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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 단종이 남긴 詩 -

차창을 심하게 때리는 비는, 지난 밤부터 일찌감치 찾아올 장마를 예고하고 있었다. 새벽에 도착한 제천에서 영월행 첫차를 타고 접어든 영월.

근세 조선왕조가 당파싸움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일진대 장릉(壯陵)에 잠든 그 어린 단종 임금의 애달픈 넋을 어찌 위로하지 않으랴.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장릉 입구 매표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밖을 보니, 장릉을 관리한다는 아저씨께서 비 고인 주차장 한 귀퉁이에서 열심히 빗질을 하며 물을 걷어내고 계셨다.

장릉 올라가는 길목의 소나무들은 정말 아저씨의 말씀처럼, 모두 능에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어 놀라고 말았다. 장릉에 대한 세인들의 말 만들기만은 아닌 듯 싶었다.

태어난 지 며칠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곧 이어 아버지 문종을 잃고 나서 12세에 등극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가 된 5년 뒤(1457) 끝내 사약을 받아 채 꽃이 피기도 전에 승하(昇遐)한 불운의 임금.

장릉을 둘러보면서 '엄흥도'라는 처음 들어보는 인물에 호감이 갔다.
우리는 흔히 단종 애사를 이야기할 때, 단종과 사육신만을 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만일 '엄흥도'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직도 단종의 혼은 동강 혹은 서강을 돌며 구천을 떠돌리라.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조정에서는 단종의 시신을 동강에 던져버린다. 누구든지 단종의 시신을 건져 장사지내면 3대를 멸하겠노라고 엄명을 내린다.

그 때 영월에 사는 '엄흥도'라는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월 엄씨의 선산에 장사지낸다. 당시 그는 지금으로 치면 마을 이장(里長)쯤 되는 호장(戶長)이라는 아주 낮은 직책을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에 숙종으로부터 병조판서에 책봉되고 나서야, 전국에 흩어졌던 영월 엄씨 후손들은 영월로 다시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능과 장내를 둘러보며 왠지 점점 더 엄숙해짐과 깊은 슬픔에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도 목이 마르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청령포(淸令浦).

단종이 처음 유배되었던 육지 속의 섬이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뒷편이 병풍같이 깎아지른 산으로 둘러싸여 유랑을 즐긴다하면 천연의 경승지이겠지만, 유배온 단종에게는 자연 그대로의 천연감옥이요, 왕비 송씨와 생이별을 한 채 시름을 달래던 '한 서린 유배의 땅'이었으리라.

유배온 지 2개월 여 후에 홍수로 도저히 청령포에 머물 수가 없자,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배를 타고 솔숲 우거진 청령포에 들어섰다.
몇 개월 동안 TV드라마 <용의 눈물>의 촬영지로 사용되었다는 청령포 모랫벌을 흘끗 쳐다보고는 배에서 내렸다.

청령포는 서강(평창강)을 경계로 하여 영월읍 방절리 청령포와 남면 광천리 청령포로 나누어져 있다.

내가 갔던 곳은 영월읍에서 남서쪽으로 약 2km 지점에 있는 광천리 청령포이다. 방절리 청령포에는 왕방연 시비가 있고, 광천리 청령포에는 단종의 유지비각, 금표비(禁標碑) 망향탑(望鄕塔), 노산대(魯山坮), 관음송(觀音松) 등의 유적이 있다.

금표비에는 남북으로 삼백 구십척, 동서로 백 십척 밖으로 출입을 금(禁)한다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솔숲 한 가운데는 단종의 슬픔을 보고(觀) 들었다는(音) 소나무 관음송이 있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인데 단종은 어깨 높이의 나무에 걸터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었다고 한다. 높이 30m, 둘레 15m에 달하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용문사 은행나무와 더불어 가장 큰 나무로 꼽힌다.

노산대는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당하여, 수십 명의 군사들로부터 감시를 당하며 유배생활을 했던 단종이 절벽 가장자리인 노산대에 앉아 한양 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곳이다. 그 아래쪽에는 왕비를 그리며 쌓았다는 돌탑(망향탑)이 반쯤 무너진 채 서 있다.

단종이 거처한 곳을 복귀한 집 처마 끝에서 낙수소리를 들으며 만감에 잠겼다.

아! 그런데. 담장에 바짝 붙은 채로 기울어져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엄흥도소나무'라고 이 곳 사람들은 부른답니다."

물론, 실제로 엄흥도가 죽어서 된 나무라고는 믿기지는 않았지만, 비운의 임금에 대한 그의 충절과 영월 사람들의 그를 기릴 줄 아는 마음씨가 뭉클해졌다.

강은 둥글고 절벽은 천 길인데
산봉우리는 구의봉으로 이루어졌구나.
섬으로 건너가 절하고 싶으나 건널 수 없구나
원호의 표주박은 날마다 홀로 떠 다녔다네.

위의 시는 동강 부근의 정자에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면서 떠내려보낸 표주박을 보며 단종이 지은 시라 한다.

후인(後人)의 한낱 시조가 어찌 애간장 끓는 단종의 슬픔에 비하랴마는, 비가 내려 더욱 슬퍼 보이는 노산대와 망향탑에 올라 당시 단종의 심정을 표현한 시조를 내 한 수 지어 그의 넋을 달랬다.

망향가(望鄕歌)

청령포(淸令浦) 물소리는 빗소리에 굵어지고
솔숲의 관음송(觀音松)은 깊은 시름 잠겼는데
한서린 노산대(魯山坮) 올라 님을 그려 쌓노라.

영월을 충절(忠節)의 고향이라고 한다.
충신불사 이군(忠臣不事二君)의 만고에 유전(萬古遺傳)할 영월민들의 그 충절은 년년세세(年年世世)장릉과 청령포의 푸른 노송(老松)들과 더불어 더욱 그 빛을 더해갈 것이다!

비가 많이 내려 침착하게 영월 주변의 유적지와 땅들을 밟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다음에 갈 때는 그 외 선돌이라든가, 김삿갓 묘소라든가, 서강, 동강에서 래프팅까지 영월의 진면목을 더 흠씬 느끼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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