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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교육청으로부터 현장 조사를 받고 11월 1일 뒤늦게 학부모에게 배포한 특기,적성 교육 신청서. 그러나 신청서에는 이미 9월 14일부터 특기, 적성교육을 해 왔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 이승경
아침 7시 40분, 김나영(17,전북전주S여고2)양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은 채 자습할 책만 들고 방송실로 향했다. '0 교시(정규수업은 1교시부터 7교시까지 진행한다)' 특기·적성 교육시간, 나영양이 나가자 학생들은 모두 교과서를 꺼내 들었고, 수업이 시작됐다.

나영양은 오전 '0교시'와 오후 '8교시'를 이렇게 방송실에서 혼자 자율학습을 한다. 같은 시간 다른 친구들은 특기·적성 교육을 빙자한 '보충수업'을 받고 있다. '보충수업'은 교육부의 지침과 각 학교의 교칙에서 금하고 있는 엄연한 '불법'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잘못된 보충수업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내 권리이고, 바르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전주S여고 2학년 450여명의 학생 중 혼자서 '편법적인 특기·적성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나영양은 그래서 더욱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나영양이 혼자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시간에 '보충수업'은 교과진도를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영양은 자신도 모르게 앞질러 가는 수업진도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많이 울었어요. 아버지한테 울어도 보고, 혼자 울기도 하고…. 대입, 수능 이런 것이 발등에 떨어지니까 당연히 대부분의 아이들은 제게 뭐라고 하죠."

나영양이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나영양의 아버지가 교육청에 이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자 S여고에 대한 장학사의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후 나영양의 친한 친구들조차 나영양의 주위를 맴돌 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나영양이 책상에 엎드려 있으면 다른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재수없어", "잘났어, 정말" 하고 한마디씩 한다. 또 S여고 홈페이지에는 나영양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이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다.

"우리도 학부형의 고발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찾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나영양이 학교 방침에 잘 따라주던지 아님 이 학교에서 없어져 버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
" 우리는 대학에 가야한다. 한 명 때문에 2학년 전체가 피해를 볼 순 없다. 전학시키자."
"김나영~내가 요즘 들어 왜 점심을 매점에 나와서 먹는 줄 알아? 수요일에 나오는 니 목소리가 재수 없어서야~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지? 2학년과 선생님들을 뒤엎어놓고 뻔뻔하게 방송을 하고 있더라. 제정신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랑 같은 동아리라면 너 같은거 빼버릴텐데 니 동아리는 맘도 넓다. 선배들은 너때문에 방송부 욕 얻어 먹는 거 알고는 있냐? "
-S여고 홈페이지에서


이젠 노는 방법도, 웃는 방법도 잃어버렸다는 김나영 양ⓒ 오마이뉴스 최경준
나영양의 친구들은 '김나영 전학보내기 서명운동'까지 벌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루는 공부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친구 한 명이 청소 끝나고 잠깐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청소 끝내고 그 친구를 찾아갔죠. 그런데 그 친구는 보이지 않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저를 외면하는 거예요. 모두 따로 놀고, 아는 체도 안하고…. 그 애들 눈이 너무 무서웠어요."

나영양에게는 요즘 새로운 별명이 하나 생겼다. '전따', 전교생이 왕따를 시키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나영양은 지금 자퇴를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한테 왕따 당해서 자퇴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좋은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이 일을 계기로 몇몇 선생님의 추한 모습을 보고 나니 학교에 다녀야할 이유를 잃어버렸어요."

게시판에는 나영양을 비난하는 글만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한 1학년 학생은 선배들을 꾸짖기도 한다.

"그 언니의 의견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언니 친구들까지도 나영 언니를 따돌린다는데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학이 친구보다 중요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학생들의 눈을 점점 더 멀게 만드는지..."

나영양이 지금까지 다닌 학원이라고는 피아노 학원이 전부다. 중학교 3학년 때도 다들 받는 보충수업을 혼자 거부하고 받지 않았다. 나영양도 처음부터 혼자 나설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다른 친구들이 다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나영양에게 용기를 준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김광재(47, 남원인월고등학교 수학교사) 씨였다.

