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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싼 택시요금(500만 짐바브웨달러)을 주고 달려왔는데, 나미비아 대사관에서는 비자 발급을 거부한다. 남아공에 가서 받으란다. 분명 대사관 정문 안내문에는 "비즈니스 비자만 발급하지 않고 여행 비자도 발급한다"고 되어있는데도.

 

내가 직원에게 "남아공에 간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 나미비아 대사관 대문의 인터폰을 통해 연결된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미비아를 가려고 하느냐."
"배낭여행객인데 나미비아 사막을 보러 간다."
"남아공을 가느냐."
"갈 계획이다."
"그럼 남아공 가서 비자를 받아라."

 

비자 발급이 귀찮아서 남아공에 가서 받으라고 떠넘긴 것이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만났던 남자대학생은 잠비아에서 나미비아 비자를 받았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다. 에티오피아에 이어 두 번째로 나미비아 비자를 받지 못했다.

 

보츠와나에서 직접 나미비아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남아공 케이프타운까지 가서 비자를 받은 뒤 나미비아로 들어가는 일정으로 바꾸어야 했다. 비용과 시간에 많은 낭비와 차질이 빚어졌다.

 

미련없이 하라레를 떠나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로 가기로 했다. 나미비아 비자를  받으면 하라레에 하루 더 머무르려던 참이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일단 다시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택시는 요금이 겁나 이제 더 이상 탈 수가 없다.

 

나미비아 대사관 앞에서 차를 기다리는 젊은이에게 물으니 자신도 시내로 가는 미니 버스를 기다린다며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미니 버스라야 봉고버스를 말하는데, 시내까지 요금은 15만 짐바브웨달러였다.

 

젊은이가 말한 대로 시내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다른 미니 버스를 갈아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를 가려면 먼저 마스빙고로 가야 하는데, 마스빙고 가는 버스터미널은 시내 외곽의 남쪽에 있었다. 음바레 무시카 버스터미널이다.

 

밥 말리는 오늘의 짐바브웨 현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음바레 무시카 버스터미널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사각형의 커다란 루파로 경기장(Rufaro Stadium)이 보인다. 지금은 축구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루파로 스타디움은 레게음악의 거장 밥 말리가 지난 1980년 짐바브웨 독립 축하 행사 때 공연했던 곳이다.

 

1980년 4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루파로 경기장에 벌어진 짐바브웨 독립 축하 행사에서 특별초청을 받은 밥 말리는 '짐바브웨(Zimbabwe)'라는 노래를 불렀다. 무가베도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축하행사에서 밥 말리는 10만 대중 앞에서 특유의 레게머리를 하고 흥겹게 몸을 흔들면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다. 짐바브웨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권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나가야 해.
더 이상 내부 권력 투쟁은 그만.
우리는 단결하여 사소한 문제는 극복해야 해.
누가 진정한 혁명가인지 곧 알게 될 거야.
난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아."

 

밥 말리가 짐바브웨의 독립과 단결을 촉구하며 부른 '짐바브웨'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밥 말리는 이미 1979년 발매한 <서바이벌>이라는 앨범에 이 노래를 수록했다. 밥 말리는 그동안 앨범 판매 수익금으로 짐바브웨의 독립자금을 지원해왔고, '아프리카여 단결하라 (Africa Unite)'는 노래를 통해 아프리카의 단결과 아프리카 정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왔다.

 

26년이 흐른 지금, 짐바브웨에서는 밥 말리의 노래가 거꾸로 무가베 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한 선동구호로 이용되고 있다. 밥 말리가 흑인의 자의식과 권리쟁취를 촉구한 노래 '일어나라, 일어나(Get up, Stand up)'라는 문구를 지폐에 쓴 반정부 유인물이 나돌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유통되는 지폐를 반독재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밥 말리가 노래했듯 '누가 진정한 혁명가인지'를 아는 데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한 때는 학구적인 학생이면서 훌륭한 교사였고 게릴라 전사로 아프리카 독립영웅이었던 무가베가 말년에 왜 이렇게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미국의 소설가이자 여행 작가인 폴 서룩스(Paul Theroux)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아공 케이프타운까지의 육로 여행기 <다크 스타 사파리(Dark Star Safari, 미국 마리너 출판사, 2004년)>를 썼는데, 여기에 무가베가 대학시절 "매우 학구적이고 책벌레(Bookworm)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무가베가 남아공 포트헤어 대학에서 공부할 때 동료였던 말라위의 한 여성의 말을 인용하면서.

