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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마지막, 이번엔 서울·경기·인천입니다. [편집자말]
망우리 공동묘지로 들어서자 빼곡한 나무 사이 곳곳에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올록볼록 솟아 있다.
▲ 망우리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로 들어서자 빼곡한 나무 사이 곳곳에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올록볼록 솟아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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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싯다르타는 연기론에서 모든 것은 "인연따라 생겨난다"고 했다. 이 말은 곧 모든 것은 '인연따라 생겨나며 인연따라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나그네는 싯다르타가 내세운 연기론을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다"라고 쉽게 풀이하고 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다. 삶이 있어 죽음이 있으며, 죽음이 있어 삶이 있지 않겠는가. 한 시대 역사도 그러할 것이다. 압제가 있어 저항이 있으며, 저항이 있어 압제가 있지 않겠는가. 한 시대 문화는 그러한 압제와 저항이 어우러진 역사를 거울로 삼아 꽃을 피우고 알찬 열매를 맺어 또 한 생명을 위해, 또 새로운 역사를 위해 제 몸을 기꺼이 바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공동묘지라 하면 '무섭다'라는 생각부터 먼저 하게 된다. 이는 곧 죽은 사람들 영혼들이 마치 원귀처럼 떠도는 공간이 공동묘지라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망우리공동묘지'라 부르는 망우리공원도 그렇게 여기기 십상이겠지만 이 공원은 많이 다르다. 주말마다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이 엄청 많은데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잘 알 수 있는 뛰어난 인물들이 수없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얼룩진 역사를 살다간 사람들의 흘러간 삶이 새록새록 숨 쉬고 있다. 이 공원은 어렵고 힘겨웠던 한 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독립지사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를 이끈 선구자들의 무덤과 비석이 볼록 솟아,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말 그대로 역사문화공원이다.

채동선, 차중락, 박승빈, 아사카와 다쿠미...

나그네가 이 공원을 망우리공원이 아니라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라 하는 까닭은 따로 있다. 김영식(48·수필가·번역가)이 지난 2009년 4월에 펴낸 '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읽어보면 한 시대 굵직굵직한 획을 그은 뛰어난 분들이 수없이 망우리공원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김영식은 이 책을 쓰기 위해 3년에 걸친 현장답사와 자료조사를 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망우리공원에 묻힌 탁월한 분으로는 시인 박인환,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화가 이인성과 이중섭, 문인 최학송과 김말봉, 김상용, 김이석, 계용묵,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한용운과 박희도, 의학자 지석영과 오긍선, 서화가 오세창,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조봉암 등 40여 명이 훌쩍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망우리공원에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연극 '동승'을 쓴 함세덕과 작곡가 채동선, 27세 새파란 나이에 낙엽이 되어 떨어진 가수 차중락,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맞춤법에 맞섰던 변호사 박승빈, 해방 정국 좌우익 갈등으로 희생된 삼학병(三學兵), 한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처음 심은 사이토 오토사쿠 등도 이곳에 묻혀 있다.

1933년부터 ‘망우리 공동묘지’라 불리던 이곳은 1998년 유명한 사람들 연보비를 세우고, 산책로를 만들면서 ‘망우리공원’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 망우리공원 안내지도 1933년부터 ‘망우리 공동묘지’라 불리던 이곳은 1998년 유명한 사람들 연보비를 세우고, 산책로를 만들면서 ‘망우리공원’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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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산 사람들 것,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모든 삶은 누군가에게 기억된다 / 죽어 말 없는 이와 우리 사이, / 어제와 오늘 사이, / 그와 나 사이의 능선을 걷다. / 서울시 중랑구 망우1동 산 57번지. 우리가 흔히 '망우리묘지'라고 부르는 시립묘지 망우리공원이 그곳에 있다. 대학시절, 그곳에 가까운 동네에 살 때 공원까지 산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본 묘지의 풍경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 '서문' 몇 토막

망우리공원 그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다
▲ 김영식 <그와 나 사이를 걷다> 망우리공원 그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다
ⓒ 골든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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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그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다. 김영식은 이 책 '서문'에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도 너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 어느 비석에는 일찍 죽은 아들을 기리는 글이, 그 옆에는 비석조차 세울 형편이 못 됐는지 검은 페인트로 '아버님 잠드신 곳'이라고 쓴 비목이 세월의 풍상을 견디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고개 저 너머 어느 무덤 앞, 소주병을 옆에 두고 고개를 숙인 청년에게는 또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라며 "산 밑을 내려다보니 이곳 묘지는 이리 조용한데, 저 멀리 차 소리가 도시의 심장 소리처럼 시끄러웠다. 세상은 역시 산 사람들의 것, 죽은 이들은 말이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망우리공원이라는 작은 공간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다 간 인물들을 비명을 통해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작지만 크고, 유일한 공간"이라며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그 어느 때보다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가 그곳 비석에서 숨을 쉰다. 당시를 살다간 고인의 비문에서, 또는 비문이 준 단서에서 그 시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 각 분야의 개척자와 선구자들이 그곳에 따로, 또 같이 누워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고 되짚었다.

