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때 부모님과 살던 단칸방이 가끔 꿈에 나온다. 단칸방은 사람들이 다니던 좁은 골목에 있었다. 골목을 걷다 느닷없이 나오는 작은 문을 열면, 역시 느닷없이 시멘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부엌이 나왔다. 부엌에서 반걸음을 걸어 문을 열면 우리 가족이 생활할 다섯 평짜리 방이 있었다. 거기에 네 명이 누우면 한 명은 꼭 찬바람이 들어차는 문가에서 자야 했다. 다섯 평짜리 방 뒤로는 한 평 정도 되는 작은 다락이 있었는데, 그 방은 연탄이 들어가지 않아 춥고 습했다.
작은 쥐가 나오기도 했던 좁은 부엌에서 엄마는 밥을 하고 우리들을 씻겼다. 한 번은 미닫이로 열리는 현관문을 열고 부엌 겸 욕실(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에 쪼그려 세수를 하다 고개를 돌렸는데, 지나가던 같은 반 남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다음날부터 내가 빈민가의 단칸방에 산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가끔 요즘 아이들이 어디 사는지에 따라 서로 친구가 될지 말지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난 그때가 생각난다.
다행히 우리 살림은 조금씩 펴져서 몇 년 후부터는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한 살 때부터 두 살까지는 비만 오면 물이 들어차는 월셋집에서, 여덟 살부터 아홉 살까지는 전세 단칸방에서, 아홉 살부터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으니 집으로 상징되는 계급 사다리라는 게 있다면 우리 가족은 성실히 계단을 오른 셈이다. 외갓집에 얹혀 살며 부모님은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마침내 아파트에 당첨(그때나 지금이나 아파트라는 것은 정말이지 '당첨'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되었을 때 부모님은 인생 역전이라도 이룬 기분이었으리라.
집이 계급의 상징이라면, 부모님과 같이 아파트에 살았던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던 때가 아닐까? 성골이나 진골은 못 되었더라도 육두품은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부모님집을 나와 독립을 하면서부터 내 집의 역사는 다시 내리막을 걸었기 때문이다. 내 첫 번째 집은 회사에서 얻어준 자취방이었다. 자취방의 이름이 '자취집'이 아니라 자취'방'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건 정말이지 '집'이라고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기도 외곽에 있던 자취방의 문을 열면 부모님과 함께 살던 단칸방이 떠올랐다. 문을 열자마자 느닷없이 부엌이 나오기 때문이다. 팔을 쭉 뻗으면 현관에 서서 설거지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엄청나게 좁은 부엌을 지나면 다섯 평짜리 방이 나온다. 물론 벽지와 장판이 깨끗하고, 냉장고와 에어컨이 갖춰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얻은 자취방은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근사한 편이었다.
의자를 올려야만 발을 뻗을 수 있는 고시텔에 사는 친구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끔거리는 탓에 문도 제대로 열어 놓을 수 없는 반지하에 사는 친구에 비하면 나는 출발선이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 자취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나는 나의 주거 상황이 정규곡선의 뒷부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올라가고, 결국 천천히 떨어진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시 천천히 올라가면 되니까.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성공그래프의 배신
그러나 첫 번째 자취방을 얻은 지 거의 7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거주 계급은 별반 달라진 바가 없다. 주식은 떨어지면 팔 수라도 있지. 다시 오르지 않는 주거 계급의 그래프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 황망했다. 나는 비교적 월급을 잘 챙겨주는 안정적인 회사에 오래 다녔기에 남들보다 돈을 빨리 모은 편인데도 그랬다. 처음엔 '내가 무슨 집을 벌써'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엔 '지금 정도면 집을 사도 좋겠지만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판단했고, 그 이후엔 '집값이 미쳤지만 지금이라도 사야 되는 게 아닐까'라고 불안에 떨었고, 요즘은 '빚을 얼마를 지건 그때 그 집을 샀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한다.
처음 서울의 연남동을 걸었을 때가 2015년이었다. 홍대입구역 3번 출구부터 직선으로 뻗어 내려가면 조성되어 있는 화려한 거리가 연트럴파크다. 지금이야 연트럴파크의 아파트값이 8억~9억을 넘어가지만 5년 전인 그때만해도 4억 남짓이었다. 지금 네이버부동산을 찾아봐도 연남동 코오롱하늘채아파트가 2015년에 3억 8천에서 4억 1천에 거래된 걸 볼 수 있다. 회사에서 번 돈을 영혼까지 끌어모은 후에 빚을 있는 대로 떠안으면 그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나는 그 아파트를 사는 대신 귀촌을 한답시고 외곽으로 떠났다. 외곽에서 전셋집을 계약할 때 계약서가 바람에 불어 팔랑거렸다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리라.