김광재 씨는 딸이 대견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일이 커지고 힘들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오마이뉴스 최경준
"아빠가 이건 교육제도나 형식의 차이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학교에서 은연중에 '법을 어겨서라도 목적을 이루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대학을 가면 된다는 생각을 보이지 않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학교의 현실이라고 하셨지요. 처음엔 힘들어서 그냥 보충수업 받으려고 했는데 아빠 말 듣고 돌아섰어요."

김광재 씨는 딸이 혼자서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결국 김 씨는 9월 초 김양의 담임, 학년주임, 교장 선생님 등에게 전화를 걸어 나영양을 불법적인 특기·적성 교육을 받지 않게 해 줄 것과 보충수업에서 진도를 못나가게 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씨의 호소는 '대학, 수능'이라는 명목으로 거절되었다.

몇 차례 학교에 항의했던 김씨는 결국 10월 16일 교육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10월 23일 도교육청 장학사 두 명이 S여고에 대한 현장 조사를 진행됐다. 그러나 교장에게 시정조치만을 권고한 채 교육청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단속하기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나영양이 다니는 학교의 교감은 '보충수업'을 전면 부정했다. 학교의 지침은 절대 교과관련 진도를 나가서도 안되며, 원하지 않는 학생의 권리를 존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기·적성 교육시간에 편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보충수업'을 교장, 교감이 전혀 몰랐다는 것일까? 교감은 "담당 교사들의 자율적인 의지였다"고 주장한다.

기자가 특기·적성 교육을 실시한 증거자료를 요청하자 교감은 끝내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일어서는 기자에게 한마디한다.

"교육청에서조차 '말썽만 피우지 마라, 눈감아 주겠다'는 식이다."

편법적인 보충수업이 실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학부모의 요구다. 특히 사립학교의 경우 보충수업을 하지 않을 경우 학부모들의 거센 불만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보충수업의 이면에는 교사들의 경제적 문제도 뿌리깊게 내재되어 있다. 원칙적인 특기·적성 교육을 시키려고 하면 대입을 걱정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신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현직 교사는 "한 명당 2만원씩 받고 있는 보충수업비 때문에 보충수업을 하는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의 월급이 50∼80만원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털어놓는다. 결국 전체 학생이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교과위주의 보충수업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교육감이 '보충수업'을 규제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데 있다. 군산 O여고에 재학중인 한 학생은 "장학사는 대부분 심화학습(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2∼3교시쯤 온다"고 말한다.

나영양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교칙-보충수업을 비롯한 일체의 과외수업을 금하고 있다.
ⓒ이승경
도내 일반계 고등학교 뿐만아니라 서울과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서 특기·적성 교육을 빙자한 '보충수업'이 실시되고 있다.

그래서 김광재 씨는 나영양이 다니고 있는 학교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시작된 문제 제기가 다른 학교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전주시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면 결국 전국적인 문제가 되어 교육과정에서 더 이상의 파행운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보충수업은 현실적인 대안이 절대 아니에요. 장학사, 학부모, 교사 등으로 공동조사단을 만들어 전북지역의 교육이 낙후된 이유를 찾아 해결 방법과 대안을 찾아야지요."

전교조 전북지부 김인봉(46) 사무처장은 "학부모 중에서도 보충수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교육학부모회에서는 11월 30일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학부모회 선언'을 통해 인문고 보충수업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할 예정이다.

나영양의 좌우명은 "솔직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언제쯤 이 나라의 학생들이 '솔직하고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될까?

덧붙이는 글 | -김광재 씨가 나영양이 다니는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글

"예들아 단지 나와 다른 선택을 하였다는 이유로 또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 학생을 미워하지 말아라. 
그 대신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생을 괴롭히는 학교, 나의 성공을 위해 남의 실패가 필요한 경쟁구조의 학교, 우리 나라를 제외한 OECD가입국 고등학교 연평균 수업시간수의 2배에 육박하는 수업시간수(보충수업을 합하면 3배)를 강요하는 학교교육 정책, 일류대와 인기학과 그리고 소위 명문고라는데 나와서 힘있는 자 편에 서서 남의 이익을 챙겨주기보다는 의기양양하게 이익을 독식하는 사회구조 등에 눈 치켜 뜨고 주먹 불끈 쥐어보거라. 71년전 11월 3일 광주에서 여러분 선배 학생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제에 항거하지 않았더냐? 
저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선(common good)이 실현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나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학생을 많이 배출하는 학교가 명문학교라고 생각한다. 
S학교의 미운오리새끼(?)  김나영의 아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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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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