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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류미비자 그러나 두렵지 않아요."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나는 서류미비자 그러나 두렵지 않아요." 크리스티안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 Cristian Perez-Le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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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비친 물은 너무나 깨끗했다. 우리는 갈증난 목을 축이기 위해 서둘러 그 물을 마셨다. 새로 생명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울면서 하나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렸다. 갖고 있던 빈 물병에도 그 물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병 속에 든 물을 본 순간 그만 역겨워졌다. 우리가 마셨던 물은 곰팡이가 피고 벌레가 들어 있는 녹색 물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다. 적어도 마실 물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오직 그 녹색물만 열심히 마셨다."

동굴 속에서 썩은 해골물을 마셨던 신라시대 원효대사를 생각나게 하는 이 에피소드 주인공은 크리스티안 뻬레즈 레무스(Cristian R Perez-Lemus). 그는 한창 피어나는 20살 청년으로 과테말라에서 온 꿈 많은 대학생이다. 크리스티안은 4년 과정 고등학교를 3년만에 마쳤다. 고교 재학 중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 정부가 전액 보조하는 우등생 프로그램인 '거버너스 스쿨(Governor's School) 외국어 아카데미'에서 아랍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에 있는 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EMU)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있다. 또한 복수 부전공으로 스페인어와 평화학(Peace-building)을 공부하고 있다. 크리스티안은 원래 명문 주립대인 버지니아 대학(UVA)에 진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 때문에 그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제공한 사립대 EMU로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받은 6개의 장학금도 모두 학비를 보태는 데 썼다.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어머니와 할머니가 계시는 캘리포니아에 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 간호사로 일할 계획인 크리스티안은 히스패닉과 중국인이 많은 캘리포니아에서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 중국어를 구사하면 취업에 유리할 것 같아 UCLA에서 중국어 수업도 들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크리스티안은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모범적인 이민자 가정의 자녀처럼 보인다. 그러나 페이스북에 올린 "나는 서류미비자(불법체류자), 그러나 두렵지 않아요"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사진을 보면 밝은 표정의 그에게 뭔가 아픈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기사는 엄마 손에 이끌려 어린 나이(당시 13살)에 조국 과테말라를 떠난 한 소년의 밀입국 경험담이다. 중남미에서 오는 많은 불법 이민자들이 그렇듯 크리스티안도 멕시코 국경을 몰래 넘어 미국으로 들어왔다.

미국으로 불법 입국 결심하다

14살 생일을 네 달 앞둔 2006년 3월 8일, 나는 엄마와 함께 미국 버지니아 땅을 밟았다. 아버지와 형은 우리보다 9개월 앞서 미국에 도착했다. 우리가 조국 과테말라를 떠나게 된 것은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다. 믿기 어렵겠지만 과테말라에는 범죄가 많았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 살면서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당했다.

중산층으로 목공 공장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돈을 노리는 범인들로부터 종종 가족 유괴, 살해 위협을 당했다. 형과 내가 그들의 주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이에 두려움을 느껴 적잖은 돈을 그들에게 갖다 바쳤다. 그 덕분에 우리는 살해되지 않았고 유괴되어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거버너스 스쿨(Governor's School) 외국어 아카데미에서 아랍어를 공부한 크리스티안.
 거버너스 스쿨(Governor's School) 외국어 아카데미에서 아랍어를 공부한 크리스티안.
ⓒ Cristian Perez-Le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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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신고하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겠지만 과테말라 경찰은 이미 부패하여 그들과 한통속이었다. 아버지는 협박을 당하면서도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렇게 협박을 받고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현실에 혐오감을 느껴 미국행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먼저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난민 신청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몸에 어떤 고문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팔이나 손가락 하나라도 잃는 게 나을 뻔 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가족의 안전을 위해 불법 입국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아버지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살아서 만날 수 있을까

아버지와 형이 먼저 선발대로 미국으로 떠났다. 죽어라 고생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9개월 뒤, 이번에는 엄마와 내가 과테말라를 떠나게 되었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나는 13살 8개월의 미성년자인 소년이었다.

우리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과테말라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서 가족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울고 불고 서로를 얼싸안고 포옹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드림랜드' 미국으로 떠나는 여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 이상으로 몸서리쳐지는 여행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어떻게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꿈만 같다. 기적처럼 느껴질 뿐이다. 정말이지 다시는 그런 끔찍한 여행을 하고 싶지 않다.