망우리 공동묘지를 샅샅이 훑은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 '그 잎새에 사랑의 꿈'에 무덤처럼 볼록 솟아 있는 8꼭지, 2부 '이 땅의 흙이 되어'에 쓰러진 비석처럼 드러누워 있는 6꼭지, 3부 '한 조각 붉은 마음은'에 봉분이 사라진 자리에 뿌리박고 자라난 나무처럼 서 있는 7꼭지가 그것. 여기에 고인과 관계가 있거나 고인을 추모하려는 이들을 위해 찾아가는 길과 기일까지 꼼꼼하게 적어놓고 있다.

김영식은 누구?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쓴 김영식은 부산에서 태어나 4살 때 서울로 올라와 망우리공원이 가까운 중랑구 중화동과 상봉동에서 대학 때까지 살았다. 그는 한국미쓰비시상사에서 10년 동안 일한 뒤 지금은 일본 무역과 번역을 하는 지원상사 대표로 있다. 문예진흥원 우수문학사이트로 뽑힌(2003년) '일본문학취미' 블로그를 통해 일본 문학과 문화를 소개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수필)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옮긴 책으로 <기러기> <라쇼몽>이 있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전 문화재 청장)는 "이제는 더없이 중요한 역사 공간이 된 망우리공원을 우리는 하나의 문화재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라며 "청순한 산벗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망우리공원을 거닐다 보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아들임을 떠올리며 멀리 한강을 처연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썼다.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망우리라는 땅의 성격은 대체로 연로하신 어머님의 '내 방'같은 느낌이다. 어머님에게 '내 방'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천하의 명당"이라며 "'내 방'은 나만의 '둥지'이다. 둥지는 안온함과 안전을 보장하는 곳으로 믿는다. 망우리에서 어머님의 '내 방' 맛을 보라. 죽음도 생각해보라. 이 책은 망우리 사색객(思索客)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용마산 곳곳에도 망우리공원 못지않게 많은 무덤들이...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1보루에서 망우산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 망우리공원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1보루에서 망우산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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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을 거쳐 망우리공원에 묻힌 뛰어난 애국지사들과 탁월한 시를 남긴 시인들 무덤을 찾아가는 길. 이날따라 날씨가 우중충하다. 는개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망우리공원에 올록볼록 무덤으로 남은 애국지사들과 시인들 넋이 저만치 늦가을바람으로 다가와 '왜 이제야 찾아오느냐, 어디 혼 좀 나봐라'고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그네는 토요일마다 남으로는 아차산(285m), 북으로는 망우산(291m)으로 이어지는 용마산(348m)을 산책 삼아 오른다. 용마산 곳곳에는 서거정 시비를 비롯한 김소월, 백석, 한용운 등 시비가 참 많이 서 있다. 이는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한 서거정(1420년 세종2∼1488년 성종19) 선생이 아차산 벌판에 잠시 살았던 탓이리라. 지하철 7호선 '사가정'이란 역 이름도 서거정 선생 호에 다름 아니다.

나그네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있는 용마산은 높이가 낮아 토요일 점심을 먹은 뒤 산책 삼아 오르기에 딱이다. 지난달 26일(토) 낮 2시. 용마산을 오르는 등산로에는 젊은이들은 간혹 눈에 띄고, 등산객 대부분이 60대 남짓한 중늙은이들이다. 몇 주 앞까지만 하더라도 산골짝 곳곳을 단풍불로 수놓았던 나무들은 모두 갈빛 낙엽만 투둑투둑 떨구고 있다.

용마산 산등성이 곳곳에도 망우리공원 못지않게 많은 무덤들이 올록볼록 솟아 있다. 어떤 무덤은 아예 풀숲에 포옥 잠겨 쑥대머리처럼 길게 자란 마른 풀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또 어떤 무덤들은 아예 폭삭 내려 앉아 상석만이 흙더미에 반쯤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곳이 그 어떤 이 무덤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듯.      

