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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부 촌장들을 제사지내는 양산재에서 바라본 창림사터 석탑이 남산 자락에 우뚝 세워져 있다(흰 동그라미). 창림사터는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궐을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다.
 신라 6부 촌장들을 제사지내는 양산재에서 바라본 창림사터 석탑이 남산 자락에 우뚝 세워져 있다(흰 동그라미). 창림사터는 박혁거세가 최초로 궁궐을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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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에서 서북쪽, 즉 왼쪽 산비탈로 들어서면 높이 6.5m의 창림사터 삼층석탑과 만나게 된다. 855년(문성왕 17)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오랜 세월 형체도 보존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돌덩이로 흩어져 있었다. 1976년 그것들을 주워 모으고 돌을 보태어 지금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탓에 창림사터 삼층석탑은 보물이나 유형문화재는커녕 문화재자료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용 등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매우 아름답게 새겨진 기단을 거느렸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인 모양. 그저 멀리 반월성만 바라보며 외로이 서 있을 뿐이다. 그래도 삼층석탑은 이곳이 박혁거세가 처음으로 궁궐을 세운 자리였다는 자부심만은 곧추 세우고 있다. 남산 일대 탑 중에서 가장 크기 때문이다.


창림사터, 신라 최초의 궁궐 자리


창림사터 석탑에 새겨진 팔부신중 중 일부
 창림사터 석탑에 새겨진 팔부신중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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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나정과 양산재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언덕, 지금은 '창림사터'라 부르는 곳에 신라 최초의 궁궐을 세운다. 물론 초기 국가의 형편상 대단한 궁궐은 아니었고, 그저 6부 촌장들의 집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성을 쌓고 궁궐을 지은 기사로서 처음 나오는 것은 '혁거세왕 21년(기원전 37)에 금성(金城)을 쌓았다. 26년(기원전 32) 봄 정월에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라는 내용이다.

혁거세왕이 처음 쌓은 성의 이름을 금성(金城)으로 정한 것은 진흥왕이 왕의 성씨를 김(金)으로 한 것과 같은 조어법(造語法)의 결과일 듯하다. 금(金)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광물이었고, 임금은 가장 존귀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왕이 기거하는 성은 '金성'이 되었고, 왕의 성씨도 '金'이 되었다.

신라가 다시 궁궐을 지은 것은 파사왕이 재위 22년(101) '봄 2월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을 짓고, 가을 7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거처했다'는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그런데 왕은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 금성이 반월성의 서북쪽, 즉 대릉원과 노서노동고분군 방향에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혁거세왕이 최초로 세운 궁궐이 금성인 것은 아니다. 창림사터는 반월성에서 볼 때 남쪽이기 때문이다.

박혁거세가 최초의 궁궐을 세운 곳으로 여겨지는 창림사터의 석탑(사진 왼쪽)과,  남산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당간지주인 남간사터 당간지주(오른쪽). 남간사터 당간지주는 창림사터에서 양산재 및 나정 쪽으로 내려오는 중간 지점에 있다.
 박혁거세가 최초의 궁궐을 세운 곳으로 여겨지는 창림사터의 석탑(사진 왼쪽)과, 남산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당간지주인 남간사터 당간지주(오른쪽). 남간사터 당간지주는 창림사터에서 양산재 및 나정 쪽으로 내려오는 중간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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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당(幢)은 부처의 위엄을 표시하고, 중생을 지휘하며, 마군(魔軍)을 굴복시키기 위해 법당 앞에 세우는 장엄한 깃발 형태의 불구(佛具)를 말한다. 간(竿)은 깃대이다. 그러므로 당간지주라면 그 깃대를 붙들어 매는 기둥을 뜻한다.
창림사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500m 정도 가면 논 안에 서 있는 남간사터 당간지주를 보게 된다. 남산 지역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당간지주로, 높이가 3.6m 가량 된다.

