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28 17:06최종 업데이트 23.08.28 17:06
  • 본문듣기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선엽의 모습. ⓒ 연합뉴스


독립운동가 흉상을 치우고 그 자리에 백선엽 흉상을 갖다 두겠다는 육군사관학교의 발상은, 육군이 백선엽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의 동상을 세우고 국립묘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구를 삭제하는 것 이상의 의미다. 이번에 추진하는 조치는 그가 독립운동가들보다 낫다고 명확히 인증해 주는 일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백선엽에 자리 뺏길 위기... 홍범도 장군께 술 한잔 올리러 갑시다 https://omn.kr/25d7y)

백선엽이 그런 추앙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의 회고록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2012년 회고록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서 박정희와의 "기묘한 인연"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 자격 여부가 노출됐다.


박정희 소령은 여순사건(여순항쟁) 진압 직후인 1948년 11월 11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군사 책임자라는 사실이 들통나 수갑을 차게 됐다. 어떻게든 살아나기 위해 남로당 내부 정보를 넘긴 그는 숙군 책임자이자 육군 정보국장인 백선엽에게 "한번 살려주십시오"라며 눈물을 흘렸다. 만주국군 선배인 백선엽은 "그럽시다. 한번 그렇게 해봅시다"라며 안심시켰다. 백선엽은 회고록 앞부분에서 이 일화를 언급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기묘한 인연"을 거론했다.

"박 대통령과 나는 매우 기묘한 인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그는 1917년생으로 나이에 있어서는 나보다 3년 연상이었다. 그러나 군대 경력으로 보면 내가 훨씬 앞서는 편이었다.

나는 1946년 사실상 창군 멤버를 길러냈던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해 대한민국 군대에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은 반면에,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으로 뒤늦게 군에 입문했다. 나는 정보국장과 5사단장을 거쳐 6·25전쟁을 맞아 일선 전투를 하면서 줄곧 승진해 육군참모총장과 대한민국 군대의 최초 4성 장군을 단 반면, 그는 일정 기간 좌익 남로당에 몸담은 혐의로 인해 진급이 매우 늦었다."


군대 경력 축소한 백선엽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3월에 2년제 만주 육사인 중앙육군훈련처에 입학해 1942년 12월에 졸업하고 견습군관 생활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가 됐다. 박정희는 23세 때인 1940년 4월에 4년제 만주 육사인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했다가 1942년 10월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한 뒤 1944년 4월에 졸업하고 견습사관 생활을 거쳐 7월 1일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처럼 백선엽은 만주국군 시절부터 박정희의 선임자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육군 임관 시점을 근거로 선후배를 나누었다. 자신의 입대 시점뿐 아니라 박정희의 입대 시점도 해방 이후로 늦춰 잡았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에 "뒤늦게 군에 입문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늦게 입대한 데다가 남로당 경력까지 밝혀지는 바람에 3년 어린 백선엽 자신보다 승진이 늦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신의 군대 경력이나 활약상을 부풀리는 남성들이 꽤 많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백선엽은 군대 경력을 축소했다. 그의 친일 콤플렉스를 반영하는 일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은 들춰내면서 자신의 간도특설대 경력은 감췄다. 항일투사 토벌 특공대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경력을 언급하기를 회피하는 이 같은 의식은 그의 회고록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다.

간도특설대 경력을 무조건 숨긴 것은 물론 아니다.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야 할 대목에서는 그 경력을 언급했다. 일본에서 1993년에 펴낸 <대게릴라전, 아메리카는 왜 졌는가>에서는 자기 부대가 한국인 게릴라들을 상대로 전과를 거둔 사실을 언급한 뒤, 곧바로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라고 기술했다. 자신의 실력은 드러내고, 책임은 일본에 돌린 것이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자신의 만주군 경력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자서전에서 나타난다.

대한민국 육사와 육군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군인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 당당해야 한다. 1940년부터 5개월도 아니고 5년간이나 되는 경력을 가급적 숨기고 싶어 하는 백선엽의 흉상이 육사 경내에 들어선다면, 이는 생도들에게 그런 인생을 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승만 독재에 연루... 선거 부정에서도 자유롭지 않아

그런데 백선엽에게 그런 콤플렉스만 있었던 게 아니다. 친일 경력 탓에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콤플렉스가 있다.

자유당의 선거부정이 1960년 3·15 대선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1950년대의 대선과 총선 때도 비일비재했다. 장기 독재, 민간인 학살, 친일청산 훼방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최대 부조리인 바로 이 선거부정과 관련해서도 백선엽은 자유롭지 않았다.

