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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낮.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며 숨돌릴 틈을 내지 못합니다. 새벽바람으로 일어나 잡지사에 보낼 마감글을 쓰고 또 뭔가를 끄적거린다며 법석대다가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싶을 때면 전화가 오고, 도서관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고단함과 졸음이 뒤섞입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진기를 들고 잠깐 해바라기를 하러 골목길 마실을 갑니다.

지난 주말, 동네 문화잔치를 펼치면서, 여태껏 문구도매상한테 빼앗겼던 우리들 골목길과 거님길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딱 하루뿐이었지만. 여느 때에는 이 앞이 도매상 물건과 짐차 때문에 무척 어수선합니다.
▲ 문구도매상 앞 지난 주말, 동네 문화잔치를 펼치면서, 여태껏 문구도매상한테 빼앗겼던 우리들 골목길과 거님길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딱 하루뿐이었지만. 여느 때에는 이 앞이 도매상 물건과 짐차 때문에 무척 어수선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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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으로 내려와 문간에 섭니다. 헌책방과 문구 도매상이 있는 이 거리에서, 헌책방은 가게 앞에 책을 내어놓고 있지 않으나, 문구 도매상은 사람들 걷는 길과 차 다니는 길에까지 물건을 잔뜩 벌여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매 문방구에서 물건 실으러 오는 차, 또 공장에서 떼어오는 물건을 내리는 차는 두찻길로 된 한쪽을 꽉 막아섭니다.

길 한쪽에는 하염없이 세워져 있는 자동차가 있고, 길 건너편은 도매상 짐차가 뻔질나게 드나듭니다. 이분들한테는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씽씽 내달리는 차에 치이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다녀야 할 거님길에 ‘짐을 부려놓지 않는 일’에는 한 번도 마음을 기울인 적이 없어 보입니다. 동네 분들이 몇 차례 말한 적이 있다지만, 대꾸는 싸늘했답니다.

찻길을 걷습니다. 거님길은 도매상 물건으로 꽉 차 있으니까요. 도매상이 끝난 곳에는 거님길도 끊어져 있습니다. 차가 다닐 길만 마련되어 있고, 사람이 거닐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도매상 앞을 벗어났어도 찻길로 걷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람 거니는 길이 아니라 차가 싱싱 달려야 하는 길에서 마음을 졸이며 걸어야 하나, 생각하다가 금곡제일슈퍼가 보이는 금곡동 48번지께에서 골목길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히유, 이제부터는 자동차 시달림에서 벗어납니다.

문간 위 소담스런 꽃그릇과 파란 하늘. 이 파란 하늘을 며칠만이 아닌 날마다 보고 싶습니다. 울타리에 널어놓은 빨래. 울타리라기에는 퍽 엉성한데, 이 엉성한 울타리는 빨래 널기에 아주 좋습니다.
▲ 문간 위 꽃그릇, 빨래 문간 위 소담스런 꽃그릇과 파란 하늘. 이 파란 하늘을 며칠만이 아닌 날마다 보고 싶습니다. 울타리에 널어놓은 빨래. 울타리라기에는 퍽 엉성한데, 이 엉성한 울타리는 빨래 널기에 아주 좋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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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발걸음을 늦춥니다. 왼편과 오른편 골목집 문간을 바라봅니다. 문간 위쪽에 꽃그릇이 놓여 있는 집이면, 하나같이 집 안쪽은 온통 꽃나라입니다. 한두 해가 아닌 열스물 해, 또는 서른마흔 해에 걸쳐서 당신들이 이 골목길을 지키면서 모아 온 꽃그릇이기 때문에, 당신들 집 안에만 놓기에는 자리가 비좁아 문간 위며, 당신들 집 울타리 둘레와 위며, 골목길이며, 크고작은 꽃그릇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날마다 부지런히 물을 주고 북을 돋웁니다.

왼편 골목집 문간 위로 맑은 하늘이 파랗게 보입니다. 이틀쯤 바람이 거셌고 비도 뿌린 덕분에 하늘빛이 살아났습니다. 오른편 골목을 봅니다. 안쪽 골목 오른쪽으로는 꽃그릇이 여럿 놓이고, 왼쪽 집 울타리에 빨래가 척척척 얹혀 있습니다. 이 집은 빨랫줄을 따로 걸지 않고 이렇게 울타리에 널어 놓으시는군요. 햇볕 곱게 받아 잘 마르겠습니다.