우리 일행은 모두 16명이었다. 그 중 12명이 온두라스에서 왔다. 일행 중 내가 가장 어렸고 여자도 네 명이나 있었다. 우리는 일심동체가 되어 함께 움직였다. 큰 방에 이틀간 같이 머문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선량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코요테(불법 이민 브로커)를 만났다. 그와 함께 과테말라시티를 출발하여 북부 도시인 페텐까지 18시간 동안 버스를 탔다. 다음 경유지는 벨리즈였다. 벨리즈는 북쪽으로 멕시코, 서쪽으로 과테말라와 붙어 있는 카리브해 연안 독립국이다. 페텐에서 벨리즈로 갈 때 6시간 동안 걸으며 정글을 지났다. 뱀과 원숭이, 야생동물을 많이 보았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벨리즈에서 이틀을 머문 뒤 다시 멕시코로 갔다. 멕시코 국경을 통과할 때 관광객으로 가장했다. 최고급 리무진 버스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불법체류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드디어 마타모로스! 마타모로스는 멕시코 동북부에 있는 타마울리파스 주의 한 도시로 리오그란데 강의 남쪽 강둑에 있다. 리오그란데 강은 콜로라도에서 발원하여 뉴멕시코, 텍사스를 가로질러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따라 멕시코 만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마타모로스는 텍사스주의 브라운스빌과 국경이 맞닿아 있다. 우리가 과테말라시티에서 미국의 접경 도시인 멕시코 마타모로스까지 가는 데 무려 두 달이 걸렸다.

'드림액트'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크리스티안. 버지니아 주 상원의원인 마크 워너 사무실을 방문했다.
 '드림액트'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크리스티안. 버지니아 주 상원의원인 마크 워너 사무실을 방문했다.
ⓒ Cristian Perez-Le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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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밤중인 새벽 3시에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던 날 풍경이. 그 강을 건너다 실종되거나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수없이 들었다. 그랬던 터라 잔뜩 겁이 났다. 사실 나는 수영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였는지 그날은 강물이 얕아서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물 밑으로는 세찬 물살이 흘렀다.

그렇게 강을 건넌 뒤 다시 5시간 가량을 더 걸었다. 밴이 우리를 태우러 온다고 해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늘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밴이 왔을 때 우리 일행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일행이 모두 차에 오르는데 겨우 6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상상이 되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눈깜짝할 새 모두 탈 수 있었다는 게.

우리를 태운 밴은 다시 4시간을 더 달렸다. 그런 다음 다른 코요테에게 인계되었다. 그 코요테는 우리에게 차에서 내려 사막으로 뛰라고 했다. 우리는 4일 동안 먹을 물 한 병과 음식이 담긴 봉투 하나만 들고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 다시 사막을 달렸다.

갖고 있던 물은 하루 만에 다 떨어졌다. 음식은 이틀 만에 바닥이 났고. 우리는 밤에만 걸었다. 하지만 물이 다 떨어져 두 번째 날 밤에는 오직 물을 찾기 위해 5시간 넘게 걷기도 했다. 물을 찾아 떠나던 날 밤 마침내 물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물은 보기에도 너무나 더러웠다. 소똥이 둥둥 떠 있어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다시 두 시간을 더 걸었다. 야생동물들이 물을 마시고 있는 저수지를 발견했다. 달빛에 비친 물은 정말 깨끗해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물을 마셨다. 죽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나는 엉엉 울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갖고 있던 빈 물병에도 물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다음 날 병 속에 든 물을 본 순간 그만 토할 것 같았다. 전날 우리가 마셨던 물은 녹색 빛깔에 곰팡이도 피고 벌레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행복했다. 그런 물이라도 마실 물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오직 그 녹색물만 열심히 마셨다.

그렇게 사막을 가로 질러 마침내 마지막 날 밤을 맞게 되었다. 내 발은 그동안 너무 많이 걸어 피가 났다. 발톱이 빠지기도 했다. 사막을 걸으면서 선인장 가시에 찔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때 신었던 신발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신발 속에는 선인장 가시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신발과 선인장 가시!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함께 사막을 걸었던 일행 가운데 발목이 부러진 여자도 있고 사막에서 길을 잃어 실종된 여자도 있다.

마침내 재회, 그러나 다시 닥친 불행

그렇게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 마침내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이제 더 이상 밤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다시 텍사스를 떠나 워싱턴으로 갔다. 미리 와 있던 아버지와 그곳에서 눈물의 상봉을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미국 시민이 된 고모와 할머니도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목숨 걸고 찾아온 미국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가 더 이상 이산 가족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또한 미국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것도 큰 특권이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나는 과테말라에서 중학교를 마쳤지만 영어를 거의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새롭게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또한 방과 후 날마다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형과 나는 부모님이 일하는 식당에서 같이 일했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파트타임 일을 했다. 보통 1주일에 21시간- 26시간 일했고 부모님은 40~50시간 일을 했다.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나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길만이 고달픈 이국 생활을 하는 부모님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부모님도 날마다 고된 일을 했고 학생인 나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 가족 누구도 과테말라에서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불행이 우리를 찾아왔다.