 

1960년대 말라위에서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활동하면서 말라위 민주인사들의 망명을 도와주었다가 추방당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가진 폴 서룩스는 이 여행기에서 "서구세계의 경제원조나 호화판 선교활동은 아프리카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자 종교적 위선"이라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세실 로즈의 제국주의 유산으로 신음하고 있는 짐바브웨
 

물론, 오늘날 짐바브웨 비극의 원인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짐바브웨의 식민과정에서 일어난 서구 제국주의의 영토 약탈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100여 년 전에 뿌린 탐욕의 결과가 오늘날까지도 짐바브웨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의 케이프식민지 총독이자 다이아몬드와 금광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번 세실 로즈는 1888년 무력과 속임수에 의해 현재의 짐바브웨와 잠비아 땅을 사들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로즈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잠비아는 북로디지아,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로 불렀다. 로디지아(Rhodesia)는 '로즈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1960년대 아프리카 독립의 해에 일어난다. 인구의 1%밖에 안 되는 백인들이 1965년 이안 스미스를 총리로 나라 이름을 '로디지아'라고 부르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남로디지아인 짐바브웨가 1964년 흑인정권으로 독립한 북로디지아인 잠비아와 달리, 1980년에야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수의 백인들이 원래 주인이자 다수인 흑인들로부터 독립을 가로채갔기 때문이었다.

 

남아공의 소수 백인정권이 1961년 다수 흑인을 소외시킨 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1994년 흑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까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차별 정책을 펼친 것과 같다. 아프리카 땅에서 아프리카인을 배제한 채 같은 식민지배자였던 백인이 모국인 제국주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 셈이다.

 

짐바브웨와 남아공의 소수 백인정권은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 및 뉴질랜드에서 인디언 원주민을 쫓아내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 완전한 백인국가를 세운 사례를 쫓아가려 했다. 아프리카의 진짜 주인인 흑인을 제쳐놓고 백인들끼리 주인다툼을 한 것이다. 미국과 호주 등에서 성공했는데, 아프리카에서도 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당시 백인들의 생각이었다.

 

짐바브웨가 소수 백인정권인 로디지아에서 1980년 독립을 할 때부터 토지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로 남아 있었다. 짐바브웨의 식민과정은 세실 로즈의 영토 약탈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로즈는 당시 부족 간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무력으로 점령해 사실상 경작 가능한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된다.

 

금광을 찾아 짐바브웨를 손아귀에 넣은 세실 로즈는 금맥이 거의 고갈되자 이제는 짐바브웨 땅을 백인 이주민에게 대규모 농장으로 분배했다. 백인의 농장에서는 주로 담배 등 환금작물을 재배하게 된다. 영국이 케냐 중앙부의 비옥한 토지 450만 에이커를 아예 백인전용 토지(화이트 하이랜드)로 지정해 분배했던 것과 같다.

 

 

아프리카는 서구 제국주의가 백인국가 건설에 실패한 유일한 사례

 

세실 로즈의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점령과정은 데이비드 데이가 쓴 책 <정복의 법칙>에 나오는 '정복한 영토 지키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제일 먼저 "남의 땅에 깃발을 꽂고 소유권을 획득한 뒤 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자국민을 이주시켜 토지를 경작하도록 해 영원한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제국주의의 정복의 법칙 말이다.

 

세실 로즈는 다이아몬드와 금광 등 광산과 땅이 비옥해 농사짓기에 알맞은 짐바브웨와 잠비아의 토지를 물색한 다음, 강압과 회유에 의해 형식적 소유권을 획득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라는 이름을 붙여 국경선을 그은 뒤, 백인 이주민들에게 흑인으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분배해 대규모 농장 경작을 하도록 했다. 그 다음은 완전한 백인국가를 만들어 영원한 소유권을 가지려는 야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서구 제국주의의 아프리카 정복과정은 짐바브웨나 잠비아뿐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케냐에 대한 영국인의 정복과정과 남아공에 대한 네덜란드 및 영국의 과정,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의 정복과정에서 땅은 빼앗은 뒤 원주민을 내쫓는 수법은 동일하다.

