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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근원적이거나 정신적이다

자기네 엔진 오일이 "소리 없이 강하다"라고 뻥을 치는 회사가 있다. 물론 지금은 소비자들이 식상할까봐 소리없이 선전을 바꿔치긴 했지만. 하지만 소리 없이 강한 출판사는 있다. 이건 절대로 뻥이 아니다. 불황이라서 사느니 못 사느니, 난리를 치지만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출판사들. 바로 1966년, 출판계에 첫발을 디딘 범우사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소리없이' 강한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범우(汎友)란 '친구를 널리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1967년,  당시 양주동을 비롯한 명사와 정치인들의 수필을 한데 모은 <사향의 염>이라는 책을 펴낸 이래 수 많은 양서들을 펴내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척박한 정신을 기름지게 만들고 있다.

범우사가 펴내는 책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것은 '범우문고'라는 시리즈물이다. 일본의 유명한 문고판인 이와나미 문고판에서 착안해서 발간하기 시작한 이 '범우문고'는 초창기 범우사를 대표하는 아이콘 같은 것이다. 문고판은 손바닥만한 크기다. 책의 두께도 아주 얇다. 그렇다고 깔봐선 곤란하다. "가방끈이 길다고 공부 잘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판형 크고 두껍다고 좋은 책은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을 말하는가. 범우사 사장인 윤형두 선생은 범우문고판으로 낸 수필집 <책이 좋아 책하고 사네>에서 "책이 좋으냐 나쁘냐를 판단하는 본래의 기준은 이와같이 순수한가 아닌가, 근원적인가 아닌가, 정신이 깃들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라고 책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아끼는 범우문고판 책 목록 가운데는 곽말약이 쓴 <역사소품>이라든가 헤르만 헤세가 쓴 <방랑> 등이 들어 있다.

1970년대판 '박노자'인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

책 표지.
 책 표지.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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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의 가을>은  범우사가 이백열세 번째로 펴낸 문고판 책이다. 책의 저자는 박대인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이다.

그는 기독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로서의 직분을 위해 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틈틈이 한국 문학창작과 문학작품의 번역에도 힘썼다.

그는 한국 사람과 다름없는 처지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비평한다. 어느 유행가의 제목을 빌리자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 교수로 있는 박노자의 선배격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을 좀 더 명징하게 한다면 '내가 본 한국의 가을"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 속엔 6·25 직후 서울에서 탔던 '거리의 거북이' 전차 이야기를 비롯, 모두 29가지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수레 이야기, 원두막 등 지금은 사라져버린 풍물에 대한 이야기, 비닐우산이나 벼가 심어진 논을 좋아하는 까닭, 쌍화탕을 좋아하는 반면에 먹지 못하는 보신탕과 번데기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담하게 서술돼 있다.

또 글 가운데는 외국인인 그가 부닥치고 느끼게 되는 한국어에 대한 상념들도 있다. "...습니다 Talk"라는 글이나 '맞춤법, 마춤법, 맛춤법', '지금 산입', '존칭의 어려움' 등의 글들이다.

책의 표제가 된 '한국의 가을'이란 글은 1953년 가을, 한국에 첫발을 디딘 저자가 경험했던 범어사에서의 단풍 구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좋아하는 가을 풍경은 추수하는 풍경, 가을 들판의 황금빛 파도 등이며 가을의 맛은 홍시의 맛, 만둣국 맛이다. 그는 한국의 가을을 아름답게 하는 근원에는 초가집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우리가 간직할 수도 있었던 풍경들

박대인(1932~) 연보
1932년 2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비벌리에서 출생. 본명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 한국명 박대인(朴大仁)
1953년 예일 대학 사학과 B. A. 이 해 한국에 처음 옴.
1959년 예일 대학 신학부 졸업.
1966년 드류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받음.
1969년 수필 <쌍화탕과 나>(현대문학 8월호) 발표.
1971년 번역시집 <내일의 바다>(박두진 시집) 출간.
1972년 수필집 <감과 겨울과 한국인>, 수필 <한국인과 미국인>, <은행나무> 출간.
1975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 가운데 '로코코 시대'라는 글과 '기운 바가지'라는 글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6·25 직후의 한국 차량을 가리켜 '로코코 시대'라 명명하고 싶어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로코코 시대란 "18c 초에 인기였던 미술 스타일로 곡선을 많이 이용하며 즐겁고 활발한 영향을 준 복잡한 스타일"이었다.

6·25 직후의 버스는 이른바 나이롱 옷감에서 연유된 이름인 듯 보이는 '나이롱 버스'였다. 앞 부분에 너무 장식이 많아서 뒤의 절반이 가벼워 보이는 '버팔로차'라고나 할까. 그는 또 출세한 사람들의 상징이었던 '찝차'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불행히 검정 찝차와 무지개 버스, 그리고 시발 택시와 소형 합승들의 시대는 짧았다. 임시변통식의 교통망은 폭발하는 대도시의 인구를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교통수단은 대중화되었다. 큰 공장에서 똑같이 찍혀 나온 차량앞에 멋진 개성을 가진 차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현대화된 한국 생활 가운데 메스문화가 이 사회 속에 속했던 개성적인 현상 하나를 쫓아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 49쪽

외국인인 그가 아쉬워하는 대목을 우리는 아쉬워하지 않는 걸까. 기록 혹은 기억이란 더 나은 삶의 풍경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기운 바가지'라는 글에선 가을 등산 길에서 본 시골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는 한 시골집에서 여러 번 기운 바가지를 발견한다. 그것은 멋이면서 가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운 바가지는 풍부한 인간미의 멋을 가졌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바가지를 사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돈 주고 가져갈 만한 것이 아니었고 더구나 그 집에 당장 필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집이 자연과 어울리면서 인간미를 잃지 않는 현대적 생활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 기운 바가지가 그 초가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고이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 93쪽

이 책은 1976년 2월에 초판 간행되었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2005년에 다시 펴낸 2판이다. 아무래도 발간 즉시 읽었을 때보다는 생생한 느낌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사물에 대한 이해력이 훨씬 깊어진 지금에 이 책을 읽게 되니 내용을 더욱 다각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점도 없지 않다.

책을 읽으며, 이방인의 눈을 통해서 본 내 나라의 가을 풍경을 들여다 보는 시간은 왜 이 나라의 가을 풍경을 더욱 더 깊이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준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가을/ 박대인/ 범우사/2,800원/



한국의 가을

박대인 지음, 범우사(2005)


태그:#가을 ,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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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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