1958년 5월 2일 제4대 총선에서 집권 자유당은 전체 233석 중에서 과반수인 126석을 획득했다. 이는 공정한 결과가 아니었다. 후보자 등록 방해, 억압적 분위기, 투개표 부정, 공무원 개입 등으로 얻어낸 결과였다. 34세의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했지만, 이 같은 부정선거로 인해 입후보 등록이 무효가 됐다.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은 이 선거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서울시청 앞의 반도호텔에서 열린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석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을 정도다. 이것이 국회 회의 때도 거론됐다. 그해 5월 22일 의원 31명이 부정선거를 이유로 내무·법무·국방장관 출석 동의안을 제출했을 때 조영규 민주당 의원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사실이 23일 자 <동아일보> 톱기사로 보도됐다.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선거 기간 중 반도호텔에서 개최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석하였다는 신문 보도에는 아연 실색치 않을 수 없으며 기(其) 목적과 진의가 나변(那邊)에 있었던가."  

육군참모총장이 자유당 선대위에 참석했을 때에 그 목적과 진의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지적은 백선엽에게도 당연히 부담이 됐다. 이는 그가 '별 뜻 없었음'을 입증하고자 그해 11월 22일에 몸소 시연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이어졌다.
 

1958년 11월 23일 <경향신문> 1면 좌단에 실린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김용우 전 국방부장관이 커피 마시는 사진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1월 23일 발행된 <경향신문> 1면 좌단에, 길거리에서 만난 두 남자가 반도호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진이 실렸다. 두 사람의 옆얼굴이 잘 구분되지 않지만, 왼쪽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고 오른쪽은 김용우 전 국방부장관이다.

백선엽이 이 사진을 언론에 흘린 것은 5월 총선 전에 반도호텔을 찾은 것도 이렇게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경향신문> 기사는 "백 대장이 타의(他意) 없음을 증명하곺아 했다"며 그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했다.

"요먼저 5·2 선거 때엔 우연히 여기에 들렀더니 마침 웃층에서 자유당 당무회의가 열려 있었는데, 거기 결부시켜 내가 '당무회에 참석했다'고 신문에 났더군."

이 말을 전하면서 신문 기사는 "타의 없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했다. 별 뜻 없이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반도호텔 커피숍에 들어간 11월 22일처럼 5월 총선 때도 우연히 반도호텔에 들렀을 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렇게 구차한 연출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1945년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 경력 역시 그에게는 심란한 것이었다. 이런 사람의 흉상을 육사 경내에 설치하는 것은, 생도들에게 '심란한 인생'을 살아도 된다고 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육사 내 백선엽 흉상 설치... 대한민국 핵심 가치 짓밟는 것
 

2018년 6월 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에 신흥무관학교 107주년을 맞아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육사는 이를 철거하고 백선엽 흉상 설치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희훈


백선엽은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주한 직후에 군복을 벗었다. 하와이 망명 이틀 뒤인 1960년 5월 31일 연합참모본부 총장을 그만뒀다. 그런 뒤인 7월 15일, 이승만 라인인 허정 과도정부 수반에 의해 주중국대사(대만 주재)에 임명됐다. 그렇게 해서 한국을 떠날 수 있게 됐다.
  
백선엽의 예편은 영관급 장교들이 군 장성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신속히 사퇴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40세 나이로 군복을 벗었던 것이다.

4·19혁명이라 하지만, 동학혁명 식의 무장 혁명이 아니라 평화적인 시민혁명이었다. 시민들이 현역 최고위 장군을 끌어내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행히도' 자발적 퇴진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부역자를 처벌할 목적으로 1960년 12월 31일 제정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 제5조 제18호는 "3군 참모총장"의 반민주행위를 조사할 것을 규정했다. 연합참모본부 총장이나 각군 참모총장이나 부정선거에 연루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백선엽이 신속히 사퇴하지 않았으면 제18호에 '연합참모본부 총장'도 추가됐을지 알 수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몇 차례 언급된 것이 있다. 연합참모본부 총장은 실권 없는 한직이라는 언급이다. "지금은 합참의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당시의 그 자리는 군복을 벗고 예편할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는 식의 서술이 책 여기저기에 있다.

연합참모본부 총장이 부정선거와 무관했다면, 영관급 장교들이 반성을 촉구하는 상황에서 그가 군복을 벗은 이유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자서전 여기저기에 저런 표현이 있다는 것은 친일 경력만큼이나 이승만 정권에서의 경력도 그를 심란하게 했음을 의미한다.

백선엽은 친일행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이승만 폭정에도 연루됐다. 이는 그가 헌법 전문 첫 문장을 볼 때 두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선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임시정부의 반대편에서 항일세력을 토벌하고 해방 후에는 '불의'의 한 부분을 형성한 백선엽이다. 이런 백선엽의 흉상을 육사 경내에 설치하는 것은 헌법 전문을 모독하고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를 짓밟는 일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