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7 18:17최종 업데이트 23.08.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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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장화 총각 혹은 호밀 청년 김기홍 ⓒ 신이현

 

어느 날 한 청년이 양조장에 왔다. "레돔 양조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요. 월급은 안 주셔도 됩니다. 와인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어 키우는 것을 배우고 싶어 왔습니다." 양 귀 옆을 말끔하게 밀고 꽁지머리를 묶은 호리호리하고 상냥한 인상의 도시 청년 김기홍. 와인을 좋아한다고 무작정 낯선 곳에 와서 일하겠다는 청년이라니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급여도 받지 않고 얼마나 일할 수 있을지, 그는 와인을 배우러 왔는데 나는 공짜 일꾼이라고 생각하고 막 부려먹다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런저런 걱정이 따라왔다.  

"일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우리는 레돔 와인을 탁자 위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와인을 처음 마셔본 것이 중학교 때였어요. 부모님이 선물로 받은 것이었는데, 한 모금 마셨을 때 웩하고 뱉어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혓바닥에 남은 그 맛이 묘하게 잊히지 않더라고요. 처음 느껴본 이상야릇한 맛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그 첫 맛에 이끌려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독일 와인 학교에 공부하러 갈 계획인데 그 전에 한국 양조장에서 1년 정도 직접 경험하고 싶어요." 와인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입 안에 군침이 고이는 것처럼 설레는 미소를 짓는다.
 

빨간 장화를 신고 포도밭 일을 하는 기홍. 와인을 만드는 일은 생각하는 것만큼 우아하지 않다. ⓒ 신이현

 

"그래요. 일단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해요. 장화가 이것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버릴까 하다가 놔 둔 낡은 빨간 장화였다. 적당히 잘 맞았다. 장화는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 이제야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한 첫 번째 일은 비탈진 땅에 호밀을 뿌리는 것이었다. "포도밭에 왜 호밀을 뿌리죠?" 그가 묻고 나의 남편 도미니크가 대답했다. "밭을 일굴 때 가장 먼저 호밀을 뿌려주면 좋아. 겨울 동안 파랗게 난 싹이 땅을 덮어줘서 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지. 그리고 봄이 되면 뿌리가 길게 내려서 거기에 온갖 미생물이 붙어살기 때문에 땅이 건강해져. 밭에 호밀을 뿌리면 좋은 일이 정말 많이 생겨."  

포도밭에 호밀을 뿌린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직 나무도 심지 않은 맨 땅이었다. 호밀이 싹을 낼 동안 두 사람은 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포도나무 지지대로 쓸 대나무 말뚝을 1000여 개를 박았다.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칡넝쿨 뿌리를 캐냈고 땅속에 묻힌 비닐 쓰레기도 파냈다. 농부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처럼 한번 밭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랐다. 곡괭이 소리가 울려 퍼지면 멀리서 뻐꾸기가 뻐꾹뻐꾹 다정하게 장단을 맞췄다. "뻐꾸기가 우네요!" 빨간 장화 총각이 이렇게 말하면 그제서야 두 사람은 허리를 폈다.
 

호밀밭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주는 두 남자 ⓒ 신이현

 

"빨간 장화 총각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요즘도 와?" 사람들은 가끔 그의 안부를 묻는다. 1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일하러 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신기하다. 와인을 배우러 왔는데 늘 밭으로 데리고 갔다. 양조장에서 와인을 담는 일은 30퍼센트이고 그 나머지 70퍼센트는 농사짓는 일이다. 양조장 안에서 하는 일도 육체노동이긴 마찬가지다. 무거운 과일궤짝을 들어 올리고 엄동설한에 사과를 씻고 폭우에 포도를 따고 발효탱크 안에 들어가서 탱크를 닦아야 한다. 익어가는 와인을 테이스팅 하고 음미하는 종류의 시간은 참으로 짧다.

가끔씩 그의 친구들이 와서 함께 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루 만에 나가떨어진다. 양조장에서 농활하는 것이니 와인은 실컷 마시겠지, 하고 가볍게 설레는 마음으로 온다. "너무 힘들어요! 내 생애 가장 힘든 하루였어요!" 이렇게 소리친다. 생애 가장 힘든 일을 두 남자는 매일 한다. 뙤약볕에 입술이 바짝 마른 줄도 모르고 일하는 것을 보면 짠하면서도 미친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사람들도 궁금한 모양이다. "저 프랑스 남자랑 한국 청년, 밭에서 뭐하는 거요?" 포도밭을 한다는데 포도는 보이지도 호밀만 출렁이니 사람들은 나만 보면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나도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럼 포도는 언제 열리는 거야?" 두 남자는 그냥 웃기만 한다. "시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될 때까지 하는 겁니다." 이런 표정이다.
 

