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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거미에게서 떠올리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이미지

거미는 얼핏 보면 곤충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절지동물이다. 절지동물문의 거미강에 속한다. 그들은 자신의 몸 속에서 길고 투명한 줄을 뽑아내 허공에다 얼기설기 그물을 치고 거기에서 포획되는 곤충들을 잡아 먹고 산다.

거미들 가운데는 생김새도 괴상할 뿐 아니라 치명적인 독을 가진 것들도 있다. 낙타의 배에 달라붙어서 낙타의 살을 뜯어 먹으면서 살아간다는 낙타거미, 물리면 통증과 함께 붓고 심장이 울렁거리는데 심하면 정신착란 상태에 빠지고 토하다가 마침내 우울증을 앓듯이 되어 죽는다고 하는 타란툴라같은 거미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무섭고 소름이 끼치는지 모른다. 그러나 독거미는 전 세계 3만 종의 거미 가운데 30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인간에 버금가는, 아니 어설픈 인간을 뺨치는 미덕을 갖춘 거미들도 없지 않다. 자신이 친 거미줄을 다시 걷어먹는 검소와 절제의 미덕을 갖춘 새똥거미가 그렇고, 번식기가 되면 자신이 낳을 새끼들을 위험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뭇잎을 말아 작은 주머니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알을 낳지만 먹을 것이 없어 새끼들에게 제 몸을 공양하는 눈물겨운 모성을 가진 염낭거미가 그렇다.

그러나 거미나라의 모성애에 관한 특허권을 염낭거미가 거머쥘 것이라고 속단하시지 마시기 바란다. 염낭거미가 막 특허권을 획득하려는 순간 "잠깐!(just moment)"을 외치는 소리가 들릴 터이니 그게 바로 비탈거미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비탈거미는 한 여름에 알을 낳아 새끼들을 부화시킨다고 한다. 어미는 겨울이 오기까지 크고 작은 곤충들을 포식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워 나간다. 이윽고 월백설백천지백(月白雪白 天地白)하여 모두가 백발의 벗이 되는 겨울이 닥쳐오고 먹이가 될 곤충들마저 죄다 자취를 감춰버리면 어미 거미는 새끼들에게 비장한 유언을 남기는 거다.

"얘들아, 이 에미는 이제 세상을 살만큼 산 것 같구나. 너희들만은 이 에미의 몸을 뜯어먹고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거미나라 중흥의 꿈을 이루어다오."

▲ 거미. 거미의 종류가 하도 많으니 무슨 거미인지조차 짐작하지 못하겠다.
ⓒ 안병기
비탈거미 어미는
제 새끼들에게 몸을 내어준다.
그것이 제 어미인 줄도 모르는
새끼들은
어미 몸에 올라탄 채 그 살이 맛있다고
뜯어 먹는다. 제 어미를 먹는다. 그렇게
어미를 죽인다.

죽어가는 살신의 모정은 제 죽음 하나로
자자손손 번창해나갈 것을 믿으며
오로지 그것이 기뻐, 제 몸을 내어준다.
팔 다리도 몸통도 머리도 모두 내어준다.
그리하여 그 몸은 완전분해되어 사라진다.
어미는 없다.

저녁 무렵엔
하루 종일 해를 뜯어먹는 사람들이
어둠의 바다를 헤치며 집으로 돌아온다.
해를 뜯어먹는 기운으로 밤에는 새끼를 가지리라.

- 이수익 詩 '비탈거미' 전문


이수익의 시 '비탈거미'는 이러한 비탈거미의 생태에서 착안한 시다. 난 이 자기희생적인 비탈거미의 이미지에서 옛 시절 우리 나라 어머니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에겐 자식을 위해 자신을 몽땅 희생할 뿐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거룩한 모성애의 기억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

시인은 비탈거미의 생태를 차례로 나열한 다음 "저녁 무렵엔/ 하루 종일 해를 뜯어먹는 사람들이/ 어둠의 바다를 헤치며 집으로 돌아온다./ 해를 뜯어먹는 기운으로 밤에는 새끼를 가지리라"라고 술회한다. 그러나 새끼들의 포식에 바쳐진 어미 비탈거미의 부재는 과연 아름다운가. 밤이면 "해를 뜯어먹는 기운으로" 새끼를 갖는 인간의 행위는 과연 바람직한 덕목인가.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 복효근 詩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전문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누우(gnu)는 소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그들은 풀을 찾아 이 초원에서 저 초원으로 이동한다. 머나 먼 거리를 이동하다보면 강이 가로막게 되고 건너야 되는 그 강물엔 악어떼가 우글거린다. 과연 누우는 무슨 수를 써서 강을 건너갈 것인가? 복효근의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방법을 소재로 해서 쓴 시다.

이수익의 시 '비탈거미'가 개인의 희생을 주제로 삼고 있다면, 복효근의 시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은 집단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주제로 삼고 있다.

시인에 따르면 아마도 누우 떼들은 몇 마리의 누우를 악어들에게로 보내고 악어들이 그 누우들을 포식하는 동안 유유히 강을 건너는 모양이다. 시인은 희생물이 된 누우 떼들에 대하여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라고 찬탄해 마지 않는다.

나는 아름다운 독배를 거부한다

희생은 남루한 삶의 외피에다 거룩함이란 수식어를 달아준다. 그러나 희생물들은 홀로 치명적인 독을 감당해야만 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개인의 희생과 집단의 희생이 혼재된 결과물이다. 누군가가 대신 독배를 마셔준 덕택에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미의 살을 뜯어 먹거나 소수의 희생을 바탕삼아 여태까지 살아온 셈이다. 그러니 이 나라 누구라도 혼자 여기까지 온 줄로 우쭐대거나 착각하지 말라. "모든 곳에 있을 수 없는 신이 대신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찬탄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토록 시끄러운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희생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극우들마저도 그토록 악다구니를 써대는 것은, 자신들이 6·25때 국가를 지키느라 희생된 누우 떼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 이 나라에 단 한 번이라도 '개인'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집단주의에 매몰되어버린 개인의 비명에 단 한 번이라도 귀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우린 너무 오래 집단을 위한 소수의 희생을 방관하거나 찬양고무해 왔다.

그러므로 시인이여, 이젠 이런 류의 찬탄은 멈추시라. 인간이란 독립된 개체이지 결코 집단의 일부가 아니다. 나는 이제 이 나라에도 '개인'이 존재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독배를 거부하는 대신 개인이 가진 생의 잔을 자유롭게, 맘껏 마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 여전히 아스라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내가 꿈꾸는 진보의 지평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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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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