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7 11:10최종 업데이트 23.05.17 11:10
  • 본문듣기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시다 유코 여사가 7일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 전용기에서 내리고 있다. ⓒ 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서울 방문을 8일 앞둔 지난달 29일, 기시다의 방한 목적 중 하나가 '상황 확인'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최대 현안이었던 전 징용공(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소송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3월 발표한 해결책의 이행 상황을 확인"하는 게 방한 목적 중 하나라고 전했다.

지난 3월 6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발표한 선언에는 한국 법원의 손해배상 판결로부터 전범기업을 보호해 주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3·6선언은 "강제징용 피해자·유족 지원 및 피해구제의 일환으로 2018년 대법원의 3건의 확정판결 원고 분들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라며 이런 방침을 여타 소송에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국민 세금을 들여 피해자 구제 하겠다지만, 본질은 전범기업의 계좌 잔고 감소를 막아주는 선언이었다.


기시다 총리가 이행 상황을 확인하겠다는 것은 피해자들의 상태를 살펴보겠다는 의미가 당연히 아니다. 일본 국가의 도덕성과 위신은 물론이고 전범기업의 위신과 재무 상태가 위협받지 않도록 윤석열 정부가 잘 처리하는가를 확인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확인은 도쿄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므로, 기시다의 방한은 확인보다는 '독려'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그런 독려가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점은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외교부의 갑작스런 '애정 표시'에서도 확인된다. 15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입장문을 내고 "14일 오후 외교부 서민정 아태국장을 포함한 3인이 사전(에) 아무런 약속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광주시 서구 양동 양금덕 할머니 댁에 찾는 무례를 범했다"라고 알렸다.

입장문은 "이날 서민정 아태국장 등은 또 사전 예고도 없이 광주시 광산구 우산동 소재 이춘식 할아버지 댁에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홍삼 선물과 함께 쪽지만 남기고 돌아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고 전했다.

외교부의 방문 목적은 피해자들이 뜻을 접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다들 고령이다. 양금덕 할머니는 95세, 이춘식 할아버지는 103세다. 가족이나 대리인의 배석 여하도 확인하지 않은 채 불쑥 방문해 설득하는 것은 이들의 심리뿐 아니라 건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외교부가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의 입장을 헤아리는 마음의 100분의 1만 할애했어도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사전 연락도 없이 홀로 계시는 고령의 피해자 댁을 불쑥 방문해 문을 두드리는 이런 무례한 행위가 어디 있는가?"라고 분개했다.

한국 외교부의 서글픈 현실
 

외교부 서민정 아시아태평양국장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 집에 찾아가 남겨둔 쪽지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공개한 쪽지에는 "양금덕 할머님께. 최근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자택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조속히 쾌차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허락해주신다면 조만간 다시 찾아뵙고 직접 궁금하신 점들을 설명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 서민정 올림"이라고 적혀 있다.

윤 정부의 제3자 변제(대위변제) 방침을 거부한 피해자들은 "궁금하신 점들"이 없다. 이들은 일본의 사과나 배상을 관철시킴으로써 평생의 한을 푸는 동시에,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함으로써 국민들의 격려에 부응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궁금한 게 있는 쪽은 기시다 내각과 윤석열 정부다. 기시다 총리가 이행 상황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보도에서도 나타나듯, 궁금한 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이들은 어떤 조건을 제시해야 피해자나 유족들이 포기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만한 쪽이다. "조만간 다시 찾아뵙고 직접 궁금하신 점들을 설명 올리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쪽지는 기시다·윤석열 측의 입장을 설명하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쪽지를 남긴 서민정 국장은 지난 1월 12일 강제징용(강제동원) 공개토론회 때 일본의 역대 사과담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강조한 일이 있다. "그간 일본 내각이 여러 차례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음에도 여러 번 반복되면서 우리 국민들이 이를 신뢰하고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 못하는 점 등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우리 국민들이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가 전달하고자 한 진짜 메시지는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여러 번 반복'됐다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사과를 많이 했다는 것을 강조하면 국민들이 반발할 게 확실하므로, 그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일본의 사과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토론 시간에도 이상한 말을 했다. 강제징용 문제 해결이 오랫동안 지연된 사실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정부가 계속해서 끌 수 있습니다"라며 "이번 정부도 대충 협상한다고 하면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뒤 지금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용기 내서 지금 하고 있고"라며 현 정부를 두둔했다. 현 정부도 역대 정부들처럼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도 성의를 다하고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문제는 윤 정부는 일본 쪽에 유리하게 매듭짓고자 용기 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윤 정부를 두둔하는 서 국장의 발언은 사전에 준비된 원고를 읽는 발표 시간이 아니라 즉석 답변이 나오기 쉬운 토론 시간에 튀어나왔다. 이런 외교부 국장이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나 유족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어렵지 않게 추론된다. 일본 외무성 한국 출장소가 되다시피한 한국 외교부의 서글픈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압박
 

1992년 8월 15일 자 <한겨레> 기사 '일제 피해자 유족들의 쓸쓸한 8·15맞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지금은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소송을 무산시키기 위해 적극 행동하고 있지만, 이런 소송이 이슈가 되지 않았던 시절의 한국 정부는 무시나 무관심 혹은 냉담한 태도를 많이 보였다. 이 때문에 피해자와 유족들이 지난 80년간 겪은 고통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다.

1992년 8·15 광복절에 발행된 <한겨레>는 "원폭·징용 등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도 희생자유족단체에 가입한 사람만 1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라며 "8·15가 돌아올 때마다 이들을 쓸쓸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부가 이들 유족의 활동을 보장·지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순단체 취급을 하며 활동에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런 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88년 6월부터 무려 8차례에 걸쳐 보사부에 사단법인 설립 신청서를 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고 씁쓸한 발길을 돌려야 했다"라고 말했다.

역대 정부뿐 아니라 역대 집권당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에 있었던 일은 민심에 누구보다 민감해야 할 집권당 의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냉담했는지를 보여준다. 1991년에 기막힌 증언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보급이 끊긴 일본군이 굶주림을 해소할 목적으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잔혹한 방식으로 활용했다는 증언이었다.

그해 12월 3일 자 <한겨레> '징용 한국인 살해 식용'은 "증언의 주인공은 박종원(68·서울 종로구 숭인동) 씨"라며 "그는 1944년 2월 일본군이 건설하던 남태평양 마셜군도의 비행장 활주로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중, 미군의 공격으로 보급로가 끊기자 일본군이 한국인 징용자 2명을 살해해 식용으로 썼으며 이를 알아챈 한국인의 저항으로 일본군과 한국인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한국인은 거의 몰살당했다고 2일 주장했다"라고 보도했다.

징용 현장에서 엉덩이·무릎·허벅지가 베어져 나간 한국인 시신들을 발견한 뒤 분노한 심정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미군에 의해 구출된 박종원을 그해 가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를 무산시킨 것이 집권당인 민자당(민주자유당) 의원들이었다. 그해 9월 20일 자 <한겨레> '역사 증인 외면한 국감 현장'은 민자당 권헌성 의원이 박종원을 증인으로 세우려 했지만 동료 여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야당 의원들은 지켜보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보도했다.

정부와 집권당이 강제징용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하던 시절에도 피해자와 유족들은 위와 같이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윤 정부는 소극적 태도를 뛰어넘어 매우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있다.

윤 정부는 전범기업에 대한 법적 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밝힌 양금덕 할머니 같은 분을 예고 없이 방문해 설득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만남이 피해자의 건강에 위험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압박은 이처럼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에 한층 고강도가 되고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