 

스벤 린드크비스트는 <야만의 역사>라는 책에서 "'죽어가는 민족들(아프리카를 의미)'은 바로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데이의 <정복의 법칙>에서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도 '머릿수 싸움'은 계속된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땅을 놓고 뺏고 빼앗기는 싸움은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원주민과 정복자 사이에 주인자리를 놓고 서로 자리가 뒤바뀐 경우가 한두 차례가 아니다. 600만 년 전 인간이 태어난 뒤에 인류의 역사 자체가 이동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동은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공존이냐 배척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유럽 백인의 제국주의 역사는 선주민과의 공존보다는 말살을 통한 백인국가 건설의 길을 걸어왔다. 미국과 캐나다가 그렇고,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남미의 백인국가 대부분이 그렇다.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서 백인국가 건설의 꿈이 유일하게 실패한 곳은 아프리카이다. 살기가 좋은 북미와 남미, 호주와 뉴질랜드로 이미 유럽 백인의 대부분이 이주했기 때문에 환경이 척박한 아프리카에는 이주시킬 백인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유럽 백인들이 아메리카보다 아프리카에 먼저 눈을 돌려 백인들을 대규모로 이주시켰다면, 아프리카는 지금 백인국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과 호주·뉴질랜드는 오랫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대륙과 동떨어진 사실상 섬처럼 고립된 곳이었다. 2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호모에렉투스의 대규모 이동 역시 유럽과 아시아에서 멈췄다. 아메리카 대륙 등에는 애초 원주민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15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이은 대정복의 시기에 원주민 말살과 백인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머릿수 싸움'이라고 하는, 인구 수에서의 우위를 통해 정복의 영속성을 꾀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호주가 백인 이외의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백호주의 정책은 중국 등 아시아인의 수적 우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고, 옛날 일본이 조선과 만주에 일본인을 이주시키고, 최근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전 세계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중국이 티베트와 내몽골·신장 위구르 지역에 한족을 대량 이주시키는 것도 수적 우위만이 미래의 주인자리를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운전사가 왕인 아프리카 버스

 

음바레 무시카 버스터미널은 바로 옆에 재래시장이 있어 승객들과 상인들로 커다란 혼잡을 빚고 있었다. 아프리카 시장다운 모습이다. 무시카(Musika)라는 말 자체가 쇼나족 말로 시장을 말하는데, 은데벨레족은 렌키니(Renkini)라고 부른다. 터미널의 공중화장실은 오물을 치우지 않아 악취가 진동해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스빙고 가는 버스는 마침 승객이 꽉 차서 내가 타자 바로 출발했다. 대형버스이지만, 오래되어 낡을 대로 낡았다. 차문 입구에는 "좌석 65석, 입석 21"이라고 쓰여 있다. 좌석과 입석을 합친 탑승가능 인원이 86명이라는 표시이다.

 

마스빙고까지는 보통 5시간인데 요금은 100만 짐바브웨달러를 받는다. 버스 안에서 행상이 올라타 음료수와 신문을 판다.

 

나는 5시간 동안 지루할 것 같아 <더 헤럴드(The Herald)>라는 영어로 된 신문 1부를 샀다. 신문 1부의 가격은 15만 짐바브웨달러, 우리 돈으로 공식 환율 기준 1400원 정도이다.

 

도로 상태는 짐바브웨 전체가 그렇지만 그런대로 잘 포장되어 있고 넓다. 작은 관목으로 이뤄진 초원이 펼쳐지고 아프리카 겨울이라서 그런지 풀들은 누렇게 물들어 있다. 탄자니아에서 보던 사바나 지대이다. 대량으로 소 떼를 방목하는 목장도 보이고, 가축 산업도 체계가 잡혀 있는 인상이다. 옛날 백인들이 운영하던 목장들이다.

