은 그 나라말로 영락없는 산이다.

그런 평지에 둥지를 튼 이유로, 역사 이래로 여기서도 슬쩍, 저기서도 슬쩍 발트3국을 건드리고 지나간 나라들이 아주 많은 것은 특별히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최근에는 자기네 나라에서 탱크를 거리낌 없이 몰고와 자유를 위한 싸움을 진압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시야는 물론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지역이다.

폴란드에서 버스를 타고 리투아니아로 야간은하버스 999를 타고 달리다 보면 그 극도의 편안함과 안락함(!)에 잠이 스르르 온다. 잠을 뒤척이며 자다가 오래 걸리는 국경검문을 통과하면, 그래도 좀 깊은 잠을 잘 수가 있다.

▲ 시굴다에 있는 투라이다스 성. 이곳에 오를 땐 물을 꼭 준비해야한다. 길가에 물 파는 가게가 없다. ⓒ 서진석
나의 그 깊은 잠을 깨우는 것은 보통, 일출이다. 그러나 산 사이로 고개를 내밀듯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고, 물빛을 붉게 물들이며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 위로, 아름답게 우거진 꽃들이 새벽 안개 사이로 나타나는 푸른 초원 위로 뭉실뭉실 솟아오르는 바로 그런 일출이다.

산도 없지만, 고층빌딩도 변변히 없는 이 지역에서 그 태양빛은 곧장 내 눈에 내려꽂힌다(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특히 선글라스가 필요한 것 같다). 한국인에게 일출이란 의상대나 정동진 같은 바다의 일출과, 산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듯 올라오는 일출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르지만, 발트인들에게 태양이란 자신들의 어머니와도 같은 숲과 들판에서 뜨고 지는 존재이다. 그 일출과 일몰을 보지못한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모른다.

그만큼 산이 없고 평평하다 보니 발트인들은 우리로 치면 그냥 '동산' 같은 그런 자리를 산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라트비아 남부를 여행할 때, 한 라트비아인이 저쪽을 가르키며 저 산이 보이느냐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산이? 산이 어디 있어 하고 주위를 살펴 보아도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자꾸 저 산이 보이느냐고 한다. 과연 그 사람의 손가락 끝에 무언가 주변 지역보다 조금 불쑥 솟은 지역이 있는데, 높이도 높이지만, 그 경사 역시 지극히 완만하여 차라리 그냥 높은 지대라고 부르는게 낫겠구만, 이 사람들은 곧죽어도 산이란다.

에스키모인들이 쓰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수 십 가지라고 하던가? 일단 산이 실생활에서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그런 계통에 단어가 많이 없을 수가 있겠다.

산성(山城)
탈린 톰페아 언덕 위의 국회의사당. ⓒ 서진석
사실 발트인들에게 동산과 산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동산도 산이요, 산도 동산이다. 유럽사람들에겐 찰기 없는 안남미도 쌀이요, 윤기가 잘잘 흐르는 이천쌀도 똑같은 쌀이듯이...

발트3국에서 산에 왔다는 느낌을 그나마 받을 수 있는 곳은 첫째, 라트비아의 시굴다(Sigulda). 라트비아라는 나라가 있기 전부터 존재한 이 도시는 현재 라트비아에서는 유일한 '산악지역'으로 '라트비아의 스위스'라 불린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정말 스위스에 가보고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난 모르겠다.

이곳에는 전설이 담긴 굴과 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 곳들을 돌아다니려면 오직 도보로만 이동해야 한다. 내가 직접 가본 바로는 '라트비아의 스위스'는 안되어도, '라트비아의 속리산' 정도는 불러줄 만하겠다. 약간의 산세가 있는 동산들이 이어져,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다보면 높은 산을 등산하는, 헥헥 거리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둘째 지역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 한가운데 있는 게디미나스(Gediminas) 언덕,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이곳을 산이라고 부른다. 리투아니아의 최고봉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리라 생각되는 곳으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성터 자리에 이르면 좀 숨이 가쁘다.

에스토니아의 겨울스포츠로 유명한 오태패(Otepaa)나 수도 탈린 한가운데 자리잡은 톰패아(Toompea) 언덕 역시 뭔가 높은 곳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곳이다. 톰패아 언덕 꼭대기에서 에스토니아 국기를 펄럭이며 서 있는 국회의사당은 정말, 이 글 도입부에 나온 거인이 지은 메르키녜 성 같은 인상마저 든다.

산이 없는 이유로 발트인들은 다른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줄 천혜의 자연방어막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다른 나라의 침입이나 받으며 살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발트3국에는 과거 독일기사단의 동방진출을 막은 전적이 있는 용맹스러운 전사들도 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수도를 함락시킨 기록도 있고, 또 세계대전 중 그 악명 높은 독일군과 러시아군들을 항복시킨 경험도 있다. 눈에 보이는 산은 없을지언정, 발트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높고 험한 산맥을 하나 하나 꼬박 꼬박 잘 넘어온 셈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에 대한 홈페이지 주소 
 http://my.netian.com/~perkunas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