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17 07:14최종 업데이트 24.05.1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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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유두종 바이러스(HPV) ⓒ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


앞선 글 "사람에게도 전염?... '조류독감'은 새들만의 전쟁일까"(https://omn.kr/28esn)에서 홍역과 조류독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염병을 떠올리면 극성맞게 사람들을 감염시키면서 열이 나고 끙끙 앓게 만드는 병원체가 생각나기 쉬운데, 홍역과 조류독감은 그 전형이다. 병원체는 우리를 왜 아프게 만들까? 우리가 더 아플수록 그들에게 더 좋을까?

병원체는 자손을 남길 때까지 살아남고 많은 자손을 남길수록 좋다는 점에서 우리 같은 생물 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잘되지 않는 종은 절멸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전에는 병원체와 숙주의 관계를 포식자와 먹이와 비슷한 관계로 보기도 했지만, 병원체 진화의 원리를 생각해 보면 그것이 딱히 좋은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주를 감염시켜 그 몸에서 복제(혹은 번식)하고 다른 숙주를 찾아 옮겨 가는 것이 병원체 진화의 원리인 만큼, 숙주를 마구 아프고 괴롭게 하는 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답을 말하자면, 너무 아프게 하면 병원체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 숙주가 끙끙 앓아누워 혼자 집에 있거나 혹은 죽어 버리면 병원체는 다른 숙주를 만날 길이 없다.

숙주가 아프면 전염이 용이해지는 병원체도 있긴 한데, 호흡기 감염이나 안구 감염의 경우다. 감염 때문에 숙주의 기침이나 콧물 증상이 심해지고 눈이 염증으로 부풀어 오르면, 복제된 바이러스 조각들이 여기저기 더 잘 퍼질 수 있고, 덩달아 전염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숙주를 고통받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들어와서 번식에 성공하고, 다른 숙주를 효과적으로 마구 전염시키는 병원체는 없을까? 물론, 있다. 대부분의 인유두종 바이러스(human papillomavirus, 이하 HPV)가 그 예다. 생태계에는 상상 가능하고 있을 법한 대부분의 전략이 존재하는 만큼 아주 놀랍지는 않다.

성공한 바이러스 HPV

HPV는 아주 다양한 척추동물 종을 숙주 삼아 번식해 온 파필로마 바이러스 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숙주로 복제하는 종류다. 지금까지 분류해 낸 것들만도 자그마치 200종류 이상이다. 파필로마 바이러스를 가장 성공적인 바이러스 중 하나라고 부르는 이유다. 보통 성적 접촉을 통해서 감염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는 피부에서 피부로, 또 피부 중에서도 입안이나 항문, 질 내부와 같이 점막 형태의 부위를 통해 감염된다.

전문가들은 성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HPV에 감염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감염되어도 대개 별다른 증상이 없고, 우리 면역반응에 의해 자연 치료가 되기 때문에 90%는 자각하지 못한 채 감염이 지나간다. 그럼, 다른 10%의 경우는 어떨까?

감염부위가 사마귀나 암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그 나머지 10%에 해당하는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마귀로 발전하는 HPV와 암으로 발전하는 HPV는 서로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들이다. 전자는 HPV-6, HPV-11를 비롯한 바이러스들이, 후자는 HPV-16, HPV-18 등의 바이러스가 일으킨다. 통틀어 생식기 HPV라고도 한다.

다양한 파필로마 바이러스 계열 중에서 이들 대부분이 알파-파필로마바이러스에 해당되는 걸 보면, 이들의 공통 조상 어딘가에서 숙주에게 종양을 발생시키는 돌연변이가 생겼던 걸로 보인다.

감염되는 부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구인두(연구개와 후두개 상연 사이에 위치한 후두의 부분), 항문이나 생식기 주위에 사마귀나 암이 생긴다. 2023년 <란셋>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전 세계 15세 이상 남자의 1/3 정도가 사마귀나 암을 일으키는 생식기 HPV 중 적어도 한 가지에 감염이 되어있다. 1/5은 특히 암을 일으키는 종류에 감염이 되어있다. 감염이 어느 정도로 흔한지 보여주는 통계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가장 감염률이 높은 것은 HPV-16인데 여성에게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종류다. 매년 전 세계에서는 34만 명의 여성들이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한다. 세계 여성 암 발생률 4위가 자궁경부암이고, 자궁경부암 발생 원인의 95%가 HPV로 지목되는 만큼, HPV 백신을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에게 생식기 HPV가 무해한 것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 2019년 통계를 보면 한해 여성에게서 HPV로 인한 암 발생은 62만 건에 달했고, 남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훨씬 적긴 해도 7만여 건이 발생했다.

암이 아닌 사마귀의 경우에도 항문과 생식기 주위에 생겨 커지거나 번지면서 통증을 유발하고 분비물, 출혈을 일으키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자궁경부암 백신을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권고하는 이유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백신을 맞아야 감염 고리를 효과적으로 끊을 수 있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사마귀와 암 발생률도 낮아지게 될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주기적 검진 중요
 

인유두종 바이러스(HPV) 백신 ⓒ Ted Eytan/Flickr


100의 90은 걸린 줄도 모르게 왔다 가는 파필로마 바이러스. 간혹 사마귀나 암이 생기게 하지만, 감염하자마자 공격적으로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전염병들과 다르게 장기간에 걸쳐 발전한다.

가다실이나 서바릭스와 같이 보호 효과와 안전성을 인정받는 백신이 존재하고, HPV 검사를 통해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혹시 결과가 양성이 나오더라도 즉시 암에 걸린 것은 아니다. 조직검사를 통해 암으로 발전할 이상세포가 있는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감지가 된 경우 암으로 발전하기 전에 제거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35세 이상에서 자궁경부암 발생과 사망률이 줄고 있는 추세인데 비해 35세 미만에서는 두 가지 모두 치솟고 있는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젊은 층에서 예후가 좋지 않은 선암 발생이 많은 데 비해 검진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성관계를 시작한 이후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주기적인 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대목이다.

자궁경부암은 여전히 무서운 병이지만 백신접종과 정기검진, 치료가 자리 잡은 선진국에서는 발생과 사망률이 모두 줄고 있는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15세 이하 소녀들 90%에 백신 접종, 35세 이하 여성 70% 검진, 자궁경부암 진단받은 여성 90%에 치료"와 같은 목표 아래 정책을 진행 중이다. 조만간 인류가 악성 HPV들을 무찌르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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