보물 909호이다. 남간사터 당간지주가 보물 지정을 받은 것은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꼭대기에 파놓은 십자형의 고랑[竿溝] 덕분이다. 남간사터 당간지주처럼 십자형의 간구(竿溝)를 가진 당간지주는 달리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간사터 당간지주는 못 아래에 있다. 이 못을 끼고 들어가는 골짜기를 장창골이라 한다. 장창골 입구로 들어서면 금세 사적 173호인 일성왕릉에 닿는다. 일성왕은 신라 7대 임금으로 134년부터 154년까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서남산의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일성왕 역시 박씨 임금이다. 삼국사기는 그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 바로 뒤에 있는 양산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양산재는 신라 6부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곳.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 바로 뒤에 있는 양산재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양산재는 신라 6부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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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 박혁거세가 출현한 곳

일성왕릉에서 연못 옆을 돌아나와 35번 도로까지 나오는 길은 신라의 역사가 시작된 성지(聖地)다. 박혁거세가 알로 태어난 곳인 나정과, 혁거세 이전에 서라벌 땅을 다스렸던 6부 촌장들을 제사 지내는 양산재가 앞뒤로 붙어 있다.

삼국사기는 '(경주의 산골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사람들은 여섯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진한(辰韓)은 뒷날 신라의 땅이 된다. 진한은 백제의 땅이 되는 마한(馬韓), 가야의 땅이 되는 변한(弁韓)과 함께 한반도의 남쪽 지역을 삼등분한다. 이를 삼한(三韓)이라 하는데, 김유신이 죽기 얼마 전 문무왕에게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다(三韓爲一家)'고 말할 때의 '삼한'도 (내용상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지만) 마한, 진한, 변한을 지칭하는 '三韓'에서 온 용어이다.

'신라'를 국호로 정한 때는 303년(지증왕 4)

신라가 국호로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303) 10월이다. 삼국사기는 신하들이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德業日新 網羅四方), 그것으로 나라 이름을 삼는 것이 마땅할까 하옵니다'하고 아뢰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 이름에 '사방을 망라한다'는 큰 뜻을 넣은 것은 이때부터 신라가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혁거세왕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로 정했다. '아침해가 가장 일찍 환하게 비치는 땅'이라는 뜻이었다. 서라벌은 나중에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서벌, 사라, 사로로도 불렸다.

삼국유사는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후세에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정 복원 정비 계획' 안내판 아래로 나정의 솔숲 앞 잔디밭에 앉아 신라 초기 역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답사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정 복원 정비 계획' 안내판 아래로 나정의 솔숲 앞 잔디밭에 앉아 신라 초기 역사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답사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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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박혁거세 탄생 신화에서 한 가지 유심히 읽어야 할 것은 박혁거세는 물론 6부 사람들도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는 기록이다. 이는 박혁거세가 이곳에 오기 이전부터 경주 일대에 살고 있었던 6부 사람들도 본래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은 아니라는 말이다.

박혁거세 이전 6부 촌장들을 기리는 양산재

기원전 200년 전후부터 기원전 108년 직후 사이에 지금의 경기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일대로 내려온 고조선 사람들은 쇠로 만든 무기를 가진 철기인들이었다. 철제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병사들 모두가 최신식 무장을 갖춘 철기 국가의 전투력은, 당대의 수준을 감안하여 현대어로 표현하면 핵무기를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주민들이 볼 때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이었다.

그래서 6부 사람들도 원주민에게는 신이나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았다. 지금도 나정 동편에 있는 양산재에서는 6촌의 시조들을 제사 지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높은 하늘에서' 박혁거세가 내려오자 6부의 촌장들은 그를 '대장'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강력한 신무기로 무장한 외부 세력이 진입하게 마련인 고대 사회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적 245호인 나정은 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있다.

양산재, 신라 6부의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나정 바로 뒤에 있다.
 양산재, 신라 6부의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나정 바로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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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혁거세,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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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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