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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시는 꽃밭이 어두워진다 꽃잎에 맺힌 물방울 속, 산과 하늘과 나무와 꽃들이 절벽처럼 에둘러 있다 세계의 문이 닫히듯 물방울 하나 폭 꺼진다 엷은 빛에 기대어 수천 겹 층을 이룬 만상의 색상, 마침내 얇고 어두운 막을 벗어나 꽃밭으로 녹아든다 여러 번 생을 살아도 거듭, 주저 없이 흘러가는 육체들의 검은 강
살붙이여 무변 허공을 질러와 또 점점 부푸는 물방울이여, 더는 매달릴 수 없을 때 누구도 닦아줄 수 없는 물방울 속으로 소리 없이 낯익은 미움이 지나간다

꽃의 발등이 적막하게 물에 잠긴다 
- 12쪽, '검은 꽃밭' 모두

어둡다. 캄캄한 밤길을 걷는 시인이 바라보는 밤하늘엔 오래 전에 죽은 여자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 걸려 있다. 초승달이 내뿜는 희미한 빛은 시인이 당달봉사처럼 더듬으며 걸어가는 밤길을 제대로 비추지 못한다. 그래도 시인은 초승달을 길라잡이로 삼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밤길을 걷고 있다. 

무겁다. 머리에 이리저리 뒤엉긴 세상을 이고, 어깨에는 천근만근 되는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시인이 살아가는 삶은 너무 무겁다. 이리저리 뒤엉긴 세상을 더듬는 시인이 매듭을 찾아 한 올 또 한 올 아무리 풀어내도 세상은 더욱 엉기기만 한다. 그렇다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삶이란 쇳덩이를 그냥 내려놓을 수도 없다.

시인 윤은경. 그가 펴낸 시집 <검은 꽃밭>에 심어져 있는 시란 꽃은 모두 검다. 잎사귀도 검고 꽃잎도 검다. 그가 쓴 시들이 어둡고, 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이 무거운 것도 이 '검은 빛' 때문이다. 그는 이 '검은 빛' 속에서 찬란한 빛을 찾는다. 어둠 속에 있어야 빛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목숨이란 질긴 그물에 단단히 묶여 있는 삼라만상

윤은경(46) 시인이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영원을 찾아내는 두 번째 시집 <검은 꽃밭>(애지)을 펴냈다
▲ 윤은경 두 번째 시집 <검은 꽃밭> 윤은경(46) 시인이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영원을 찾아내는 두 번째 시집 <검은 꽃밭>(애지)을 펴냈다
ⓒ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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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사이를 걸었다. 조심조심 걷는데도 자그마한 벌레들은 후득 후드득 튀어 오른다. 은빛 깃털을 단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실려 하늘하늘 나를 스쳐간다. 다른 몸을 입은 이 많은 목숨들이, 이들의 허공이 내 허공에 와 오래 머물렀다 간다. 목숨이라는 질긴 그물에 벌레도 꽃도 나도 단단히 묶여 있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대전충남작가회의'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은경(46) 시인이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영원을 찾아내는 두 번째 시집 <검은 꽃밭>(애지)을 펴냈다. 2005년 5월, "'잠긴 몸'의 부정성에서 출발하여 '희망의 치정'을 노래하는 긍정성에서 끝난다"는 평가를 받은 첫 시집 <벙어리구름>을 펴낸 지 3년만이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53편의 시가 검은 꽃밭에 피어난 검은 꽃이 되어 여기저기 짙은 어둠의 향기를 흩날린다. '날개'·'바람거울'·'거품이야기'·'가막사리'·'저물녘편지'·'딱정벌레'·'청미래'·'검은 햇빛'·'꽃 지네요'·'바람꽃'·'빈 집의 마음'·'저 온몸이 식욕인 어둠'·'채석강 물소리'·'산수유나무와 나' 등이 그것.

윤은경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게 바치는 시"라고 말한다. 윤 시인은 이어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 영원으로 계속 이어진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진정한 소멸은 아니다. 헤어짐도 헤어짐이 아니다.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이 있을 수 있다"라며, 소멸과 영원 사이에 놓인 이차방정식을 푼다.

이별은 '기막힌' 만남을 기약하는 지름길

기막힌 이별 하나 했으면 좋겠다
약속이란 말을 대신하여 한 생각만으로, 여우비 내리는 봄하늘처럼 마음 뒷전 둥그런 고요가 사뭇 열 오른 눈자위 지그시 누르는, 돌아온다는 말조차 없이 돌아서서 휘는 처음과 끝

- 21쪽, '이봄엔' 몇 토막

시인 윤은경에게 있어서 이별은 '기막힌' 만남을 기약하는 지름길이다. 까닭에 또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약속 대신 마음으로 약속한다. "사뭇 열 오른 눈자위 지그시 누르는 몸짓"으로 약속한다. "돌아온다는 말조차 없이 돌아서서 휘는 처음과 끝"이란 시어가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별은 처음과 끝이다. 이별은 곧 만남(처음)이며, 만남은 곧 이별(끝)이다. "석양 들녘을 걷다가 문득 아득해져 서 있으면 적막천지 우주 저 편에서 무한히 내려와 가만히 눈 맞추는 풀꽃 한 송이"(이봄엔)도 전생의 이별이 낳은 이생의 만남이다. 이생의 만남은 곧 "필생의 굳은 약속" 때문이었다.   