두어 걸음 걸어 그 옆집 꽃그릇을 봅니다. 응? 무슨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팔랑거리는 쪽지를 죽 펼쳐서 읽습니다.

 “우리 집 단풍나무 돌려주세요.”

도둑질한 꽃을 돌려 달라는 쪽글, 그리고 볕이 잘 드는 곳을 따라 길에 놓인 꽃그릇들. 골목사람이 손수 가꾼 꽃밭입니다.
▲ 쪽글, 골목길 꽃 도둑질한 꽃을 돌려 달라는 쪽글, 그리고 볕이 잘 드는 곳을 따라 길에 놓인 꽃그릇들. 골목사람이 손수 가꾼 꽃밭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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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가 단풍나무 꽃그릇을 훔쳐갔나?

세상에, 골목집 꽃그릇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니. 모두들 이렇게 집 안팎에 곱고 싱그러운 푸성귀와 꽃과 나무를 기르고 있는데, 애써 가꾼 꽃나무를 훔쳐가다니. 골목을 지나다니는 누구나 즐겁게 바라보고 기쁘게 마주하는 꽃나무가 아니라, 얌체처럼 자기 집 안쪽에 고이 들여놓고 혼자 즐기려 하는 시커먼 마음이라니.

이 골목집에서 꽃나무를 훔쳐간 사람은 다시 이 앞을 지나갈까요. 다시 이 앞을 지나가며 이 쪽글을 읽을까요. 다음에 다시 와서 다른 꽃그릇마저 훔쳐갈까요. 이렇게 되면 이웃집 사람들은 어이해야 좋은가요. 도둑질을 걱정해서 자기네 꽃그릇을 모두 집 안으로 들여놓고 꽁꽁 감추어야 하나요.

하아. 한숨 두어 번 몰아쉰 다음 고개 꾸벅 숙이고, 안쪽 깊은 골목으로 접어듭니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따라서 길게 꽃잔치가 펼쳐져 있습니다. 볕이 왼오른쪽 가리지 않게 잘 들었다면 왼오른벽을 따라서 나란히 꽃그릇이 벌여져 있을 터이나, 한쪽에만 볕이 들어옵니다.

헌 배드민턴채를 거꾸로 박아 고추포기 막대로 삼기도 합니다. 찢어지거나 구멍난 플라스틱 통은 어김없이 꽃그릇으로 바뀝니다. 버려지는 물건이란 없습니다. 쓰레기가 되는 물건이란 없습니다. 쓸 만큼만 알맞게, 쓰임새에 따라 알뜰히 갖출 뿐입니다.

헌 배드민턴채를 막아 놓기도 한 고추포기 막대.
▲ 고추포기 헌 배드민턴채를 막아 놓기도 한 고추포기 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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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담에 잇빛으로 해맑은 금낭화가 보입니다. 금낭화 꽃그릇도 훔쳐갈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불현듯 듭니다. 부디. 제발.

문간 둘레에 놓인 빗자루를 봅니다. 골목집 분들은 틈나는 대로 나와서 골목길을 쓸겠지요. 쓸어 보았자 바닥에 떨어진 휴지조각이나 비닐껍데기도 없을 금곡동 48번지이건만, 그래도 날마다 쓸고 또 쓸며, 이 길이 당신들한테나, 어쩌다가 한 번 지나가는 사람한테나 볕 따사롭고 꽃 싱그러울 수 있도록 가꾸실 테지요.

홀로 빨간 꽃 한 송이 바라봅니다. 무슨 꽃일까. 궁금하여 여쭈어 보고 싶지만, 지금 시간은 모두들 집을 비우는 때. 파란 대문과 꽃나무가 잘 어울리는 이○○ 아주머니 댁 앞에서 사진 열 장쯤 찍습니다. 엊그제 저녁, 이 앞에서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아주머니는 늦은저녁에 웬 사람이 당신 집 앞에서 얼쩡거리나 싶어 소리를 꽥 지르려고 하셨답니다.

가까이 다가와 보니, 성당에서 자주 보는 이웃사람인 줄 알았다며, 집으로 들어가시는 김에 당신 집안을 살짝 보여줍니다. 이○○ 아주머니 집 안쪽은 집 바깥보다 아리따운 꽃잔치였습니다. 툇마루도 마루바닥도, 또 조그마한 마당까지도. 혼자서 기도를 드리고 싶어서 마련했다는 기도방도 보여주셨습니다.

