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범 김구 선생의 일기인 <백범일지>가 조작되었고,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이광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려증동 경상대 명예교수가 최근 나온 배달말교육학회의 기관지 <배달말교육> 22호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한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나의 소원'도 이광수가 위조한 글이라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려증동 교수는 "<백범일기>를 허물어 뜨리고 <백범일지(白凡逸志)>로 조작한 사람 이광수"라는 글에서 이같이 엄청난 사실들을 밝혔다.

려증동 교수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 총장(1953~1956)을 지낸 뒤 1957년 동짓달,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서 한 말을 주요 근거로 내세웠다. 당시 려교수는 경북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심산 어른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주로 갔다는 것. 려교수가 당시 심산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왜놈 앞잡이 이광수가 백범 집에 가서 백범이 적어둔 일기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서, 백범일기를 없애버렸다. 광수가 광복사료를 없애버린 것이다." 당시 심산 선생은 "이광수가 나라 겨레를 어둡게 만들려고 그런 짓을 했다"로 말했다는 것.

려증동 교수는 당시 녹음기가 없어 심산 선생의 말씀을 담아두지 못했는데, 뒤에 백암 박은식 선생과 관련한 글을 읽고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75년 단국대 부설 동양학연구소에서 <박은식전서>가 나왔다. 해제를 쓴 김영호 교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고 한다.

"백암 선생께서 백두산을 안고서 66년을 울다가 돌아가신 후 <백암집> 편찬을 착수한 바 있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가 <백암집> 편찬을 착수하였으나 김창숙 선생 등이 '친일했던 손으로 깨끗한 어른의 문집을 편찬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자료를 모두 회수해 왔다고 한다"는 것.

려증동 교수는 <백범일지(逸志)>가 아니라 <백범일기>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며, 중요 대목과 단어를 살펴보더라도 조작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그 주요 지적 사항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 <백범일지>가 아니라 <백범일기>가 되어야 한다 = '뛰어난 뜻'을 '일지'(逸志)라고 하며, '뛰어난 물건'을 '일품(逸品)' 이라고 한다. 자기가 자신의 뜻을 '뛰어난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왜로 앞잡이 이광수가 백범이 남긴 <일기>를 없애버리고, <자서전>으로 된 글에다가 머리글을 날조하여 포장하고, 책 이름을 <백범일지>라고 했던 것이다. 백범이 자기 글을 '뛰어난 뜻'으로 되는 '일지'라고 말할 리 없다는 주장이다.

"백범이 기록했던 <백범일기>가 책으로 출간되면, 광복자금을 보내었던 분들, 광복도모자들, 왜로 앞잡이들이 밝혀지게 된다. 백범일기가 있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그 일기는 나라 잃은 시대 광복사료가 된다. 나라 일을 맡은 사람의 집에서는 '일기'가 나와야 한다. 충무공 집에서는 <란중일기>가 나왔고, 심산 집에서는 광복일기인 <벽옹일기>(국사편찬위원회 간)가 나와 광복사료로 삼은 바 있다. 백범의 집에서도 '일기'가 나와야 한다." 이렇다고 본다면 <백범일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되는 무리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백범일지>는 1947년에 처음 나왔다. 책 앞에 '저자의 말'이 나오는데, 그 끝에 '단군 기원 4280년'이라 적혀 있다. 양력으로 따지면 1947년이다. 백범이 세상을 떠나기 2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1994년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가 나왔는데, 여기에서 백범 아들 김신이 '친필을 원색영인하였다'고 해 놓았다. 이 책에서 보면 원고지에 적혀 있는데, 백범이 중국에서 자서전을 원고지에 적어 둘 리 없기에 의문이 생긴다는 지적이다. 또 '원색영인'한 자료를 보면 글씨체가 곳곳에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신이 후기글에서 밝혀놓은 사실에서도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백범일지가 처음으로 활자로 간행된 것은 광복 후 서울에서 1947년 국사원에 의해서이다. 이때는 원본을 현대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윤문(潤文)'하였고, 부록으로 선친의 정치철학을 피력하신 '나의 소원'을 '첨가하였다. 그후 오늘날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이 국사원판의 문장에 준하여 '윤문'한 <백범일지>를 간행하여 읽혀 왔다"라고.

백범 아들 김신이 고백한 내용을 분석해 보면, 누가 한 것이라고는 해놓지 않았는데, 1947년 처음 간행할 때 '윤문'하였고, '나의 소원'은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려증동 교수는 '윤문'한 사람이 바로 이광수라고 보고 있다. '윤문'은 문장을 '윤색'하거나 '다듬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내용과 단어가 갖는 몇 가지 의문점 = 백범이 쓴 일기라면 귀중한 광복사료가 된다. 그것도 백범이 광복 이전 중국에 있을 땐 쓴 일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백범이 임시정부 주석으로 있을 때 쓴 글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누가 왜로에 부역했으며, 애국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백범일지>를 보면 백범이 중국에 있을 때 쓴 대목은 조선에 들어 와서 쓴 것으로 보이는 일기의 1/3 가량이다. 자서전은 '저자의 말' '상권' '하권' '나의 소원' 4부로 짜여져 있다. '상권'이 조선땅 편으로 172쪽 분량이며, '하권'이 중국 땅 편으로 65쪽 분량이다.

려증동 교수는 '나의 소원'이란 글도 이광수가 조작했을 것이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을 소원가(所願家, 몽상가)라고 한다. 백범 선생은 독실한 실천가였다. '나의 소원'을 보면 백범을 나약한 소원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라잃은 시대 백범이 지녔던 실천이 광복이었다. 나라 땅을 찾게 된 광복 후에 백범이 지녔던 실천이 남북이 하나되는 통일이었다. 백범 선생은 독실한 실천가였고, 나라잃은 시대든, 광복 후든 백범의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백범 선생이 '나의 소원'이라는 슬픈 글을 지을 리 없다"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말해, "백범 선생은 광복과 통일을 위한 실천하는 행동가였지, 세계인류를 걱정하는 몽상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라고 설명했다. '나의 소원'에 보면, "나라가 서려고 하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는데, '철학'이라는 말은 일본말로, 백범 선생이 철학이라는 일본말을 사용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려증동 교수는 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백범일지>라는 책은 이광수가 앞뒤로 포장한 책이었다. 거짓된 날조로 포장한 것이었다. '저자의 말'이 날조였고, '나의 소원'이 날조였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