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연구원의 <이거두리 설화>
전북연구원
그 22% 중의 '한 사람'은 만세운동뿐 아니라 각종 선행으로 자신을 희생했다. 이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신화적인 혹은 전설적인 존재로 남게 됐다. '이거두리'라는 이름으로 전북 지역에 각인된 이보한(이성한)이 그 주인공이다.
이거두리에 관한 이야기가 전북 지역에 얼마나 많이 퍼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북연구원에서 2021년에 발행한 <이거두리 설화>라는 185쪽짜리 연구 총서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하도 많이 퍼져 설화적 혹은 전설적 인물로까지 격상됐던 것이다. 권도경 나사렛대 교수가 집필한 이 책은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이거두리가 일제강점기 전북 지역에서 항일투사 겸 의인으로 얼마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 발간사에서 권혁남 전북연구원장은 "전북 완주지역의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탄생한 이거두리 설화는 지역적 정체성을 내포한 독특한 인물 설화로, 발생 당시 전라북도의 역사적 상황과 민중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이거두리의 역사적 의의를 평했다.
이거두리는 일본이 강화도에 함포 사격을 가하며 조선왕조를 자극한 운요호 사건(1875) 3년 전에 태어났다. 위 책은 "전북 익산시 목천포 당산의 부호 이경호의 장자로 출생"했다고 알려준다.
양반 출신인 800석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천대를 받으며 살았다. 서자였기 때문이다. 훗날 거지 왕초로 불리며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발단이 여기에 있었다.
그는 구한말에 기독교인이 됐다. 그 계기는 다소 특이했다. 아버지 이경호가 "아부지 안녕하십니까?"라며 전도하러 찾아온 미국인 선교사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를 폭행해 감옥에 들어갔다가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한 뒤 풀려난 일과 관련이 있다. 이때 아버지를 대신해 교회로 나가게 된 아들이 이거두리다.
이 일은 그가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이거두리 설화>는 1996년에 발행된 임병해의 <이거두리 이야기>를 근거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고 한 뒤, 작촌문학상의 주인공인 작촌 조병희의 증언을 토대로 그가 동네 학생들에게 "짓는 개는 졸고 있는 사자보다 낫다"(The barking dog is more useful than the sleeping lion)라는 말을 영어로 하고 다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절에 영어까지 배운 사람이 영어로 된 별명이 아닌 거두리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사연이 있다. 47세 때 맞이한 3·1운동이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부여했다.
기독교가 한국화되는 상징적 장면
그는 한 곳에 정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이동하는 유목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전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다가 맞닥트린 것이 3·1운동의 발생이다. 그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학생들의 만세 행렬을 목격하고 만세를 외치며 동참했다. 그러다가 시위 진압에 동원된 소방대원의 곡괭이를 맞고 쓰러진 뒤 종로경찰서에 수감됐다.
거기서 고문을 받던 그는 "주모자를 밝혀주겠다"고 순사에게 귀띔했다. 그런 뒤 융숭한 대접을 받고 서장실로 불려갔다. "그래, 주모자는 누구냐?"라는 서장의 질문에 "하나님"이라고 대답했다. 이 때문에 또다시 두들겨 맞았다.
한참을 얻어맞은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대소변을 가리지 않는 상태까지 이르게 됐다. 그는 그것을 자기 얼굴에도 바르고 취조실 벽에도 발랐다. 일본 경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방면된 그는 전주로 되돌아가는 길에도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춤까지 추면서 그렇게 했다. 이때문에 수원에서 또다시 붙들렸다. 이번에는 하나님을 대지 않고 종로경찰서장을 댔다. 잘 아는 사이라고 과시했다. 그 말을 듣고 순사들이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종로서는 그 자는 "광인"이라고 대답했다.
풀려난 그는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에서도 붙잡혔다. 여기서는 미친 사람이라는 이유로 석 달 만에 풀려났다. 천안에서는 광인 판정을 받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가 일본 헌병 앞에서 모자를 거꾸로 쓴 채 "세상이 뒤바뀌었다"며 부른 것이 있다. "거두리로도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찬송가 구절이다. 그는 방면된 뒤에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이 구절을 외치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이거두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대한독립 만세와 찬송가를 함께 부르는 그의 모습은 기독교가 한국화되는 상징적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거두리라는 찬송가 구절이 그의 별명이 된 것은 전도 활동이 아닌 만세운동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가 토착화되려면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돼야 하는지 제국주의에 맞서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역설

▲1931년 10월 3일 자 <동아일보> 기사 "가가호호에 동냥 거지들이 모여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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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일운동뿐 아니라 선행으로도 세상에 기여했다. 그 지역 거지들이 배를 곯지 않게 만들었다. <이거두리 설화>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전북 김제 금구의 부잣집 환갑 잔치에 초대됐다. 그는 혼자 가지 않고 걸인 70여 명을 데리고 그 집에 들이닥쳤다. 부자는 기가 막혔지만 어쩌지 못하고 닭고기와 국수로 불청객들을 대접했다. 걸인들이 포식하게 해준 뒤에 그는 이렇게 했다.
"전주에 돌아온 선생은 친한 신문기자를 찾아가 '금구의 부자 아무개가 전주의 거지 70인을 포식시키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기사를 내도록 하였다. 그를 적덕가(積德家)로 홍보해줌으로써 그에 대한 신세를 톡톡히 갚기 위해서였다. 그 후 전주 부호들의 잔치는 거두리의 거지 군단이 으레 초대를 받았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평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지역 거지들의 생계에까지 신경을 써준 이거두리는 정작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시름시름 앓다가 1931년에 5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 책은 "이거두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주 부중에 퍼지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이었다며 이들이 성금을 모아 비석을 세워줬다고 설명한다. 비석에는 "평생에 성품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쳐 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혀 주고 먹여 주었다"고 적혔다.
윤석열 정부가 일제 식민지배 청산과 관련해 일본을 옹호하자, 한국 기독교 목사들 상당수가 윤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에 취했다. 목사들이 제국주의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편에 가담한 것이다. 이거두리의 숭고한 삶은 그런 목사들에게 경종을 울려줄 만하다.
이거두리는 3·1운동의 배후는 하나님이라고 종로경찰서장에게 제보했다. 엉터리 같지만 알고 보면 진실인 이야기다. 하나님이 제국주의의 반대편에 있다는 확신을 갖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두리로다를 외친 그의 항일투쟁은 한국 기독교가 제국주의 전쟁범죄에 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를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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