아주머니가 가꾸는 꽃처럼 곱게 꾸며 놓은 기도방입니다. 하느님을 믿든 안 믿든, 이 방에 다소곳하게 들어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으면 마음이 무척 맑아지겠구나 싶었습니다.

금낭화를 보려면 산이나 들뿐 아니라, 인천 금곡동 골목길을 찾아오셔도 됩니다. 파란대문 집은, 안팎이 온통 꽃나라입니다. 금곡동 48번지를 가장 빛나게 꾸며 주는 집입니다. 그리고 이 집이 아니더라도 골목꽃은 이웃집들이 오순도순 가꾸고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 골목 금낭화와 파란대문과 ... 금낭화를 보려면 산이나 들뿐 아니라, 인천 금곡동 골목길을 찾아오셔도 됩니다. 파란대문 집은, 안팎이 온통 꽃나라입니다. 금곡동 48번지를 가장 빛나게 꾸며 주는 집입니다. 그리고 이 집이 아니더라도 골목꽃은 이웃집들이 오순도순 가꾸고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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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사진을 찍다 보니, 뒤에서 누군가 주춤주춤. 아차, 사진 찍는 젊은이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가 못 지나가고 서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사진기를 거둡니다.

금곡동 48번지가 끝나는 무렵, 안식일교회가 건너다보이는 자리에 있는 골목집에는 새빨간 장미 한 송이 소담스레 피어 있습니다. 뒤로는 볕바라기 하려고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가 가지런합니다. 옆으로는 이 집 분들이 앉는 자리인지, 또는 동네 분들이 앉는 자리인지, 걸상 몇 놓여 있습니다. 걸상 옆으로는 따로 꽃그릇 몇 가지 벌여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에 매발톱꽃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호라, 매발톱꽃이라, 산골짜기에서 보던 너를 이 골목길에서 보네? 산골마을에서 떠나던 때, 이제 너를 못 보겠구나 싶어서 씨 몇 알 받아 왔는데, 내가 씨를 뿌리지 않아도 이렇게 이 골목에서 잘 자라고 있구나. 반갑다, 얘.

장미꽃과 빨래. 그리고, 골목에서 만난 매발톱꽃. 산골짜기 들꽃이 이곳, 도심지 골목길까지 옮겨와서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저로서는 이름을 아직 모르는 빨간 꽃. 이 모두가 예쁘고 어우러져 있습니다.
▲ 장미와 매발톱꽃과 빨간 꽃 장미꽃과 빨래. 그리고, 골목에서 만난 매발톱꽃. 산골짜기 들꽃이 이곳, 도심지 골목길까지 옮겨와서 자라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저로서는 이름을 아직 모르는 빨간 꽃. 이 모두가 예쁘고 어우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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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사진 두어 장 더 찍고 기지개를 켭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하늘이 맑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꿉니다. 내일도 모레도, 또 글피와 그글피까지 하늘이 맑자면, 우리들이 자동차를 덜 몰아야 하고, 집에서 전기기구도 덜 돌려야 하며, 할인마트에서 잔뜩 사들이는 물건도 줄여야 할 텐데, 이렇게 마음을 써 주는 분들이 있을까나.

오던 길을 되짚습니다. 금곡제일슈퍼로 빠지는 골목으로 돌아옵니다. 볕 잘 드는 자리에 빨랫대 서 있습니다. 빨랫대는 비어 있고, 그 옆 빨랫줄에 한식구 빨래 몇 점이 걸려 있습니다. 어른 옷과 아이 옷과 수건. 그 옆으로는 골목에서 자라는 수수꽃다리인데, 꽃이 모두 지고 푸른 잎만 반짝거립니다. 꽃이 다 졌으니, 네가 수수꽃다리인 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손바닥으로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구멍가게에 들릅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에는, 꽃그릇이 해맑게 피어날 수 있고, 골목사람은 푸성귀를 스티로폼통에 기를 수 있으며, 빨래를 힘차게 해서 볕에 곱게 말릴 수 있습니다. 수수꽃다리 꽃이 모두 지고 잎만 싱그럽습니다.
▲ 골목길 빨래, 수수꽃다리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에는, 꽃그릇이 해맑게 피어날 수 있고, 골목사람은 푸성귀를 스티로폼통에 기를 수 있으며, 빨래를 힘차게 해서 볕에 곱게 말릴 수 있습니다. 수수꽃다리 꽃이 모두 지고 잎만 싱그럽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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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태그:#골목길, #골목집, #꽃, #인천, #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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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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