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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분 미국 재향군인회잡지 (The American LEGION For God And Country) 에는 "'Deserter' Served in Two Militaries"라는 제목으로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James Paek의 기사가 게재된 바 있다.

한 페이지를 다 못채운 그 내용은 해군하사관으로 San Diego에 함정인수요원으로 왔다가 탈영하여 미육군에 입대하여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플로리다 미재향군인회 인사로부터 2001년 6.25 한국전쟁 기념식에 James Paek이 참석한다는 제보를 입수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플로리다 잭슨빌에 소재한 한 한국개신교회에서 치러진 기념식 말미에 참석하여 문제의 탈영병 James Paek을 만나 보았다.

James Paek은 현재 플로리다 북부 Jacksonville 근교의 Starke이라는 곳에서 2천여 평의 채소농사를 지어 이 일대의 한국가게에 한국채소와 과일 등을 공급하며 지내고 있었다.

필자는 James Paek이 살아온 여정이 한국현대사와 함께 한다는 생각에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한다는 작은 소명감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비교적 상세한 그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오마이뉴스에 연재형식으로라도 남기고자 한다.(편집자 주)


(1) James Paek (백도선) 의 가문

ⓒ이상원
수원 백씨인 백도선의 조부의 성함은 '기쁠 낙' '흥할 흥'자로 갑오전쟁 당시 평양전투에서 조선군 총사령을 지낸 분으로 평양근교 칠성군의 마지막 성주였다.

백도선의 8대 조부가 평양으로 벼슬을 살러가서 평양근교 칠성군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하는데 백도선의 조부 백낙흥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4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 돌아와 평안감사가 임명하는 평양장사가 되어 무장의 길에 들어섰다 한다.

한번은 함경도 장사와 힘겨루기를 하여 "6자 한자 한자"짜리 화강암 던지기에서 우승을 하고 10리 밖의 초롱불을 화살 한 발로 껐다고 하는 평양장사로 칠성군의 성주노릇을 하였는데 슬하에는 탈영병 백도선의 아버지인 독립지사 백기환과 백기봉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태어난 자세한 시기는 알지 못하나 1940년 사망했다고 백도선은 전한다.

백도선의 아버지 백기환은 1883년 7월 27일생으로 호는 진천, 별명이 백중성이고 1904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제일 처음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크리스찬 건축학교"에 유학을 보낸 한국 최초의 건축유학도다. 귀국 후엔 김좌진 장군이 교장을 하던 만주 삼원포의 독립군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1기로 졸업했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일제시대 평남도청에 포탄을 투척한 공로로 1963년 백도선의 부친 백기환에게 대한민국 독립장을 추서하고 1972년 사망 후엔 국립묘지에 부부합장으로 모셨다.

백도선의 기억에 의하면 부친 백기환은 평생을 가위에 눌려지냈다 하는데, 그것은 언젠가 백기환이 자신의 호를 딴 진천부대를 이끌고 평북초산경찰서를 습격하였을 때 초병을 살해하고 이어 육결포로 나까무라소장을 처단한 뒤에 생긴 일 때문이었다.

백기환은 나까무라 소장을 처단한 뒤 경찰서 뒤뜰에 있던 관사로 갔는데 마루 끝에 나까무라 소장 부인이 만삭의 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아기출생 후에 죽여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어쩔 수없이 처단한다'고 한 후 처형했다 한다. 그 이후 백기환은 1972년 사망때까지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백도선의 모친은 강혜숙으로 남편이 서로군정서 특파군의 신분으로 독립단 비장패를 이끌고 평남도청에 포탄을 투척한 후 체포되어 동지 6명과 함께 재판을 받을 때 자갈을 치마폭에 숨겨 들여가 재판장에게 "조선사람이 조선나라 찾으려 하는데 무슨 죄가 되느냐"고 일갈한후 자갈을 재판장의 머리에 던져 그 자리에서 2년형을 함께 언도 받았다 한다.

(2) 15세까지의 어린 백도선

백도선은 1933년 6월 27일에 평양근교 칠성군 가루개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독립운동하러 떠난 부친을 대신하여 평양장사를 지낸 조부 밑에서 여느 독립지사의 자제들과 마찬가자로 어렵게 자란 것 같다. 조부가 사망한 1940년 이후는 더욱 어려웠다 한다.

한국나이 12살에 해방을 맞아 부친은 감옥에서 석방되고 북조선을 접수한 김일성은 건축공부를 한 부친 백기환에게 "북조선인민위원회 건설상"이라는 자리를 제의하고 백도선의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 입학을 주선했다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와는 체질이 다른 백기환은 건설상제의를 거부, 김일성은 "안국사"복원을 일임하여 일거리를 주었다 한다.

