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제비
 수제비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수제비의 유래와 추억

비가 오락가락하는데다 바람까지 부는 날씨다. 이런 날엔 무엇으로 점심을 때우면 좋을까.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음식이다. 이 세상의 음식을 한데 모아 놓는다면 수천수만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점심때가 되면 먹을 것이 없다. 어쩌면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말리 옳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다시 말을 바꿔 보기로 한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먹을 만한 음식을 찾다 보니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고.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왜 그런 음식이 없겠는가. 누가 뭐래도 촉촉이 비는 내리는데 왠지 모르게 뱃속이 궁금할 적에 우리의 뇌 세포를 간질이는 음식이 있다. 그게 바로 수제비가 아닐는지. 수제비는 어떤 음식보다 저렴해서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요리법도 매우 간단해서 누구라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먼저 밀가루와 녹말가루를 섞고 나서 국수반죽보다 조금 질게 반죽을 한다. 솥에 맹물을 붓고 거기에 다시멸치를 집어넣은 다음 물을 끓인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손에 연방 물을 발라가면서 반죽한 것을 떼어 집어넣는다. 손에 물을 찍어 바르는 것은 반죽이 눌어붙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반죽을 다 떼어 넣었으면 파를 송송 썰어 넣고 뚜껑을 덮고서 한소끔 끓인다. 다 익었으면 수제비를 그릇에다 퍼담고 그 위에 살짝 고명을 얹는다. 주의할 것은 건더기들끼리 불어붙지 않게 국자로 이따금 저어주어야 한다는 것.

나같이 요리에 젬병인 사람도 능히 할 수 있는 음식이다. '누워서 떡 먹기'라 할지라도 결코 이보다 더 쉽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값도 싼데다 요리하기조차 쉬운 까닭에 수제비는 어느덧 된장찌개와 더불어 대중 음식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수제비를 즐겨 먹기 시작했을까. 인류가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만∼1만 5000년부터라고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밀을 재배했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미림리에서 발견된 밀은 BC 200∼1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경주의 반월성지, 부여의 부소산 백제 군량창고 등의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밀 재배의 역사가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밀 재배가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나 어렸을 적에만 하더라도 밀을 재배하는 면적이 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었다. 그러니 수제비가 아무나 해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옛 문헌에 '불탁(不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음식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수제비의 원형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불탁'이란 음식에 대해 <민족생활어 사전>을 쓴 이훈종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말에 건더기가 다 풀어져서 거의 먹을 수 없게 된 음식을 두고 풀데기라고 하는데, 이것이 한자어의 不托(불탁)에서 왔다고 하면 펄쩍 뛸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점잖은 분들이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는 것을 무면불탁(無麵不托)이라고 한다. 불탁은 달리 탕병(湯餠)이라고 했으니 떡국인데 무면불탁(無麵不托)이라면 이것은 건더기 없는 떡국이다. 건더기 없는 떡국이라면 이건 풀데기지 딴 것이 아니다. - 이훈종의 '漢字사랑방'에서

내 어렸을 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훈종 선생의 얘기가 사리에 꼭 들어맞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모르긴 해도 '건더기 없는 떡국'이야말로 수제비의 원형이 틀림없을 것이다. 유년시절. 내게 수제비란 음식은 쌀·보리가 떨어져서 끼니를 건너뛸 수밖에 없을 때 그냥 끼니때를 넘기기엔 뭐해서 밥 대신에 먹었던 음식이었다. 그 시절엔 부양가족도, 아무 재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로 밀가루를 배급했다. 그래서 우리 동네 독거노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십리나 떨어진 면사무소까지 걸어가서 밀가루 배급을 타오곤 했다. 밀가루도 그렇게 귀한 시절이었으니 자연히 건더기는 전혀 없이 국물만 훌렁 훌렁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 겸 영화감독인 유하는 '수제비의 미학, 최진실론'이란 시에서 "수제비도 압구정동 레스토랑에서 팔면 고급 음식이 된다"고 설파한 바 있지만 수제비는 본디 그렇게 저렴하고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음식이다.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는 수제비

그래서일까. 어디 허름한 음식점에 가서 수제비 잘 하는 아주머니를 만나면 꼭 어머니를 만난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김사인 시인은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시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일부)라고 수제비 뜨는 처녀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동경하기까지 한다. 혹 수제비 뜨는 처녀의 이미지에서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러나 수제비가 그렇듯 서민적인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수제비를 고무·찬양하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이면우의 시 '수제비 뜨는 남자'와 안도현의 시 '수제비' 정도가 읽을 만한 축에 속한다. 그러나 이민우 시인의 시는 몇 해 전에 일독한 바 있으니 오늘은 안도현의 시 '수제비'를 한 번 읽어보기로 하자.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관련사진보기

비 온다
찬 없다

온다 간다 말 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 반죽 치대는
조강지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
        - 안도현 시 '수제비' 전문

수제비와 칼국수는 밀가루를 기본 재료로 하는 음식이란 점에서 한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이는 이 두 음식 간에도 미세한 차이는 있다. 칼국수가 맑은 날에 먹는 음식이라면 수제비는 비 오는 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것 말고 두어 가지만 더 든다면 수제비는 커다란 양푼에 먹어야 제맛이라는 것과 두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져야 일품 수제비라 할만하다는것이다. 

안도현의 시 '수제비' 역시 비 오는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온다 간다 (아무) 말 없'이 비가 내리는 날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헛발 짚기도 하는 평화스런 바깥 풍경과 달리 방안 풍경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어머니(조강지처)가 수제비를 만들려고 "열심히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있지만 그 새를 참지 못한 '개구리(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왁자하게 울"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라는 끝 구절에 이르면 방안에는 저녁이 가까워지도록 온종일 화투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이 왜 굳이 수제비 만드는 사람을 '조강지처'라 했는지 알조다. '조강지처'가 아니라면 누가 그 꼬라지를 봐주겠는가.

안도현의 시 '수제비'가 그려낸 풍경은 내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도 많이 봐 왔지만 신경림 시인의 <농무>에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도현이 그려낸 풍경은 현재의 풍경이 아니라 추억의 풍경이다. 어쩌면 자신이 지나온 어린 시절을 충실히 그려낸 것일 수도 있다.

시 '수제비'는 비 오는 날의 서정을 그림처럼 그려낸 매우 뛰어난 시다. 매우 짤막짤막하게 이어지는 시구(詩句)와 제목을 '수제비'라 붙였지만 수제비라는 단어는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점. 이 두 가지 점이야말로 시의 긴장을 끝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는 힘이다.. 

지금 창밖에선 "온다 간다 말 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어느 것에도 걸림 없이 가고 옮을 자유자재로 하니 비야말로 대자유인인 셈이다. 그러나 하찮은 나는 한갓 끼니 하나를 때우는데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 많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으로는 수제비나 들면서 저 비처럼 대자유인이 될 소지라곤 전혀 없는 나를 위로해야 할 것 같다.  


태그:#비 , #수제비, #창비 , #안도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