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3 18:15최종 업데이트 23.05.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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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처럼 커다란 배낭을 메고 떠나는 미리암과 모하메드. ⓒ 신이현

 
그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방에서 나온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부산으로 가서 이틀을 지낸 뒤 일본으로 간다고 한다. 배낭들을 차 안에 밀어 넣고 충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그의 딸은 창에 코를 박고 밖을 내다본다. 한국 중부 지방의 나지막한 산과 그 아래에 흐르는 강물, 그리고 작은 시골집들. "이곳은 좀 평범한 곳이야. 크게 아름다운 곳도, 특별한 것도 없는 조용한 소도시. 그냥 그런 곳." 나의 말에 그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람을 만났잖아. 난 여행에서 풍경보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아."

모하메드와 미리암

모하메드와 미리암, 아버지와 딸이다. 모하메드는 10살 때 부모님을 따라 모로코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와서 모로코 여성과 결혼해서 2녀 1남을 두었고 미리암은 23살 막내딸이다. 아시아가 궁금해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일본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는데 아버지가 이런 부탁을 했다. "나 한국에 가고 싶은데, 같이 여행하면 안 될까?"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딸과 합류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 광팬이라고 한다. 한국 드라마를 볼 땐 자신이 어린 시절 누렸던 다정다감한 가족의 이미지가 그대로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특히 사극을 좋아해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이런 말들을 아주 잘 했다.

이들을 우리에게 소개한 사람은 서울의 한 지인이었다. "우리 집에 프랑스에 사는 모로코 부녀가 여행하면서 묵고 있는데, 선생님 양조장에 가서 숙식을 해도 될까요? 아, 이런 여행 법을 '카우치서핑'이라고 하는데요. 무료로 방을 주고, 서로의 문화를 주고받는 방식이랍니다." 그런 여행법이 있다니 세상은 내가 모르는 채로 신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의 남편 도미니크(왼쪽)와 포도나무 밭에 선 모하메드와 딸 미리암(가운데). ⓒ 신이현


"저희는 문화교류보다는 밭일을 해 주시면 숙식을 제공할게요." 이렇게 해서 4월 중순 그들이 왔다. 터미널에 갔더니 신발과 물잔 같은 것들을 치렁치렁 매단 산더미 같은 배낭을 맨 부녀가 나왔다. 딸은 아주 연약해 보였고 아버지는 몸집이 좋아서 안심이 되었다. 양조장에 일 하러 오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덩치부터 본다.

"우리 말 놓아도 될까?" 도착해서 저녁을 먹으며 그가 이렇게 말한다. "아, 물론이지!" 그들은 일주일 동안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자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다음날 삽목 포도나무 심는 일을 하고 점심은 간소하게 스파게티를 먹었다.

모하메드는 대형트럭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모로코에 갔을 때 따진을 정말 많이 먹었는데." 오래 전 모로코 여행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 내가 따진 해줄까?" 따진 냄비도 없고 재료도 없다고 했더니 "당근, 감자, 토마토, 양파, 그리고 아무 생선만 있으면 돼"라고 말한다. 마침 냉동실에 백조기가 있어 꺼내니, 아주 좋다고 한다.
 

요리를 하는 모하메드 ⓒ 신이현

 

백조기를 넣어 따진을 만들고 있다. ⓒ 신이현

 
"우리 부엌에서 모로코 따진을 만들다니 완전 흥미롭다." 나의 말에 그는 싱긋이 웃으며 도마에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칼질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가 그냥 요리하기를 즐기는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다. 모로코 진짜배기 요리사가 우리 부엌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질이 썸벙썸벙 자유로웠다. 털이 수북하게 난 굵직한 팔뚝은 힘이 좋은 남자의 것인데 손은 동글동글해서 여성적인 느낌이 들었다.

"있는 향신료들을 다 한번 내놔봐." 야채들을 모두 냄비에 넣은 뒤 그가 말했다. 사놓고 쓰지도 않던 냉동실 향신료들을 모두 꺼내놓으니 그는 뚜껑을 열고 하나하나 코에 대고 향을 맡는다. "큐민, 오레가노, 생강가루, 후추, 프로방스 허브, 다 좋아." 입자가 굵은 것들은 돌절구에 넣어 빻는다. 절구 방망이를 손에 잡고 톡톡톡 두드리자 각기 다른 향들이 으깨질 때마다 소리치듯 강한 냄새로 올라오더니 서로 오묘하게 뒤섞인다. 절구에 코를 대고 향을 맡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한국이란 나라의 한 가정집에 와서 어린 시절 음식을 만들고 있는 이 낯선 삶의 순간을 한껏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향신료 냄새를 맡는 모하메드 ⓒ 신이현

 

냉동실에 있는 백조기로 만든 따진. ⓒ 신이현


따진이 다 되자 냄비째 식탁으로 가져온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만 낯선 사람과 냄비를 사이에 두고 밥을 먹기는 쉽지 않은데 자연스럽다. 우리는 따진을 먹으며 쉬지 않고 먹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한다. 한국 음식, 프랑스 음식, 모로코 음식. "내일은 쿠스쿠스를 해보면 어떨까." 나의 부탁에 그는 너무 좋다며 활짝 웃는다. "내일 쿠스쿠스 재료 사러 갈 때 나도 꼭 같이 가고 싶어." 이렇게 해서 다음 날 우리는 함께 마켓에 간다. "쿠스쿠스 요리는 어렵지 않지만 야채들의 색깔을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중요해." 그는 야채들을 직접 고르고 싶어 했다. 고기와 야채들을 사고, 양고기에 쓰는 향신료들도 몇 개 더 샀다.