시인의 시를 곰곰이 곱씹고 있으면 마치 불교에서 최고 경전이라 일컫는 <반야심경>에 포옥 빠져드는 듯하다. 모든 것은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공(空),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는 연기(緣起)사상 말이다. 아니, 어쩌면 시인은 <반야심경>을 시로 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53편의 시가 검은 꽃밭에 피어난 검은 꽃이 되어 여기저기 짙은 어둠의 향기를 흩날린다
▲ 윤은경 시집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53편의 시가 검은 꽃밭에 피어난 검은 꽃이 되어 여기저기 짙은 어둠의 향기를 흩날린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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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 머물다 사라져야 다시 한순간 머물 수 있다

불현듯 활짝 열릴 것이네

석 달 열흘 기다려 아주 잠깐 열렸던, 다시는 열고 들어갈 길 없는 문, 그늘은 아무런 말이  없지만, 어쩌나 염천의 푸른 하늘 열꽃 툭툭 터지듯 내 피돌기는 더욱 빨라지는데, 여기 섰던 당신 이글이글 타오르는 물길 불길 지나쳐버렸네

- 39쪽, '배롱나무 꽃그늘' 몇 토막

시인은 붉게 피어나는 목백일홍나무 앞에 서서 이 세상을 먼저 떠난 '당신'에게 시를 쓴다. 석 달 열흘을 기다려 피어나는 목백일홍 꽃잎이 잠깐 열렸다 다시 닫히는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다시 불현듯 활짝 다가올 '당신'을 기다린다. 하지만 한번 닫힌 꽃잎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푸른 하늘 열꽃 툭툭 터지듯 내 피돌기는 더욱 빨라지는데…."

시인은 꽃잎 닫은 목백일홍나무 아래 서서 "오래 벌서듯" 기다린다. 그렇게 "다시 수많은 석 달 열흘을 기다린다면 / 수없는 허공이 생겨나고 수없이 문들이 피어나고 거기 눈 맞춘 내 어느 하루 선연히 꽃빛 물들어 불현듯 당신 붉디붉은 향기의 오라"에 묶일 그날. 그날을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시인은 믿는다. 오래 오래 기다리다 보면, 그리하여 목백일홍나무가 다시 붉디붉은 꽃잎을 여는 그날, '당신'이 거기 붉디붉은 향기가 되어 손짓할 거라는 것을. 이 세상 모든 것은 한순간 피었다 한순간 지고, 한순간 머물다 한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한순간 져야 한순간 다시 피어난다는 것과 한순간 사라져야 한순간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면복친당의 곡소리"는 곧 유복친당을 향한 곡소리

말라죽은 모과나무를 친친 감고 능소화가 피고 있다

말라죽은 모과나무 아래 뚝뚝 능소화가 지고 있다

한 죽음의 발 아래 또 한 죽음이 세월 밖으로 주저앉는다

장맛비 멈춘 잠깐 사이, 매미 울음이 면복친당의 곡소
리 같다

사람이 기루어하면 꿈에 뵌다는데,

썩은 나무를 안고 무너지는 꽃더미 꿈

- 51쪽, '부음' 모두

이 시에서 "말라죽은 모과나무를 친친 감고" 피어나는 능소화는 시인 자신과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다. "말라죽은 모과나무 아래 뚝뚝" 지고 있는 능소화는 시인의 눈에 비치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다. 시인은 말라죽은 모과나무와 그 모과나무를 감아 올라 꽃을 피우다가 지는 능소화를 통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매미 울음이 면복친당의 곡소리"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이 기루어하면(은혜하다, 사모하다) 꿈에 뵌다는데"도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면복친당이란 뜻을 꼼꼼히 짚어보자. 흔히 친당(親堂)과 본당(本黨)을 합쳐 일가라 한다. 그중 친당이란 아버지당, 본당은 어머니당이란 뜻이며, 일가란 한집을 말한다.

