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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 정문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주명건 세종대 이사장의 사촌형 주명수 씨(사진 앞)와 김동우 교수(사진 뒤쪽 파란색 피켓을 목에 걸고 있는 이)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4월 18일 오전 10시 15분 세종대 정문.

마치 덕수궁의 대한문처럼 생긴 세종대 정문을 사이에 두고 그 안과 밖에선 두 명의 중년신사가 동시에, 그러나 별도로 1인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인시위를 '저지'하려는 세종대 직원들과 '지지'하는 총학생회 간부들이 뒤엉킨 가운데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두 주인공은 세종대 회화과 김동우 교수(52)와 주명건 세종대 이사장의 사촌형인 주명수 씨(62).

그렇다면 그들은 왜 같은 장소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먼저 정문 안쪽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동우 교수의 사연부터 알아보자.

김 교수의 목에 걸린 피켓에 적힌 "세종대 교수는 이사장의 머슴인가. 재임용제도는 노예제도"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부당해직 철회와 원상복직 촉구'를 위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김동우 교수의 사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첫 번째 기사 '세종대 이사장의 8등신 예술론' 참조)

관련기사
세종대 이사장의 '8등신 예술론' / 정지환 기자

김 교수가 1인시위를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21일.

그로부터 지금까지 한 달여 동안 세종대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그 동안 주명건 이사장으로 대표되는 족벌체제에 침묵하던 세종대가 김 교수의 1인시위를 계기로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김 교수의 '외로운 투쟁'을 지원하는 우군(友軍)이 속속 생겨나며 족벌재단과의 대립전선이 빠른 속도로 형성되고 있다.

실제로 세종대 총학생회 간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교수와 주 이사장 사이에 있었던 '골 때리는 사연'을 소개한 대자보(大字報) 앞에는 오랜만에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뜨거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198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대자보 앞에 학생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든 것은 최근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대사건'이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다.

현재 김 교수를 지지하는 우군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세종대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는 '김동우 교수 부당 재임용 탈락 철회와 민주대학 건설을 위한 학생대책위원회'(위원장: 정진호 세종대 총학생회장)와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등 7개 단체가 참여한 '김동우 교수 부당해직 철회 및 원상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표: 황상익 서울대 교수)가 바로 그것이다.

▲ 16일 느티나무 카페에서 열린 '김동우 교수 부당해직 철회 및 원상복직 촉구 기자회견'. ⓒ 오마이뉴스 권우성

두 공동대책위는 지난 4월 16일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김동우 교수에 대한 부당한 재임용 탈락의 철회, 사학재단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사립학교법 개정, 족벌사학 세종대의 민주대학으로의 재편 등을 주장했다. 결국 재임용 탈락에 맞선 한 교수의 '항의'가 대학개혁과 사회개혁을 향한 '투쟁'의 불씨가 된 셈이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 뒤 김동우 교수와 그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세종대에서 자신들이 직접 목격했던, 다시 말해 한국 족벌대학의 일그러진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몇 개의 '골 때리는 사연'을 공개했다.

골 때리는 사연 하나: 일명 '싱크대 사건'

세종대는 1998년부터 매년 10월경에 세종미술대전을 주최했는데, 일명 '싱크대 사건'은 그 첫 해에 발생했다.

미술대전의 시상 부문은 서양화·동양화·조각 등 총 3개 분야였고, 각 부문별로 최우수상(1)·우수상(2)·특선(5)을 뽑는 방식으로 심사가 진행되었다. 상의 공정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심사위원에는 서울시립대·이화여대 교수 등 외부인사가 위촉되었고, 최우수상 수상자에겐 500만원의 부상이 책정돼 있었다고 한다.

심사결과가 발표되던 날, 세종대 정문 앞에는 작품을 출품한 젊은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 중의 한 명인 표○○ 씨(45. 울산대 강사, 현재 부산에서 활동중)도 그날 거기에 있었다.

다음에 소개하는 사연은 현재 '세종대 족벌재단의 골 때리는 이야기'를 기록영화로 만들고 있는 황철민 감독(전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 그가 학교를 떠난 사연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이 표 씨로부터 직접 취재한 내용이다.

