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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의 색이 바뀌었다. 온 산에 며칠 전까지 연두색이 물결쳤는데 지금은 더 강렬해졌다. 훨씬 더 푸르고 짙어졌다. 그 녹음에서 비릿함이 묻어나는 듯하다. 바람이 일렁이면 스르릉 스르릉, 큰 나무가 그늘을 데리고 마당가를 서성인다. 새들은 어찌나 많은지 사방천지에서 제각기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더러, 새소리가 서로 섞여 마치 세상의 모든 악기가 합주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크고 작은 새들은 대숲과, 큰 나무를 배회하다가 밭에 앉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쪼아 먹는다. 봄날은 가고 초하(初夏)가 왔다.

할머니는 여전히 냇가너머 밭에 앉아 잊을 만하면 소리를 지르신다. 지금 새들을 쫒고 계신 것이다. 얼마 전 들깨를 심으셨다. 새싹이 자라나는 걸 새들은 귀신같이 안다. 어느 날 밭에 나오신 할머니는 새들이 들깨의 새싹을 쪼아 먹는 걸 보시고는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비료포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밭 가장자리에 심었다.

소용없는 걸 보시고는 하루 종일 그곳에 앉아 계시며 이따금씩 훠이, 소리를 지르신다. 가냘픈 목소리가 새들을 쫓을 수 있겠는가. 그 모양을 본 내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제발, 가서 쉬시라 해도 소용없다. 그 밭에는 그늘도 없다. 정말이지 하루 종일 그러고 계시는 걸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저릴 지경이다. 도회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알면 대성통곡을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할머니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며칠 전 지인들과 저녁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천정배 의원'의 당선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말들을 들었다. 광주의 민심 변화에 놀라는 얘기들이 많았지만 특히 언론의 '호남정치의 복원'과 '광주 정신'에 대해 다른 지역의 우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역주의의 신호가 아니냐, 하는 걱정인 모양이다. 그것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다. 광주정신은 5.18정신과 다름이 없고, 호남정치는 민주정치와 다름이 없다. 제대로 된 정치, '정의가 물결치고 국민을 우선하는 정치'를 하라는 의미이다. 그런 정치를 통해 호남이 앞서 가라는 바람의 말이다.

그러나 정치란 본디 지역에서 출발하여 중앙으로 가는 것 아닌가. 따라서 정치인들은 우선 지역민들의 생각과 어려움, 숙원, 이런 것들을 해결하면서 광주‧전남 사람들이 느끼는 정의와 자유와 평화에 대한 갈망을 가장 먼저 해소해야 한다. 그런 의미의 호남정치가 기왕에 활력을 얻었다면 우리는 이미 중앙의 정치를 견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많은 분들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이번 5.18행사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으로 제창되지 못했다.

많은 시민들은 이를 '오월 광주'의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 그 노래가 도대체 어때서 안 되는지 알지 못한다. 돈이 많이 들어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해서?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서? 아니지 않은가. 이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그러라고 선거에서 선량들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올해도 또 여지없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런 문제가 비단 행진곡뿐만이 아니기에 역설적으로 '호남 정치'나 '광주 정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진정한 정치적 성장은 지방에 있다. 이제부터라도 지역에서부터 신뢰를 키움으로써 온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큰 정치로 나아갈 수 있다.

할머니는 오늘도 뜨거운 밭에 앉아 계신다. 마음이 하도 짠해 음료수 하나를 들고 찾았다. 얼굴이 타서 새카맣다. 허리가 굽은 데다 아프셔서 끙끙 앓으신다. 이 고요한 산골마을에서, 보이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할머니 홀로 무얼 하고 계시는가, 허리를 만지며 끙끙 앓으시면서. 들어가시라고, 올해 깨 농사 잘 못 지으시면 조금 적게 드시면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려도 소용없다. 하늘은 맑고 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커다란 그림자를 펄럭이고, 이름 모를 새들은 유유히 나는, 이 자유 안에서.

주변을 살펴보시라. 대부분의 우리 이웃들은 바라지도 않고 요구할 줄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지방의 눈으로, 중앙의 눈과 입만 보시지 말고 지역의 어려움을 쳐다보시라. 그리고 저 부엉이바위의 진정성으로 승부하시라. 그러면 정치에 대한 믿음이 입에서 입으로 들불처럼 번질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호남정치이다.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말씀이다.

덧붙이는 글 | 무등일보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호님정치 , #산골일기,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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