그러다 부친 백기환이 김구선생이 보낸 이남으로 오라는 서찰을 접하고 회신을 보내다 발각되어 북조선보안국에 3달 10일을 잡혀갔다 온 후 백도선의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입학은 무위로 돌아갔고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였다.

백도선이 14살 되던 1947년 부친 백기환은 장남인 백도선에게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가라 하며 하늘의 별 하나를 가리키며 그 별을 따라가라 일러주고 어린 백도선을 월남시킨다. 별을 따라 가던 백도선은 산중에서 발이 삔 40대 아줌마를 만나고 그 아줌마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그 아줌마를 부축하여 월남을 하게 됐다.

이후 백도선은 신당동 시구문 밖 어느 집 사랑방에 얹혀 살면서 개성에서 발행해주는 배급통장을 북에 있는 온집안 식구 것까지 모두 받아 6명분의 배급통장으로 장사도 하면서 왕십리 광무극장 근처에 있던 배명중학교 1회 보결로 입학했다. 하지만 6개월 후 15살되던 때에 북에서 막내 여동생만 뺀 온집안 식구가 월남, 먹을 입을 줄이기 위해 독립하여 살게 되면서 공부의 뜻을 접어야만 했다.

(3) 구두닦이 백도선에서 해군13기생으로

ⓒ이상원

백도선은 만주에서 왔다는 이한구라는 3살 많은 친구와 함께 홍재동 화장터 너머에 방을 얻어 광교 조흥은행 앞에서 구두닦이를 시작한다. 친구 이한구는 명동에서 구두를 닦았다.

그러던 어느날 겨울, 계란색 구두를 신은 신사 한 사람의 구두에 검은색을 칠하는 바람에 매를 맞고 휘발유를 구하기 위해 친구 이한구가 일하는 명동까지 역마차와 경쟁하듯 뛰어갔다와서 그 신사의 구두에서 검은색을 지워주고 난 후 "야, 이거 내가 매까지 맞아가면서 구두를 닦아야 하는가?"싶은 마음에 1948년에 광교에서 구두통을 박살내고 우동배달부로 전업을 하게 된다.

어느날 백도선은 해군본부가 있던 퇴계로 쪽으로 우동배달을 나가게 되었는데 우연하게 해군모집 광고를 접하게 된다. 당시 16살이던 백도선은 1932년생이라고 속이고 해군모집에 응하게 되는데 1차 구두시험과 2차 필기시험 그리고 3차 신체검사에서 당당하게 합격을 한다.

1차 구두시험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울려고 내가 왔던가"로 시작하는 "선창가"를 구성지게 불러 합격하고 2차 필기시험에서는 이름과 주소 그리고 가족관계를 쓰는 것으로 합격했고 3차 신체검사는 배한번 두드려 보는 것으로 합격했다 한다.

서울역에서 진해로 가는 기차에서 백도선의 모친은 손수건에 삶은 고구마 3개를 싸주면서 해군에 입대하는 백도선을 배웅했다 한다.

백도선은 해군13기생으로 해병대 1기생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하는데 키가 작아 해병1기에는 끼지 못했다. 1949년 3월 31일에는 해군항해학교를 졸업하여 신호술의 일인자로 해군하사관이 된다.

그뒤 1년 3개월 뒤에는 6.25사변이 일어나 한국해군하사관으로 참전하였고 1952년에는 미국 샌디에고에 중고함정을 인수하기 위해 배인수요원으로 가서 3개월간 미해군 신호술을 배우게 된다.

3개월 교육 후 배인수출국전까지 2일간의 여유가 있어 네바다에 있는 이모벌 되는 분을 만나고 올 양으로 버스를 탔는데 네바다까지 가는데만 2일이 걸려서 4일 뒤 샌디에고 돌아와 보니 한국배 인수요원들은 백도선을 버려둔 채 미해군 중고함정을 인수하여 한국으로 떠난 뒤였다.

1952년 3월 백도선은 본의 아니게 2일간의 외출기간을 맞추지 못하고 미기함으로서 한국해군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 탈영한 한국해군 하사관이 되고 만다.

덧붙이는 글 | 이 이야기는 [백도선의 인생유전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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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하다 버지니아텍에서 농공학을, 브라운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으며 노스이스턴 공대 환경공학석사와 로드아일랜드대학 토목환경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연방공무원으로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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