크리스티안 부모님과 할머니. 아버지는 불법체류자로 1년 옥살이를 하고 과테말라로 추방되었다.
 크리스티안 부모님과 할머니. 아버지는 불법체류자로 1년 옥살이를 하고 과테말라로 추방되었다.
ⓒ Cristian Perez-Le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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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경찰에 구속된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12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대학 진학 대신 직업교육을 원했던 형을 태우고 메사누튼 테크니컬 센터(MTC)에 가던 중 경찰에 걸렸다. 불법체류자였던 아버지는 면허증이 없었다. 해리슨버그는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계약을 맺어 관할 경찰이 이민 단속 업무도 할 수 있는 287(g)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곳이다.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가게 되었고 그래서 내 졸업식에도 못 오셨다. 그렇게 1년간 감옥살이를 한 아버지는 출옥한 뒤 자진추방(self-deportation)에 서명을 하고 미국을 떠나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심장병을 앓아 일자리를 잃었다. 엄마가 버지니아를 떠나 지금 할머니가 계시는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이유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아버지 국외 추방, 어머니 건강 악화∙실직. 모든 게 다 암울한 소식이다. 나 또한 여름방학이 끝난 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이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그동안 일을 하면서 나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왔다. 하지만 납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전혀 받지 못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버지니아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은 내가 서류미비자,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의 빛은 늘 우리를 비추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내가 열심히 살아갈 충분한 이유다. 최근 발표된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정책도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 같다. 엄마도 무척 기뻐하신다. 비록 엄마는 그 수혜자가 될 수 없지만 말이다(기자 주 -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새로운 이민정책과 관련해 '16세가 되기 전에 불법 입국해 최소 5년 이상 미국에 거주하면서 학교에 다니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30세 이하의 외국인은 추방시키지 않고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과테말라에 계신 아버지와 매일 세 차례씩 화상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다. 인터넷 스카이프가 효자다. 아버지는 시민권자인 할머니 초청으로 현재 이민국에 서류를 제출해 놓은 상태다. 적어도 10년이 지나야 아버지가 다시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잘 계셨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빠진 크리스티안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엄마와 형이 함께 했다.
 아버지가 빠진 크리스티안의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엄마와 형이 함께 했다.
ⓒ Cristian Perez-Le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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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희망의 조짐이 곳곳에서 보이는 만큼 나도 좌절하지 않으려 한다. 내 목표는 우선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다. 영어 외에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구사하는 간호사가 되어 환자들을 돕고 싶다.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고, 내 조국 과테말라에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도 하고 싶다. 과테말라 정글이나 산악지역의 사람들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부모 손에 이끌려 그만 불체 신분이 되어버린 크리스티안. 당시 13세 소년은 어느 새 훌쩍 자라 20세 청년이 되었다. 최근에 발표된 오바마 대통령의 새로운 이민정책이 없었더라면 그는 여전히 서류미비자, 불법체류자의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갈 뻔 했다. 어린 크리스티안이 겪었던 밀입국 경험담이 너무나 끔찍해서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는데 혹시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어요?"

기다렸다는 듯 그는 흔쾌히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 일이에요. 원망 따윈 없어요." 

덧붙이는 글 | 인터뷰에 응해준 크리스티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크리스티안을 알게 된 것은 지난 번 미국 대선 기사 '백인국가 미국, 히스패닉이 지배할 것인가'를 쓰면서였다. 그 때 딸아이가 학교 동창인 크리스티안의 '서류미비자' 사진을 보여주면서 엄마가 흥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그랬다.

미국은 현재 불체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2010년 기준: 1120만). 특히 히스패닉 불체자 수는 미국 전체 불체자의 81%(910만)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불체자들이 왜, 어떤 경로로 미국으로 밀입국하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딸을 통해 크리스티안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했다. 딸은 페이스북 채팅을 통해 크리스티안에게 물었고 즉석에서 OK 사인을 받았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나는 크리스티안에게 궁금한 내용을 질문했고 그는 즉시 답변을 보내왔다. 이렇게 20여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인터뷰가 이루어졌고 이 기사는 그의 답변을 토대로 '13살 소년의 미국 밀입국기'로 각색되었다.



태그:#미국, #불법체류자, #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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