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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시민운동 지원기금에서 마련하는 '2001한국시민운동상'을 받았다. 일본 교과서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항의 방문 등 활발한 대응을 벌이고 있는 정대협.

15일 낮 찾아간 서대문 사무실에는 아침부터 정대협 소속 할머니들과 관계자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복지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진현정(32) 간사를 만나 수상 소감과 정대협 활동 소식을 들어보았다.

일본 교과서 문제는 장기적 싸움 될 터

- 축하드린다. 일본 교과서 문제로 무척 바쁘실 것 같다
"고맙다. 실은 아침에 (정대협 소속) 할머니 모시고 광화문 다녀오느라 정신없었다. 광화문 역에서 역사 교과서 전시회 개막식이 있어서 다녀왔다. 요즘 진짜 바쁜 사람은 대외협력부의 간사님이다. 역사 교과서 문제 때문에."

- 지난 달에 역사 교과서 개악을 규탄하는 일본 방문을 하셨는데
"문부성 관련자들을 항의 방문했고, 문부성과 국회 중의원 회관에서 시위를 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항목이 문부성 내규에 의해 정해지는데, 여기서 정신대 문제가 탈락한 것. 시위 때는 일본 시민 단체들이 함께 했고, 국회의원 30여 명이 다녀갔다. 와서 격려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 정치가들 전부가 보수화되는 것은 아니다. 정권당이 보수당일 뿐. 일본 내부에서도 경제적 난국을 국수주의로 극복하려는 집권당의 정책에 반발하는 단체가 많다. 반전운동가와 원폭피해를 화두로 하는 평화운동자들이 일본 자국 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 일본 항의 방문이 일본 정부와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다고 보나
"일단은 우리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 의미가 있다. 일본 언론은 사실상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신대 문제에 대해 모른다. 정부를 따라 언론이 함께 우익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의 또 다른 의미는 일본 단체들과 조직적으로 연대하는 길을 찾는 것. 함께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 정부의 교과서 문제 대응에 만족하는가
"아니다. 교과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앞으로도 장기적 싸움이 될 텐데, 정부의 대응 태도는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잘못이다. 98년 미국에서 일본 전범자 출입국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고 우리나라에도 같은 법조항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범자 명단조차 작성되지 않고 있다는 거다.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정부에서는 천황 초대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천황은 태평양전쟁의 주범이 아닌가. 이런 여러 문제가 걸리니까 교과서 문제 대응하기가 미묘하다. 교과서 문제도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무마하려 하지 않겠는가."

- 역사청산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전면적인 해결은 이상적인 것이 아닌지
"정부가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관건이라고 본다. 전쟁 당시 위안부로 징발되었던 네덜란드 여성들은 일본 정부의 사죄 배상을 받았다. 인종차별적인 요인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강력하게 요구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태평양전쟁 때 미국 내에서 탄압 받았던 일본인들조차 작년에 미국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강자와 약자를 달리 대하는 것이 국제 정치의 속성이다. 자신의 권리를 분명히 주장하는 것만이 빼앗긴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시민들과의 연계 과제―북측과는 수월히 합의

- 정대협은 국내외에 정신대 문제를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시민들의 참여도는 아직 낮다
"우리의 숙제다. 끊임없이 시민을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시민들과 함께 일을 나눌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복지 선진국에서는 여가 시간을 활용한 시민 활동이 활발한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직장 생활하기에도 바빠서 여가란 것이 없다. 이런 시민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홍보하고 참여를 유도해 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정답이 없다."

- 지난 99년 정대협 교육관이 문을 열었는데
"매해 50-60팀이 공식적으로 방문한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시민 단체 회원들까지 방문자 층이 다양해지고 있다. 교육관에는 할머니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서와 논문은 물론 다양한 비디오·슬라이드 영상물을 자료실에 보관하고 있다. 교육관 프로그램을 따로 마련해놓고 있다."

-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국제법정'에서 북한과 공동 소송을 하게 된 경위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것은 93년부터다. 정대협과는 이미 92년 평양에서 북한측 초청으로 회의를 가진 적이 있었다. 북한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과 경제협약을 맺지 않는 나라다. 그래서 유엔이나 헤이그 회의에서 떳떳하게 요구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남한(정대협)과 북한이 대립되는 입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죽이 잘 맞았다. 남북이 갈라지기 전의 일이니까 함께 대응하는 게 어떻겠냐는 우리측 제안에 북쪽에서도 쾌히 응해왔다. 국제 법정 열면서 의외로 홍보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때 유일하게 집중 보도해준 것이 <오마이뉴스>였다. 대부분 언론들이 큰 이슈가 터지지 않는 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

정신대 피해자들 심리치료 시급한 과제―문제 해결에 부시 정권 걸림돌

- 정부 지원을 받아 할머니들의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다고 들었다. 남은 과제가 있다면?
"정신대 문제 피해자들은 심리적·사회적인 피해 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악몽을 꾸고, 사회적으로 냉대 받아왔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심리치료와 상담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생을 정리하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정대협의 남은 과제다. 상담 분야의 전문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경제적인 문제 역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부 보상금 지급 후에 사후 관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과 친척들에게 고스란히 돈을 뺏기는 경우가 생겼다. 제대로 된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사후 관리가 꼭 필요하다.

- 할머니들과 생활하며 안타까울 때 없나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데, 어두운 소식이 들려오면 할머니들의 좌절과 실망감이 함께 느껴져 안타깝다. 오늘 아침에도 할머니 전화가 걸려왔다. 작년에 미 연방 지방법원에서, 우리 할머니들을 포함한 군 위안부 출신 아시아 여성들이 일본 정부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걸 기각하라고 미 정부가 압력을 넣는다는 소식이 TV를 통해 전해진 거다. 할머니가 당장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데 가슴이 아팠다. 클린턴 때는 일본 전쟁 범죄 자료를 전면 공개하고 책임자 처벌에 적극 나서겠다고 했다가, 부시 정권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역류하고 있다. 아무리 소송을 걸어도 지금까지 일본 내에서는 계속 기각되어 왔고, 그래서 미국 재판에 거는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 크다."

- 미국 연방법원의 소송이 왜 중요한가?
"미국내의 재판을 통한 독일 전범자 처벌의 예가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끝난 뒤에는 유태인 배상 문제도 한동안 등한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내에서 벌어진 독일 전범 재판들이 승소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상이 이루어진 거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승소한다면 일본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힘의 원리를 내세우는 부시 정권이 일본 보수 정권 못지 않게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정신대 피해 보상 문제를 단순한 반일 감정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정신대 여성의 문제는 억압받아온 여성 인권의 문제이며 동시에 전쟁으로 인한 포괄적 인권 유린의 문제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정대협은 베트남 전쟁 문제 해결과 미군 부대의 기지촌 문제, 외국 여성의 국내 매매춘 문제 해결을 공동 과제로 삼고 있다.

"정대협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윤정옥 대표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우리의 싸움은, 일본 정부가 사죄를 하건 안 하건,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요. 아무리 그들이 사실을 부인한다 해도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이상 그들은 패배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환하게 웃는 진현정 간사의 모습에서 정대협 10년을 이끌어온 강건한 시민 모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미국의 이번 소송 기각 압력은 부당하다. 전쟁으로 인한 인권 유린의 심각성은 보스니아-세르비아 민족 분쟁의 참상으로 얼마전 전세계에 알려진 바 있다. 전쟁의 참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이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심판대 위에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정대협의 근황을 들으면서 국제 사회에서 앞으로 우리 정부가 취해야 할 조처들에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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