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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 안병기
내게 서울이란 항상 낯선 이름이다. 적응되지 않는, 적응할 수 없는, 적응하고 싶지도 않은 낯선 관념이다.

열여섯살 사춘기라는 아주 낯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서울이라는 이 낯선 땅을 처음 밟았다. 스무살 즈음엔 거기 한 마리 바퀴벌레처럼 붙어산 적도 있었지만 서울은 끝내 정들지 못하는, 정마른 곳으로 남았다.

아마도 정들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존재들은 존재의 확신보다 존재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는 편이 훨씬 쉬울런지 모른다.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낯선 도시

수요일(5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전을 보려고 서울에 올라갔다. 피카소나 서울이나 낯선 관념이긴 마찬가지였다. 난 서울은 의식의 한쪽에 밀쳐 놓은 채 피카소라는 관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피카소는 이미 고유명사가 아니라 20세기 미술을 뜻하는 보통명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피카소라는 보통명사를 이해하므로써 내가 호흡해온 지난 세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 전시장 내부. 하루 4차례 있는 설명을 들으면서 감상하면 더 쉽게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 안병기
전시회는 <청색시대에서 마리 테레즈까지> <도라 마르> <프랑스와즈 질로> <1960년대> <자클린느 로크> <화가와 모델> <마지막 시기> <무쟁의 156 판화집> 등 8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부터 각 시기를 대표하는 대형 유화 작품 60여점, 과슈와 파스텔 및 데생으로 된 종이 작품 30여 점, 판화 50여점 등 총 14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 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12살 때는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려 했지만 나중에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을 다 바쳐야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피카소의 그림 가운데는 어린애처럼 그린 것이 많다.

이번 전시회의 테마는 '피카소의 사람들(People of Picasso)'이다. 피카소는 살아 있는 동안 숱한 여인들을 사랑했다. 올가 코클로바, 도라 마알, 마리 테레즈, 프랑스와즈 질로, 쟈클린 등이 피카소와 결혼을 하거나 동거 생활을 했던 여인들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피카소가 되어갔다. 1973년 남프랑스 무장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92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다간 피카소. 양식적·표현적 특징은 각 시기마다 다를지라도 그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피카소가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 여행에 다름 없다.

무젱의 <156> 판화집 전시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노년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몰두하는 피카소를 보면서 시인 보들레르는 말한다. "삶을 잡아먹고 있는 시간의 다급함"이 시킨 거라고. 아마도 시간의 다급함이 그의 열정에 더욱 세찬 불을 지폈을 것이다.

3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림에서 풍겨오는 예술적 향기가 섞여 있어서일까. 미술관에서 마시는 커피는 다른 곳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향기롭게 느껴진다. 크게 돈들이지 않고 이만한 사치를 누린다는 게 쉬운 일인가.

예술의 향기가 나는 커피 마시고 정동길 걸으며

▲ 정동 제일교회 100주년 기념탑
ⓒ 안병기
▲ 정동 제일교회
ⓒ 안병기
시립미술관을 나와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정면으로 고딕 양식을 한 붉은 벽돌로 된 예배당이 나온다. 붉은 벽돌과 아치형 하얀 창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이 건축이 바로 정동 제일교회다. 정동교회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다.

189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처음 교회를 세운 이래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몸으로 증거해왔다. 3·1운동의 발원지이며 개화의 진원지가 됐다. 서재필, 이승만 등도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정동 제일교회는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신앙 공동체 이전에 민족 자주독립의 믿음을 전하던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지금의 정동 제일교회는 마치 시간이 남긴 오브제 같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재미는 이런 오브제들과 쉴 새 없이 마주치고 말을 건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길에 서면 주한 미대사의 관저로 들어가는 길목에 버티고 선 전경들마저 하나의 오브제로 기능한다. 비록 언젠가는 치워지고 말아야 할 슬픈 오브제이긴 하지만.

▲ 정동극장 정면의 타일 벽화 (전수천 작)
ⓒ 안병기
정동 제일교회를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왼쪽에 정동극장이 얼굴을 내민다.

정동극장은 1995년에 개관한 문화관광부 산하의 복합 공연장이다.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문을 열었던 국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을 이념으로 내걸고 국립극장의 분관으로 설립되었다.

극장 정면을 바라보면 커다란 타일 벽화가 눈에 들어온다. 전수천의 <혹성들의 신화, 놀이, 비젼>이다.