친당에는 옷이 있는 친당이 있고, 옷이 없는 친당이 있다. 옷이 있는 친당은 유복친당(有服親堂, 8촌 안에 든 사람), 옷이 없는 친당은 면복친당(免服親堂, 9촌 이상 되는 사람)이라 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면복친당의 곡소리"는 곧 유복친당을 향한 곡소리다. 유복친당도 곧 면복친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소멸의 슬픔은 영원으로 가는 아름다운 순간

윤은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검은 꽃밭>은 소멸의 슬픔을 영원으로 가는 아름다운 순간이라 읊조리고 있다. 어둠이 있어야 밝음이 있고, 삶이 있어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밝음과 삶보다는 어둠과 죽음 속에 더 깊숙이 웅크려 앉아있다. 왜? 밝음, 삶은 어둠과 죽음 속에서 바라보아야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수는 '풀꽃 한 송이의 무게'라는 해설에서 윤은경 시인은 "꽃밭을 그려도 화사한 빛깔 대신 검은 빛깔의 어두운 꽃밭을 그린다"고 말한다. 이씨는 이어 "꽃 핀 풍경보다는 꽃이 진 풍경에 먼저 눈길이 머물고, 봄날의 햇빛조차 검다는 걸 알아챈다. 시인에게 자연은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는 장이자 그녀의 내면 공간이다"라고 평했다.

시인 윤은경은 196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96년 <시와시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벙어리구름>이 있으며, 지금은 계간 <문학마당> 편집위원, <신인문학회>동인, 대전충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은경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게 바치는 시"라고 말한다
▲ 윤은경 시인 윤은경 시인은 이번 시집에 대해 "이 세상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게 바치는 시"라고 말한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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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힘겨운 삶 구원할 수 있는 영원한 무기"
- 윤은경 시인과 일문일답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어릴 때부터 시를 읽다 보니까 시가 너무 좋아서 쓰기 시작했다. 고교 때 혼자 문집도 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들쭉날쭉 치기 어린 시가 대부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다."

-지금은 물질자본주의 시대다. 왜 돈도 밥도 되지 않는 시를 쓰는가?
"물질이 시를 집어삼킬 수 없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까지 살 수 없듯이. 시는 처음부터 돈도 아니고 밥도 아니다. 시는 그저 제 삶의 노래이자 나아가 제 주변 사람들의 삶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는 삶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도 삶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듯이.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 삶이 있기에 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를 쓰다 보면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워진다

-윤은경 시인의 시는 몹시 어둡고 무겁다. 시가 이 어둡고 무거운 삶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가?
"힘겨운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영원한 무기가 시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환상일지는 모르지만 시를 쓰다 보면 삶과 죽음에서조차 자유로워진다. 제가 만약 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제게 삼라만상의 뿌리를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를 준 것은 결국 시였다."

-요즈음 시인들이 쓰는 시들을 어떻게 보는가?
"좋은 시는 시대상황에 따른 메시지와 언어미학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은 고학력자들이어서 그런지 삶의 땀내음은 나지 않고 서구적인, 포스트모던한 감성 그 자체만 강조하는 것 같다. 시는 감성 그 자체만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것은 현대사회가 상업자본주의로 치달리면서 개인의 존재가 무의미해진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불통의 사회를 그들만의 화법에 담는 것 같다. 시인은 앵무새처럼 불통을 불통 그대로 읊는 것이 아니다. 불통을 터는 자가 시인 아닌가. 이러한 불통을 터기 위해서는 전통 서정을 아우러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장 존경하는 시인과 좋아하는 시는?
"시인들은 다 존경하지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올곧은 삶과 철학을 특히 존경한다. 시는 미당 서정주 선생과 김춘수 선생의 시를 좋아한다. 미당 선생의 친일행적은 싫어하지만.^^ 사실, 그분들의 시를 읽으며 벽을 느꼈다. 어떻게 미당과 김춘수 선생의 시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미당이 가는 시의 길이 따로 있고, 제가 가는 시의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진정한 소멸은 아니다

-이번 시집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이번 시집은 모든 소멸하는 것들에게 바치는 시집이다. 저는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 계속 이어짐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헤어짐도 헤어짐이 아니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진정한 소멸은 아니다. 이번 시집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삼라만상의 영원성, 곧 '이어짐'이다."

-이번 시집을 읽어보면 윤회사상이라든가, 연기론, 반야사상 같은 것이 엿보인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사이비 불교 신자다. 어머니께서 불교에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저도 모르게 삶 속으로 시 속으로 배어든 것 같다."

-앞으로도 삶과 죽음, 영원의 문제를 계속 시의 주제로 다룰 것인가?
"그동안 존재와 소멸에 너무 빠져 있어서 시가 어둡고 무겁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다음 시집에는 현재적 삶에 밀착된 건강한 시를 많이 담고 싶다. 시란 삶의 한 단면을 가지고 전체를 정밀하게 조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찬란한 빛을 찾고 있는 윤은경 시인. 그가 하루속히 깊은 어둠을 밝히는 빛을 찾기를, 그 빛을 들고 이 세상에 나와 스러져가는 모든 것들을 영원으로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길 바란다. 이제는 더 이상 빛이 찾아들지 않는 동굴 같은 어둠 속에만 앉아 있지 말고 당당히 빛을 찾아 나서라는 그 말이다.



검은 꽃밭

윤은경 지음, 애지(2008)


태그:#윤은경 시인, #검은 꽃밭,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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