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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이 재미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짓말>. 서점에서 이 책의 표지를 봤을 때, 말 그대로 “꽂혔다”.

내용도 그럴 듯해 보였다. 미국 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과목 교과서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해서 전달하는 내용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의도적으로 영웅화되었을 인물들에 대해 배우면서 교훈은 전달받지만, 역사를 통해 진실을 배울 기회를 영원히 박탈 당하는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국 역사 교과서의 오류를 밝히는 책이라고 해서 우리에게 시사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곡된 역사와 그로 인한 영웅 만들기의 폐해는 우리도 겪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뛰어난 주제와 목적의식, 그리고 교훈에도 불구하고, 나는 채 100여쪽도 읽지 않아 책 읽기를 포기하려 하고 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번역상의 오류와 어색한 문장들, 그리고 뜻을 알 수 없는 문구들을 접하는 것이 너무나 괴롭기 때문이다.

제1장의 첫 번째 장에는 미국의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간이 차고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외계인이 지어놓은 집이라도 발견했다는 것인가?)와 펜들턴이 제안하여 체스터 아더 대통령이 서명한 공무원법(Civil Service Act)을 ‘민병 법안’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있다. Military Service가 병역이므로, Civil Service는 민병대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한 것인 듯싶은데, 문제는 고등학교 수준의 영어만 제대로 배웠어도 그런 추측은 하지 않았을 성 싶다는 점이다. 보안법(Sedition Act)을 “폭동법”이 아니라 “폭동진압법”이라고 번역한 것은 장하다고 해 줘야 할 것 같다.

제2장의 첫 장 인용문은 책을 읽어 봤는지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일방적으로 영웅으로 그려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착취한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제2장의 첫 머리에 나오는 인용문들 중 하나는 “인도 제국에서 우리가 저질렀던 일은…”이라면서 시작한다.

58쪽에는 ‘유럽인들이 인디언 종족을 대면할 때, 스페인인들이 “자격(the Regquirement)”이라 불리워지게 된 것을 (스페인어로) 크게 읽었다.’고 나오는데, 유감스럽게도 영어에도 스페인어에도 ‘regquirement’라는 단어는 없다. 스페인어로는 ‘requerimiento’ 영어로는 ‘requirement’일 것 같은 그 단어의 뜻은 “요구사항”이다.

H. G. 웰즈가 쓴 것은 “세계전쟁”이 아니라 “우주전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으며, ‘우화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82쪽). 76쪽에 나오는 “평평한 지구 우화”도 “우주전쟁”처럼 “이솝 우화” 같은 ‘우화’와는 거리가 멀다.

“천주교 군주”(85쪽)라는 것은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기자도 처음 듣는 용어였으며, “Pedro de Cordoba”는 “페드로 드 코르더바”가 아니라 “페드로 데 코르도바”로 읽는 것이 외래어 표기법 상으로나, 실제 스페인어 발음에서나 더 옳다.

‘크기가 적은 대포’(83쪽)이라는 말과 ‘츨판사’(18쪽), 그리고 ‘Expionage’(37쪽) 등은 타이핑 실수라고 보는 편이 속이 편할 듯싶다.

56쪽에 나오는 ‘군사 기술학’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고, 67쪽에 나오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머리의 유기적 재료”라는 말도 해석이 안 되는 것은 읽는 사람의 탓이었을까?

또한 75쪽에는 '콜럼버스의 최근 자서전 작가인 커크패트릭 세일'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콜럼버스의 자서전을 콜럼버스 이외의 사람이 쓰는 수가 있을까? 그것도 최근에? 정말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콜럼버스의 ‘자서전’은 76쪽에도 나오는데, 이번에는 위싱턴 어빙이 1828년에 쓴 것이다. 1506년에 죽은 콜럼버스가 죽은 지 삼백여년 후에 자서전을 어떻게 쓰게 할 수 있었을까?

자주 사용되는 ‘자서전적 비네트’라는 말도, ‘비네트’가 ‘윤곽을 흐리게 한 삽화, 회화, 사진’이라고 역자가 주를 한 번 달기는 했으나, 생경하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며, 게다가 ‘자서전적’이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일례로 96쪽에 나오는 ‘콜럼버스의 자서전적인 비네트’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고,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여전히 모자란 것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자! 이제 제대로 된 영어를 하자>는 저서의 저자가 번역한 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납득이 되지 않는 각종 실수가 눈에 보일 뿐만이 아니라, 성의 없이 번역한 곳도 자주 눈에 띈다.

실제로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그 집필한 교과서가 거의 모든 학교에 의해 외면당한 경험이 있는 저자 제임스 W. 로웬이 미국 고등학교에서 주로 사용되는 역사교과서 12종을 분석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차근차근 알기 쉽게 설명한 이 책이 성의 없는 번역으로 이토록 읽기 짜증나는 책이 된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지 묻고 싶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짓말

제임스 W. 로웬 지음, 이현주 옮김, 평민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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