교문 앞에서 심사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표 씨는 심사를 마치고 나가는 교수들에게 "자네 작품이 조각 부문 최우수상에 선정됐네"라는 통보를 직접 받았다.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해 선정했다"라는 칭찬도 들었다.

한편 심사장 현장에서 전 과정을 지켜봤던 조교도 교문 앞까지 나와서 그에게 같은 내용의 '기쁜 소식'을 알려줬다. 표 씨는 "상금 받으면 한턱 내라"는 주위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귀가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세종대 안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끝내고 막 돌아간 직후, 주명건 세종대 이사장이 수상작품을 둘러보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침 심사위원들이 조각 부문 최우수상으로 뽑은 표 씨 작품의 재질은 알루미늄 계통의 스테인레스였다.

당시 세종대 회화과 학과장이었던 허○ 교수(최근 학생들의 교수평가 점수를 조작하다 '무능교수'로 몰려 학교를 떠남)가 그 작품을 가리키며 조각 부문 최우수상이라고 보고하자 주 이사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웬 싱크대가 1등이야?"

물론 그것은 '싱크대'가 아닌 '예술작품'이었지만, 이사장의 그 말 한마디로 표 씨의 최우수상 수상과 500만원 상금은 '한여름 밤의 꿈'이 되고 말았다. 주 이사장의 불편한 심기를 간파했는지 허 교수가 재빨리 "최우수상이 선정된 것은 아직 아닙니다"라고 말을 바꾸고 만 것이다. 결국 최우수상·우수상 선정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수상작을 모두 특선으로 처리하는 선에서 해프닝은 끝났다고 한다.

이와 관련, 당시 현장에서 전 과정을 지켜봤던 김동우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심사위원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심사해도 이사장 맘에 안 들면 탈락된다는 소문이 예술계에 퍼지면서 세종미술대전의 공신력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해인 1999년에는 조각 부문에 단 한 점만이 출품되는 볼썽사나운 사태가 발생했다. 그 해프닝을 두고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선 '싱크대 사건'이라는 우스개 말이 생겨났다."

골 때리는 사연 둘: 일명 '이사장 딸 특선 사건'

일명 '이사장 딸 특선 사건'은 2001년 세종미술대전 당시에 발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 설명을 들어야 한다. 우선 세종대 당국은 이 사건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심사방식을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종미술대전이 시작된 1998년에는 외부인사가 심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이듬해인 1999년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그런데 갑자기 2000년부터 내부인사, 즉 세종대 회화과 교수가 심사를 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게 심사방식을 바꾼 지 1년이 지난 2001년. 세종미술대전에 주명건 이사장의 딸인 주○○ 씨(현재 이화여대 대학원 재학중, 서양화 전공)가 작품을 출품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김동우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교수들 사이에선 이사장 딸이 출품했으니 웬만큼 수준이 되면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을 주자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그러나 심사를 끝낸 결과 도저히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을 줄 만한 수준은 안 되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그래서 주 씨의 작품은 5개의 특선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나마 이사장의 딸이 아니면 그마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증언이다.

여기까지는 그리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심사결과가 발표되자마자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학교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우선 평소처럼 심사결과를 세종대 회화과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으나, 당장 내리라는 학교 당국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시회 장소인 백상기념관에 전시된 수상작에 붙였던 최우수상·우수상·특선 등의 딱지를 떼라고 했으며, 전시회 카탈로그 인쇄도 중지하라고 했다고 한다. "심사를 누가 했냐?"는 소리까지 공공연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김동우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와 관련 김동우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당시 그 난리를 겪으며 세종대 이사장 가족들과 학교 당국 간부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에서 주최한 미술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딸은 무엇이며, 이사장 딸에게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을 안 줬다고 생난리를 치며 '알아서 충성하는' 보직 교수와 간부들은 또 무엇인가. 정말이지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이런 '블랙 코미디'가 일어나도 괜찮은 것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골 때리는 사연 셋: 일명 '세종관 난방기 사건'

이 사건은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한 세종대 총학생회 간부가 기자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총학생회실이 있는 건물인 세종관은 난방시설이 열악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난방이 들어왔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사장 딸의 작업실이 3층에 잠시 들어선 것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갑자기 난방이 끊겼다. 이번에는 이사장 딸이 이화여대에 합격하면서 작업실이 폐쇄됐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이사장 딸은 이화여대와 세종대 두 곳에 응시를 하고 그곳에서 실기 작업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사장 딸이 이화여대에서 떨어져 세종대에 왔으면 난방시설이 계속 가동돼서 우리도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쉽다'는 우스개 소리가 돌기도 했다."