 

치브후와 음부마를 거쳐 마스빙고 가까이 다다랐을 때 길가에 놀던 원숭이 3마리가 버스를 보고 급히 초원으로 달아난다. 동물의 왕국인 탄자니아에서 보고 길에서 원숭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마스빙고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45분. 마스빙고 정류장에서 바로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1시간 이상 기다려 승객이 꽉 찼는데도 운전사와 차장이 무슨 이유인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출발할 것 같이 엔진 시동을 걸다 끄기를 몇 차례나 하면서도 정작 가지를 않는다.

 

나이 든 승객 중에는 못마땅한 듯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차 안에서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단지 오랜 습관 때문에 참는 것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내심은 정말 놀라울 정도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운전사가 주인이고, 승객은 종이다. 르완다 정도에서만 운전사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제때 운행을 하지 않으면 따지는 것을 봤을 뿐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항의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를 구경하고 다음날 마스빙고로 돌아오는 봉고버스의 운전석 옆에는 아예 승객의 기를 죽이는 빨간 스티커를 붙여놓은 것을 보았다.

 

"당신이 늦는다는 이유로 운전사에게 빨리 달리도록 강요하지 마라(Don't force me to drive fast because you are late)."

 

아프리카에서는 '운전사가 왕'이라는 말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과속운전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실제는 차가 늦게 출발하거나 중간에 오래 지체하고 운전사가 게으름 피우더라도 항의하지 말라는 뜻이다. 승객들의 항의에 미리 쐐기를 박아 놓겠다는 운전사의 심보가 가득 들어 있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는 운전사가 왕이고, 승객은 하인인 셈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운전사 마음대로'의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빨간 스티커 옆에는 또 "공짜 탑승 절대 없음"이라는 스티커도 붙여 놓았다. 운전사의 책임이나 안전운전, 고객 편의 운행에 대한 스티커는 하나도 없고, 운전사의 권리만을 강조하는 스티커만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로 가는 길에 만난 쇼나 조각품
 
오후 5시쯤 출발한 버스는 30분 정도 달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나만 내린다. '그레이트짐바브웨 2㎞'라는 팻말이 있다. 유적 입구 정류장이라고는 하지만 2㎞를 걸어가야 한다. 해는 이미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배낭을 메고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가니 쇼나 조각과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인들이 길거리에 시장터처럼 진을 치고 있다. 길거리 판매대이다.

 

"헬로우. 여기 와서 구경하세요. 멋진 제품들 많아요."

 

나를 유혹하는 상인들의 목소리이다. 주로 30·40대 여자들이 전통 제품을 팔고 있었다. 길거리 판매대에는 돌로 만든 조각품과 나무 조각품들을 쌓아 놓았다. 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짐바브웨의 쇼나 조각품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주변답게 돌 제품이 많다. 쇼나 조각은 짐바브웨 인구의 78%를 차지하는 쇼나(Shona) 부족이 만든 예술이라는 뜻이다. 커다란 석조 유적지인 그레이트짐바브웨도 바로 쇼나 부족이 만들었다. 예로부터 쇼냐 부족은 돌을 다루는 솜씨로 유명하다. 돌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어온 쇼나 부족은 조각도 돌 안의 영혼이 인도해 만드는 신성한 작업으로 여겨왔다. 쇼나 조각품에 인간과 돌의 일체감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쇼나 조각품 판매대에서 왼쪽으로 가는 길은 무티리퀘 호수(Lake Mutirikwe )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이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 팻말이 있는 오른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고급스런 그레이트짐바브웨 호텔이 나왔다. 호텔을 지나 다시 유적지 안으로 꽤 걸어가니 유적지 정문이 나오는데, 이미 해가 져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오후 6시쯤 국립공원 안 캠핑 장소에 도착했다. 직원들이 막 퇴근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군복 색깔의 카키색 옷을 입은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사무실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왜 이렇게 늦었느냐."
"걸어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싼 방 있느냐?"
"기숙사식 도미토리 방이 있다."
"그거라도 달라."