한국 시골에서 쿠스쿠스 만들기

그런데 큰일이 났다. 쿠스쿠스 요리에서 제일 중요한 좁쌀 면이 없다! 충주에서는 좁쌀 면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의 얼굴이 노랗게 된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 <생선 쿠스쿠스>가 생각났다.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이민 온 남자가 실직을 한 뒤 쿠스쿠스 식당을 내려고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초대해 전처와 전처의 자식들, 현재의 애인과 애인의 전 남편 딸, 과거와 현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쿠스쿠스를 만들고 그것을 내려는 순간 쿠스쿠스 면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 짓던 주인공 남자의 표정이 저랬던 것 같다. 말하자면 갈비찜에 밥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할까.

"오늘 저녁엔 스프를 해줄게." 쿠스쿠스 대신 다른 모로코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쿠스쿠스용 고기를 아주 조금만 떼어 내어 다지고 병아리 콩과 감자를 덩어리째 넣고 향신료 양념을 한 뒤 물을 한 솥 가득 붓고 끓인다. "이건 하리라라는 스프인데 라마단 금식이 끝난 저녁에 주로 먹어. 야자대추랑 같이 먹으면 속이 편안하고 당이 보충이 돼." 뜨끈하게 속을 데워주는 스프였다. 다들 두 그릇씩 먹는다. 라마단 음식을 먹으며 그는 가족 이야기를 한다.
 

모하메드가 해준 수프를 먹는 미리암(왼쪽)과 도미니크. ⓒ 신이현


모하메드는 맏아들인데 그 아래로 아홉 명의 누이가 있다고 했다. 아들 하나 더 얻겠다고 계속 낳았더니 계속 딸이 나왔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한 무슬림이었지만 그는 자유로운 남자가 되었고 와인도 좋아하고 돼지고기도 잘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아들은 굉장히 엄격하게 무슬림의 교리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모하메드의 아홉 누이들은 모두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기에 모든 가족이 모이면 쿠스쿠스를 산더미처럼 한다고 했다. "한번 하면 일주일을 쿠스쿠스만 먹어." 딸이 깔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다음 날에도 쿠스쿠스 면을 찾지 못해 쇠고기 따진과 닭고기 따진, 두 종류의 음식을 만들었다. 한 가지를 하겠다고 시작하지만 그는 늘 두 가지 이상 음식을 한다. 토마토가 남으면 토마토 계란조림을 하고 레몬이 남으면 레몬 콩피를 쓱쓱 만들어버린다. 그의 손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들은 부드럽게 뭉개지고 이상야릇한 냄새로 피어난다. 몸에 심겨진 북아프리카 태양이 손으로 뻗어 나오는 것만 같다.

그들이 떠나기 전 날 면을 구했다. 쿠스쿠스 면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되는 초간단 재료인데 모로코 가정에서는 살짝 익힌 면을 야채와 고기가 익고 있는 냄비 위에다 찐다. 그래야 면에 고기와 야채의 향이 베어들어 맛있다는 것이다. 접시에 쿠스쿠스 요리를 담을 때 모하메드는 아주 섬세하다. 포슬포슬한 면을 접시에 놓고 그 위에 고기와 뭉근하게 익은 야채들, 마지막으로 끓고 있는 고기 야채 국물을 듬뿍 끼얹어 내온다. 

다음엔 생 민트 차를 
 

모하메드가 만든 쿠스쿠스. ⓒ 신이현


"이건 진짜 가족의 맛인 것 같아." 쿠스쿠스를 먹으며 내가 말한다. 결혼과 탄생, 이혼, 재혼, 전처의 자식과 현재 애인의 전남편 딸, 자식들의 불륜과 이루지 못한 꿈, 가족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삐걱삐걱 연민의 소리를 내면서 함께 가는 것처럼 쿠스쿠스 요리도 그렇다. 다른 맛과 색깔을 가진 야채들과 고기가 폭발하는 향을 가진 향신료들과 합쳐져서 커다란 솥에 푹 익히니 구수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가족처럼 복잡하고 오묘한 맛이다.

터미널에 그들을 바래주고 오니 식탁 위에 그가 했던 일곱 개의 요리 레시피가 보인다. 모로코 음식점을 내겠다는 각오로 적어두었건만 한 가지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있는 쿠스쿠스 냄새가 생 민트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쿠스쿠스를 먹고 나면 꼭 달콤한 생 민트 차를 마셔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다. 그는 떠났고 나는 생 민트차를 마시고 싶다. 그래서 그를 민트 아저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민트 아저씨, 다음에 만날 때 모로코 민트 차부터 끓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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