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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euthanasia)의 의미는 생존(生存) 가능성이 없는 병자(病者)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예로부터 종교·도덕·법률 등의 입장에서 많은 논쟁이 되어왔으며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했다.

193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극작가 마르탱 뒤 가르(Martin du Gard·1881∼1958)는, 장장 18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8부작 대하소설(大河小說), '티보가(家)의 사람들(원제·Les Thibault)'을 완성했는데, 1922년부터 1940년까지 집필한 이 작품은,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의 프랑스 부르주아지(bourgeoisie)가 당면한 사회적·도덕적 문제를 연대기(年代記) 형식으로 추적하며 광범위한 인간관계를 끈질기게 그려낸 소설이다.

특히 그는, 제목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티보'가(家)의 한 가족을 등장시켜 그 집안의 발전과정을 탐구하며 가족이 병상에 누워 앓고 있는 장면이나 죽어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해, 안락사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Rousseau·1712∼1778)는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육체적으로 빈사(瀕死) 상태에 처한 자는 윤리적으로 자살(自殺)이 허용될 수 있다. 환자(患者)의 고통이 극복될 수 없고, 그 고통이 생(生)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차라리 축복된 해결책이며 찬양할 가치마져 있는 결정이다"라고 안락사에 관한 찬성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을 주도한 사람은 단지 루소 뿐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1694∼1778)를 비롯하여,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 칸트(Kant·1724∼1804), 이탈리아의 형법학자 베까리아(Beccaria·1738∼1794), 영국의 문학비평가 흄(Hume·1883∼1917), 그리고 미국의 정치가 팔리(Parley·1888∼1976) 등, 이렇게 여러 국가 사람들이 자살은 '인격적(人格的) 결정'이라며 자살금지의 부당성을 강도 높게 비난하고 범죄로 보는 것을 저지한 사람들이였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1788∼1860)도 생명에 대한 불가양적 자결권(不家樣的 自決權)의 소리로 세계의 반향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물론 이때에도 자살하는 사람과 죽어가는 환자와 관련해서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론은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自己決定權)을 무조건 묵살할 것이 아니라, 환자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쪽으로 의견들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자살과 안락사의 논쟁은 이렇게 이미 오래전서부터 찬반양론(贊反兩論)이 있어왔던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BC469∼399)는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메세지를 남겼다. 그것은 마치 "삶의 존엄이 먼저냐 죽음의 위엄이 먼저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생(生)과 사(死)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모색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하원의원이 의결했던 '안락사 법(安樂死 法)'을, 이번에 상원의원이 최종 승인함으로서 국가로서는 이제 세계 최초로 합법화가 됐다. 우리나라도 지난해 2월부터 새 장기이식법이 시행돼 뇌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으므로, 부분적으로는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번에 다시 대한의사협회가 의사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 등을 규정한 의사 윤리지침을 보완, 국내에서도 다시금 안락사 논쟁이 일고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또 비슷한 말로 "사람은 스스로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지만, 죽음은 마음대로 선택 할 수 있다"라는 말도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죽음이 대부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에,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방법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고 싶어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그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자연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명의 연장을 가능케한 의학의 진보는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뒤바꾸고 있는 것이다. 고통 앞에 무기력하기만한 인간들이 의술의 힘을 빌어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임에랴 남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폐를 끼치고 싶을까. '죽을 권리'와 '살릴 의무'의 끝없는 충돌을 야기시키고 있는 이것이 이른바 안락사의 논쟁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 칼럼은 4월 18일일자 '강남내일신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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