 

나는 미국 돈 8달러를 주고 공동 기숙사식 도미토리 건물로 갔다. 20대 초반의 젊은이 한 명과 13살 정도의 어린이 두 명만이 숙소를 지키고 있었다. 도미토리 건물은 시멘트로 지은 두 동짜리 건물인데, 한 동에 5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방안에 들어가니 시멘트 바닥에 철제 침대가 좌우로 두개 덜렁 놓여 있다. 식당도 없고, 방안에 이불도 전혀 없다.

 

일반 여행객 숙소의 도미토리 방을 생각했는데, 완전히 딴 판이다. 그냥 숲 속에 지은 시멘트 건물 안에 철제 침대만 갖다 놓은 꼴이다. 텐트와 침낭,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직접 요리하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이지, 혼자 배낭만 달랑 메고 다니는 여행객이 묵는 장소가 아니었다. 숙소에 묵는 여행객도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짐바브웨에서는 젊은이도 원숭이도, 여행객도 모두 굶주린다

 

젊은이와 어린이는 돌멩이 사이에 냄비를 올려놓고 나무 땔감으로 불을 붙여 죽을 끊이고 있었다. 이들이 자는 곳은 도미토리 건물 옆에 있는 짐바브웨 전통가옥인 다가 오두막 형태의 둥근 벽돌집이다.

 

"밥을 하는 것이냐."
"사드자를 만들고 있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사드자(Sadza)라는 음식은 하얀 옥수수를 으깨어 가루로 만든 뒤 물을 넣고 끓여 만드는 죽을 말한다. 유럽의 오트밀 죽과 같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나라도 옛날 이 같은 옥수수 죽을 끓여 먹었다.

 

사드자는 짐바브웨의 주식이다. 사드자는 케냐를 비롯한 동부아프리카에서는 우갈리라고 부르고, 우간다에서는 포쇼(Posho), 말라위와 잠비아에서는 은시마(Nsima), 남아공에서는 팝(Pap)이라고 부르는 음식과 같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사드자에다 채소를 손으로 뜯어 냄비에 넣고 나무젓가락으로 저어서 죽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이들이 음식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객들이 아무도 없느냐."
"요즘 여행객이 많이 줄었다."
"짐바브웨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여행하기가 어렵다."
"그렇다. 한국에는 인플레이션이 어떠냐."

 

사드자 끓이는 냄새가 배고픈 개코 원숭이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온통 캄캄한 어둠의 성벽이 쳐진 큰 나무에 어른 개코 원숭이 2마리와 새끼 원숭이 3마리가 죽을 끓이는 우리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원숭이들은 나무마다 뛰어다니고, "히이익~끼이익~"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배고픈 자신들도 봐달라는 듯한 원숭이의 애절한 목소리이다.

 

젊은이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사드자가 다 되었으니 같이 먹자."

 

이들은 저녁을 사드자로 때우고 있었다. 냐마(Nyama)라는 고기 한 점 없었다. 사실 나도 이틀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해 배가 "꼬르륵~ 꼬르륵~"하면서 무엇인가 채워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그러나 죽으로 겨우 저녁 식사를 때우고 있는 그들의 밥을 축낼 수는 없었다.

 

"나는 저녁을 먹어서 배가 부르다.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다."
"잘 자라."

 

나는 그들이 편하게 식사를 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원숭이들도 기다리다 지쳤는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숭이도 죽으로 저녁을 대신하는 그들의 하루 양식을 빼앗아 먹기에는 양심이 있었던 것 같다.

 

짐바브웨에서는 현지 사람이나 원숭이, 배낭여행객 모두가 배고픔에 시달린다. 방안에 들어온 나는 비상용 플래시를 켜서 배낭 속의 먹다남은 식빵과 사과 1개로 굶주린 배를 달래야 했다. 말라위 릴롱궤에서 짐바브웨 하라레로 출발한 전날 새벽부터 끊임없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이틀 동안 식사 한 끼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릴롱궤 숍라이트 슈퍼마켓에서 산 식빵과 비스킷·사과·음료수, 그리고 길거리에서 산 오렌지로 이틀을 버텨 오고 있었다. 이틀 동안 기아와의 싸움하는 강행군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장거리 이동이 많고, 휴게소가 거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식사를 하루이틀 빵으로 대충 때우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태그:#짐바브웨, #하라레, #마스빙고, #밥 말리, #로버트 무가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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