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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13년. 서로의 관점에서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다.다(다르게 들리지만 다르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 이야기는 남편 지용민 시민기자가, 그 여자 이야기는 아내 박보경 시민기자가 썼습니다. - 기자 말

[그 남자 이야기] 이 시대 결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결혼은 도대체 언제 할 거야?"
"글쎄요... 지금이 좋고 편해요. 집 마련하는 것도 그렇고, 육아는 어쩌나요."

주변 후배들과의 대화는 대개 이러하다. 노총각, 노처녀란 단어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내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해당된다. 13년 전 내가 결혼할 때만 해도 남자는 서른 전후로 결혼을 했고, 여자는 그 보다는 몇 살 어렸다. 그 나이가 당시 결혼 적령기였다.

후배들과 결혼을 주제로 대화를 하면 흐른 시간만큼이나 달라진 결혼관과 조우하게 된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결혼이란 제도는 '필수 항목'에서 탈락한 느낌이다. 3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사람들에게도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의 부모님도 주변 돌잔치를 다녀올 때면 '너는 결혼 언제 하느냐'며 독촉을 하지 명절에 만나도 결혼 압박(?)은 그리 없다고 한다.

늦어지는 결혼 이유를 설문 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구협회>에서 전국 기혼 남녀 17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1차 저출산 인식 설문 조사' 결과 '결혼 만혼화 원인'을 남성 중 39.5%는 "결혼 비용 부담"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를 "취업이 늦어져서" "출산과 양육의 부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응답한 여성 중 34.2%는 "출산과 양육의 부담"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뒤를 "취업이 늦어져서" "결혼 비용의 부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결혼의 적정한 나이에 대해서도 인식이 많이 달라진 분위기다. 결혼 정보 업체에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요즘 몇 살이 지나면 결혼이 늦었다는 생각이 듭니까'는 질문에 남자는 35세, 여자는 40세를 가장 많이 들었다. 앞서 기술했던 13년 전과 비교할 때 노총각은 5세, 노처녀는 10세가량 늦어진 사회 분위기다.

그리고 13년 전 우리의 이야기

13년 전 우리의 자존심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가난했던 우리의 자존심이 도장으로 찍혀 있다(좌) 13년이 지났다. 여전히 책은 우리 부부의 자산이다(우) 이제 책에 도장을 찍지는 않는다.
13년 전 우리의 자존심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가난했던 우리의 자존심이 도장으로 찍혀 있다(좌) 13년이 지났다. 여전히 책은 우리 부부의 자산이다(우) 이제 책에 도장을 찍지는 않는다. ⓒ 박보경

아내와 내가 결혼할 때 우리는 학생이었다. 물론 사연은 있었다. 나는 대학원 1년을 마치고 취직을 했다. 그 상태로 결혼 날짜를 잡았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나는 복학을 했다. 결혼을 늦추진 않았다. 결혼할 당시 아내는 대학 4학년, 나는 대학원 3학기 재학생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 생활은 시작됐다.

본가, 처가의 부모님들은 힘드셨을 것이다. 말이 좋아 '학생 부부'지 얼마나 이것저것 신경 쓰이셨을까. 주변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재도 됐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는 아직 어렸던 나는, 불과 1년 남짓 한 직장 생활 경험을 믿고 '우리 생활비는 우리가 벌어서 살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그렇게 했다. 현실은 냉정했다. 결혼하고 2년을 옥탑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행복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살림을 합치고 보니 우리가 가진 것은 책뿐이었다. 책이 많기는 했지만, 정말 책밖에 없었다. 생필품인 TV, 세탁기 등을 제외하고 우리가 보유한 재산은 책이었다. 결혼 초, 아내와 마주 앉았다. 가진 것은 없지만 '우리만의 무언가'를 하자고 제안했고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다음날 우리는 신촌의 어느 도장집을 찾았다. 그리고 우리의 전 재산인 책에 찍을 도장을 팠다.

인생을 살면서 별것 아닌데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도장을 가지고 온 날, 나와 아내는 밤 늦게까지 한 권, 한 권 책에다 도장을 찍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 지용민 박보경". 이 문구를 정하는데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 후로 책을 사면 우리는 꼭 책에 도장을 찍었다.