시골 생활을 접고 다시 서울로, 특히 연남동으로 올라왔을 때 아파트값은 이미 5억~6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대출을 끼고 살 수 있을 만한 기간은 이미 지났지만, 내가 부모님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전세 살 사람을 구해 소위 '갭투자'를 하면 승산은 있었다. 그렇지만 여러 생각이 다시 한 번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내가 부동산을 뭘 안다고, 솔직히 지금 집값도 이미 미친 것 같은데, 부모님집으로 가게 되면 서울 생활의 베이스를 잃게 될 텐데, 이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 아닌가.
이제 그 아파트값은 8억이 되었다. 그 집이 5억일 때 집값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내가 미쳤었다. 8억이면 이미 고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정말 영원히, 문자 그대로 영원히 집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노트북 앞에 앉아 엑셀시트를 열었다. 내가 이제까지 모은 돈을 모두 적고,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알아보았다. 은행도 다녀봤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이 돈으로 8억짜리 집을 사는 건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대출 기준인 4인 가구도 아닌 1인 가구, 게다가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이 없는 비혼여성, 결혼은커녕 아이도 없는 내게 돌아오는 혜택은 없었다. 그때 정부의 22번째 부동산정책이 발표되었다. 부동산 도사인 누군가는 6.17 부동산정책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막 부동산을 알아가는 나 같은 청년들에게 그건 그냥 집을 사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서울 내 아파트가 보통 6억~8억인 것을 감안해봤을 때 40% 대출을 생각하면 적어도 3억은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가능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3억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으려면 일 년에 3천만 원씩을 모아야 한다. 누군가에겐 자신의 연봉 전부일 수도 있는 돈이다.
그래서 못 샀다. 안 산 게 아니라 못 샀다. 아파트 안 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싶어서 사려는 게 아니라, 노인이 되었을 때 길거리에 나앉고 싶지 않아서 내 집마련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 차근히 돈을 모아서 다시 사보라고? 4억이었던 아파트가 5년 만에 8억이 되었다. 부동산 가격은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다. 부동산 오르는 값을 따라잡으려면 일 년에 8천만 원을 모아야 한다. 버는 게 아니라 모아야 한다. 돈을 '모아서' 부동산을 사는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그럼 전세나 월세로 지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전세값과 월셋값은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면서 같이 오른다. 심지어 이때 내는 돈은 내 집 마련의 기틀이 아닌 그냥 '주거비'다. 없어지는 돈이다. 가난이 가장 비싸다는 말을 느끼고 싶다면 2020년 서울로 오라.
부동산 구매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여, 부동산을 사지 않고서도 주거를 해결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셰어하우스가 유행한다고 해서 공유주택 벤처 서울소셜스탠다드를 만나보았고, 행복주택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비혼 1인 가구는 언감생심이다) 행복주택을 알아보았다. 이럴 바에는 내가 집을 짓고 살지 싶어 '초소형 주택 짓기'를 알아보며 '세로로' 건축 사무소와 인터뷰를 했다.
이런 과정들을 꾸려 내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만드는 잡지 <딴짓>에 실었다. 딴짓매거진 13호의 주제는 '지금, 어떤 집에서 살고 있나요?'이다.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도 아직 이렇다 할 정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주거 계급 그래프의 밑단에서 지난날을 후회하며 황망히 서 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은 '건물주=노인, 세입자=청년'이라는 수식을 만들어내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기도 하고, 무주택자와 1주택자 2주택자 등을 나누며 계급을 세분화 시키고, 노동자본만이 유일한 대안인 사람들에게 무력감을 안겨준다. 이 틈을 이용해 빈곤비즈니스로 돈을 버는 자본가들은 많아지고, 빈부격차는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가파르게 벌어질 것이다.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단칸방에 대한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던 것은, 부모님이 결국 아파트라는 상징자본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집밖에 있었던 그 집, 길을 지나는 행인에게 나의 생체리듬을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그 집에 평생 살았더라면 나는 아마 영화 <기생충>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용기조차 갖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을 언젠가 '추억'으로 되새김질할 수 있을까? 웃을 수 있을까?
집값은 지금도 신이 나서 오른다. 나의 주거 그래프는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부동산 때문에 생긴 일 _ 기사 공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