▲ 주명수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번에는 4월 17일부터 세종대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주명수 씨의 사연을 들어보자.

주 씨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숙부모님(주영하·최옥자), 이제는 진실을 밝히시지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진실'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세종대의 설립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주명건의 부모인 주영하·최옥자가 아니라 주영하의 친형이자 나의 아버지인 주윤하이다. 나의 아버지는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설립했고, 동생 주영하를 연희전문까지 보내서 공부시키고 동생 부부를 학교 이사(理事)까지 시켜줬다.

그런데 주영하·최옥자는 배은망덕하게도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학교와 재산을 강탈했다. 동생 부부에게 배신당해 피땀이 서린 학교를 뺏긴 아버지는 억장이 무너지는 한을 풀지도 못한 채 1980년대 중반에 화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주명수 씨의 폭로는 세종대 족벌재단으로서도 매우 아팠던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하루 전인 4월 17일 주명수 씨가 1인시위를 벌이자 세종대는 폭력적인 진압을 시도했다. 총무처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주 씨의 피켓을 강제로 빼앗아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개 사립대학 직원들이 국정원과 국세청과 삼성그룹도 어쩌지 못하는 '합법적인' 1인시위를 진압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세종대는 지금까지 '족벌사학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부정적인 모든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족벌사학의 전형으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1980년(당시 교수 75명 중 50명이 대학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1987∼89년(이른바 '100일 투쟁'과 '43일 투쟁'이 전개되어 한때 족벌재단이 추방됐지만 교육부의 개입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1990∼91년(한국 대학사상 처음으로 전원유급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등 수 차례에 걸쳐 세종대에서 이른바 '학원사태'가 발생했다.

▲ 1990년 당시 동아일보 보도기사.
물론 그 학원사태의 근본 원인이 '족벌재단의 전횡과 횡포'에 있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를 보도한 대다수 언론이 지적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총장(학장), 어머니는 이사장, 아들은 대학원장(기획실장), 딸은 교수…."

1980년대 대학가에서 학원사태로 뜨거웠던 세종대를 풍자했던 유명한 유행어이다. 그런 전통(?)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거니와, 현재도 세종대 학생들은 "두 아들은 세종대 이사장과 세종호텔 대표이사, 두 딸은 세종대 교수와 세종초등학교 교장"이라는 신종 유행어로 족벌재단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왜 세종대 문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던 것일까. 주명수 씨는 세종대 족벌재단이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권력자들에게 온갖 충성과 아부를 통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세종대 학생들이 "족벌퇴진"을 외치며 벌였던 학원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선포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최옥자 씨가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에게 보낸 편지는 군사독재와 족벌사학이 어떻게 공생할 수 있었던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7년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 때 발견된 이 충성의 편지에는 "존경하옵는 전두환 위원장님" "전 위원장님의 놀라우신 집념과 능력으로 만세 반석 위에 복구" "민족의 자랑으로 믿으며 인류역사에 새로운 장을 장식"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두환 위원장님의 애국애족의 놀라운 슬기와 용기와 영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충성하기를 소원" 등의 낯부끄러운 대목이 등장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최옥자 씨는 이 편지에서 "학생을 악의 길로 선동한 주동 교수의 숙정" "불의의 교육장으로 더럽혀진 한(恨)" "김대중 일당의 선동에 의해 불행히도 족벌이라는 흠 없어야 할 낱말이 오명으로 인식을 바뀐 것" "정부를 비방하고 사학을 모욕하던 수많은 교수" 등을 언급한 뒤 "전 위원장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립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

세종대 족벌재단이 위기의 고비 때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가 '세종대 족벌재단의 골 때리는 이야기'를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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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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