얼마 전, 아내가 '이것 좀 보라'며 과거의 자료를 가지고 왔다. 결혼 직전 혜화동 성당에서 혼인 교리를 들을 때 작성했던 문서였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지금껏 나는 아내가 나를 더 사랑해서 결혼한 줄로 알고 살았다.

13년 전 아내는 나의 이상형 얼마 전 아내가 찾아낸 결혼 전 서로에 대한 기록들. 나는 아내를 '이상형'이라고 기록했었다. 놀라운 기록이긴 하지만 살아보니 정말 그러했다.
13년 전 아내는 나의 이상형얼마 전 아내가 찾아낸 결혼 전 서로에 대한 기록들. 나는 아내를 '이상형'이라고 기록했었다. 놀라운 기록이긴 하지만 살아보니 정말 그러했다. ⓒ 박보경

혼인 교리 질문> 그녀가 지금까지 당신이 꿈꾸어 온 배우자와 얼마나 일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답변> 가끔 깜짝 놀라곤 한다. 너무나 나의 이상형 그녀의 모습을 글라라(아내)에게서 보기 때문이다.

혼인 교리를 들은 후 1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때의 그녀가 지금은 아내라는 이름으로 내 옆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13년 동안 몰래 보관한 문서를 갑자기 내놓는다는 식으로) 아내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는 대목이다.

[그 여자 이야기] 나의 결혼 이야기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연구원에 새로 온 조교였다. 학부 알바생이었던 나는 새 조교 오빠를 남몰래 좋아했다. 오빠가 감기에 걸려 연구원에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책상 위에 짧은 메모와 함께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 놓았다. 그 때 조교 오빠는 내 마음을 알았을까?

그 이후 오빠는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추석 명절 다음 날 우리는 놀이공원으로 첫 번째 데이트를 갔다. 이후 신촌과 종로를 무대 삼아 데이트를 하며 우리는 행복했다. 어린 마음에 이 사람과 결혼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진 것 없는 30살 먹은 남자와 아무 것도 모르던 25살의 여자는 무턱대고 결혼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때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와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그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신혼 초, 남들은 깨가 쏟아진다던 그 때 우리는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그동안 연애를 하며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징그럽게 많이 싸웠다. 싸움의 주 원인은 우리 둘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다투다니.

싸움이 심각해지는 것은 '너희 집, 우리 집'이 나오는 그 순간부터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넘어 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지만, '너희 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서로 맹수처럼 달려들어 물어 뜯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웃어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때는 왜 그리 심각했던지.

결혼 후 맛본 세상, 새벽 2시 신촌은 알록달록했다

그러나 결혼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기도 하였다. 엄한 부모님 밑에서 금지된 일이 많았던 내게 결혼은 자유를 얻은 경험이었다. 나는 25살까지 신촌의 밤 거리가 그렇게 늦게까지 화려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남편과 손잡고 걷는 새벽 2시는 낮보다 알록달록했다.

결혼 1주년. 남편은 아직 취업 전이었고, 나는 대학원생이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큰 맘 먹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맛있게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밖은 여전히 너무나 밝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념일을 즐길 만한 돈이 우리 수중에 없었다.

우리가 주로 걸었던 방향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이어졌다. 신촌 기찻길을 따라 이대 앞으로 걸었고 이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그 길을 따라 가면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가는 길에 남편은 작은 액세서리 가게에서 큐빅이 많이 박힌 나비핀을 선물로 사주었다. 만 사천 원짜리 나비핀이 나의 결혼 1주년 선물이었다.

결혼을 하고 5년 후에 첫 아이를 낳았다. 결혼한 25살부터 아이를 낳기 전까지인 30살까지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그리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를 낳는 순간 '자유'는 물 건너 가버렸다는 뜻이다.

아이를 낳고 나는 남편에게 "나를 '누구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누구 엄마 이전에 나는 인간 박보경이고, 지용민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의 관계에서 확장된 아이들이 남편과 내 사이를 가로지르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이 결혼 어떤가 봐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남녀의 출신학교, 각 부모님의 재산 보유 정도, 형제 자매의 취업 상태 등을 설명하고 이 결혼을 과연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테니 조건을 고민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인터넷 댓글로 결정한다는 것이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위에서 말하는 조건에 우리 부부를 갖다 붙이면 결혼한다고 명함을 꺼냈다간 창피 당하기 딱 좋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정답도 아니고 또 정답이라고 해도 모두가 다 정답대로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원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그 길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결혼#부부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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