왼쪽의 서성이는 듯한 다리만 있는 군상들은 오늘날 끝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들의 걸음 속에는 뭔가 새로움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그렸다. 그 아래에 있는 삼각 기둥은 비전있는 미래를 상징한다. 가운데에선 살색으로 휘감은 여인은 마치 비천상처럼 날아가고 있다. 과거의 전통을 연상케 하는 한국의 여인상을 상징화하므로써 전통적 의미를 덧붙인 것이다.

오른쪽 아래 그림자로 된 군상들은 극장이라는 장소를 의식한 형태다. 극장을 통해 문화의 질을 향상시키는 가족들을 상징화한 군상 뒤로 소용돌이처럼 구부러진 파이프는 뭘 뜻할까? 전수천이 이 타일 벽화에서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이 파이프다. 정동극장이 문화적 회오리를 일으키는 진원지가 되기를 기원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명창, 아직도 그 자리 서 있다

▲ 판소리 명창 이동백 동상
ⓒ 안병기
정동극장 마당 한 켠에는 조선 말기 판소리 5명창 중의 한 사람인 이동백의 동상이 서있다.

이동백은 1866년 2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도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세종에게서 짜임새있는 판소리를 배웠다.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당대의 명창으로 이름이 온누리에 뚜렷했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벼슬까지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새타령>을 잘 불렀다고 한다.

이동백이 불렀다는 중고제는 김성옥으로부터 시작되어 김창룡 등이 계승한 것으로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지역에 전승된 소리인데, 그 개념이 모호하여 "동편제도 서편제도 아니다(비동비서:非東非西)"라고 말하기도 한다. 창법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절충으로 보이는데 소리의 특징으로 보면 동편제에 더 가깝다.

그의 소리를 담은 SP음반이 수십 종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적벽가> 중 〈새타령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새타령>은 억울하게 죽은 병사들이 원조(怨鳥)가 되어서 슬프게 울음을 우는 것이다. 여러 새들의 소리와 꼭 같게 내는 성대 묘사가 가장 돋보이는 특징이다.

김시천의 <명창>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명창 박동진 선생은 죽기로 각오하고 똥물을 두 바가지나 먹었다. 단내나는 소리를 얻기 위함이다. 그런 것이다, 세상은.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평생을 꼿꼿하고 옹골찬 소리로 적벽강을 호령하던 그가 마지막 세상을 하직하는 오늘 그는 죽어서도 솔 향기만 폴폴 날리는구나. 장엄한 진양이다. 그가 하직하며 버리고 간 세상. 아, 살아 단 것만 빨아먹은 나는 구린내만 진동하고. - 김시천 시 '명창 박동진' 전문

덕수궁 돌담길, 연인들의 길

▲ 덕수궁 돌담 길 바닥에 깔린 타일.
ⓒ 안병기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길로 일컬어지는 길이다. 만추가 되어 노란 은행잎이 흩날릴 때 이 길을 걸어가면 사뭇 운치가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덕수궁 담장을 따라서 정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1㎞ 남짓한 길이다.

차도를 줄여 인도로 만든 길은 다급한 직선의 길이 아니라 모퉁이가 있는 돌아가는 곡선의 길이다. 차량이 보도로 진입하는 것을 방지해주는 딱정벌레 같은 볼라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나무의자는 마치 외로움과 한가함의 경계를 보여주는 듯 하다.

길바닥 군데군데에는 덕수궁 주변의 역사와 자연의 단편들을 새긴 타일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타일들은 지난 시간과 현재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 이런 작은 배려가 걷는 맛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해준다.

▲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
ⓒ 안병기
가던 길을 돌아나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나간다. 수문장 교대 의식과 마주친다. 수문장을 중심으로 좌우 양편에 칼을 든 수문군, 기수단, 나발.징.북 등을 연주하는 취라척(군악대) 등이 차례로 대한문을 빠져나오더니 돌담길을 따라서 사라진다.

이 교대의식은 공연기획사에 소속된 단역배우와 공익근무요원이 합동으로 만들어내는 이벤트라고 한다. 수문장 교대식은 하루 세 번(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과 3시) 열린다.

보들레르가 말한 "삶을 잡아먹고 있는 시간의 다급함"을 생각한다. 예술가가 아닌 난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의 유용함"에 생각을 집중하기로 한다.

Tom Waits의 노래 <타임(Time)>이 생각나는 오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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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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