용마산 너머는 구리시다. 저만치 구리시를 가로 지르고 있는 한강변 한 귀퉁이, <엄마의 말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 탁월한 작품을 수없이 남긴 작가 박완서(1931년 10월 20일~2011년 1월 22일) 선생이 살았던 곳이다. 평소 같으면 망우산 1보루를 거쳤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오지만 오늘은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저만치 길목 한 귀퉁이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설산 장덕수(1895~1947. 12. 2) 선생 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 장덕수 선생 비 저만치 길목 한 귀퉁이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설산 장덕수(1895~1947. 12. 2) 선생 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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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사람 이름 잊었지만 그 눈동자 내 가슴에 있네"

지난해 이맘 때였던가. <동아일보> 김화성 기자가 "용마산에 오르거든 꼭 망우산 공동묘지를 들러보라"고 한 때가 있었다. "그곳에 가면 우리 역사와 그 역사를 이끈 뛰어난 인물들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지난 삶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특히 한용운, 박인환을 비롯한 뛰어난 시인들이 망우리 공동묘지에 많이 누워 있다. 한 시대 시인이 그 시인들에게 절 한번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용마산을 거쳐 망우산 1보루에서 망우산 공동묘지로 가는 길로 들어선다. 1933년부터 '망우리 공동묘지'라 불리던 이곳은 1998년 유명한 사람들 연보비를 세우고, 산책로를 만들면서 '망우리공원'으로 그 이름을 바꿨다. 근데, 누가 그런 무식한 이름을 제안했을까. 이름을 바꿀 그때 차라리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라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망우리 공동묘지로 들어서자 빼곡한 나무 사이 곳곳에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올록볼록 솟아 있다. 말 그대로 무덤밭이다. 공동묘지 사이로 난 비좁은 길목 한 귀퉁이엔 흙더미에 반쯤 묻힌 상석이 하나 보인다. 그래. 어쩌면 나그네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도 그 누군가 무덤이 있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공동묘지로 난 비좁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분명 이쯤에 조봉암 선생과 한용운, 방정환, 지석영, 박인환 선생 무덤이 있다고 했는데... 저만치 제법 큰 무덤이 혹 나그네가 찾는 그 무덤인가 싶어 다가서면 그 무덤이 아니다.

가도 가도 무덤숲...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나그네가 찾는 무덤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그렇게 망우리 묘역을 마구 헤매다보니 마치 무덤숲을 떠도는 혼백들에게 홀린 듯하다. 이 무덤인가 하고 다가가면 다른 이 무덤이요, 저 무덤인가 다가가면 또 다른 이 무덤이다.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포옥 내쉬고 있는데, 저만치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그네를 바라본다. 마치 귀신 씌운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아뿔싸! 김영식이 지은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들고 올 걸. 날씨도 우중충하고 행여 땀에라도 젖을까 그 책을 그냥 집에 두고 온 것이 큰 실수다. 이 수많은 무덤들 사이에서 머리에 넣어둔 애국지사와 시인들 묘소 자리를 기억에서 끄집어내 눈대중으로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참으로 헛된 짓거리임에 틀림없다.

결국, 장덕수 선생 비 하나만 찾고 돌아섰다

그렇게 망우리 공동묘역을 두 시간쯤 헤매었을 때였을까. 저만치 길목 한 귀퉁이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설산 장덕수(1895~1947. 12. 2) 선생 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비문에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 자임하노라. /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글이 까맣게 박혀 있다. 하지만 무덤은 어디 있는지 찾을 길이 없다.       

설산 장덕수 선생은 1895년(고종 32)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8년 여운형,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했다. 선생은 이듬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잠입하다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감금을 당했으나 여운형 선생이 일본 초청으로 동경으로 갈 때 통역관이 되면서 풀려났다.

1920년에는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 되었고, 193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위원을 맡았다. 그 뒤 보성전문 교수를 거쳐, 1936년 동아일보사 부사장이 되었다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는 사건으로 사임했다. 1939년에는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분회 제4분회장, 1945년 7월에는 국민의용대 경성부 연합 간부 등으로 활동하면서 친일활동을 하기도 했다. 선생은 1947년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과 배희범에게 암살당했다.

나그네가 처음 찾은 망우리 공동묘지. 그 공동묘지는 그렇게 설산 장덕수 선생 비 하나만 맛보기로 보여주곤 '백 번쯤은 와야지'라는 투로 나그네를 망우리 산자락 아래로 등을 들이밀었다. 그래. '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 <그와 나 사이를 걷다>를 쓴 김영식도 3년을 헤맨 끝에 수많은 애국지사와 시인들 무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도 나그네는 그나마 김영식이 쓴 책이 있어, 그 책을 들고 다시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는다면 백 번은 아니더라도 서너 번에 몇몇 애국지사들과 몇몇 시인들 무덤은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낙엽이 수북이 쌓인 망우리 산길을 맥없이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저만치 시인 박인환 혼백이 나그네를 자꾸 부르는 것만 같다. 오늘따라 시인 박인환이 쓴 '세월이 가면'이 자꾸 읊조려지는 것도 이 때문일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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