친구와 함께 사과를 씻고 있는 기홍. ⓒ 신이현

 

세 번째 호밀을 뿌렸을 때 빨간 장화 총각이 와인을 들고 왔다. 양조장에서 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올 여름 청수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에요. 제가 만들었어요." 첫출발의 기대와 두려움이 담긴 듯한 작은 새가 그려진 라벨이 붙어있다. "오아, 인생 첫 번째 와인이네!" 또르르 와인이 잔에 떨어지는 소리에 모두들 집중한다. 잔을 들고 색을 보고 향을 맡은 뒤 한 모금 마셨다. 한 소년의 꿈이 작은 꽃으로 피어난 첫 번째 와인 맛을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다. 미소년의 풋풋한 웃음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이 한 병은 10년 뒤에나 열어보자." 나머지 한 병은 양조장 서늘한 어둠 속에 보관하기로 했다. "유학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처음 왔을 때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물었다. "이제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걸요. 안 가도 돼요." "그래도 유럽의 와인 문화를 직접 경험해보면 도움이 될 텐데." 도미니크가 아쉬워한다.


"이제 나만의 양조장을 만들 수 있겠다!" 첫 번째 와인을 만든 뒤 그는 작은 와인 제조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 첫 번째 양조장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함께 동업했던 동료와 마음이 맞지 않아 깨졌다. 다니던 와인 수입사도 그만 두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기홍아. 그렇게 벙글벙글 웃고 다니면 사람들이 가마떼기로 본다. 제조장 그만 두면서 손해 본 건 없지? 네 노동의 가치만큼은 다 분배받은 거 맞지? 그렇게 사람 좋게 웃으면 안 된다!" 그 웃음은 가끔 사람 애를 태우지만 또 그 웃음 때문에 그가 좋다.

한 알의 과일이 발효되어서 인간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는 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설레는 일이다. 자연을 따라 가면서 만드는 내추럴와인은 그 맛의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와인을 제조해서 먹고 살려고 할 때는 여러 악조건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 와인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요." 오늘 기홍이 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내 대답은 이것이다. "그럼 그냥 취미로 만들어서 마시면 가장 좋아요." 양조장을 하겠다는 것은 법적인 것과 과일 농사, 장비들, 서류들 등등 첩첩산중 산 너머 산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멋있어 보이지만 일이 고되고 언제 돈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첫 번째 제조장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애가 터졌다.

"그래도 다 해봤으니까 다음번엔 더 쉽게 시작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와인에서 가장 좋은 건 와인마다 그 맛이 다르다는 거예요. 마개를 열 때마다 두근거려요. 그 미지의 맛을 생각하면! 그리고 와인으로 다양한 인생들을 만난 것이 너무 좋아요. 와인은 사람과 소통하게 만드는 통로와 같아요. 이제 한번 만들어봤으니까 싹 잊고 새로 시작할 거예요. 먼저 농사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한국의 모든 식재료들을 다 알고 싶어요. 그 모든 것을 술로 만들어서 떼루아를 표현하고 싶어요. 그런데 대표님, 저기 유채꽃 좀 따가도 될까요? 유채꽃으로 술을 담아보고 싶어요!" 도미니크가 모든 작물에 섬세하게 접근하는 것과 달리 그는 훨씬 실험적이고 도전정신이 넘친다. 이제 농사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친 열정이다.  
 

기홍과 그의 아내. ⓒ 신이현

 

네 번째 호밀을 뿌릴 때쯤 한 아가씨와 함께 왔다. 남매처럼 닮았는데 성격은 다르다. 아가씨는 활달하고 강단 있다. 둘은 결혼을 했고, 가끔 둘이서 함께 온다. 함께 사과 씻고 함께 포도밭을 걷고 함께 포도밭 유인줄을 묶는다. 포도밭에 뻐꾸기 소리 대신 명랑한 청춘 남녀의 호호깔깔 웃음이 울려 퍼진다. 네 번의 호밀이 올라오고 쓰러져 퇴비가 되는 사이 산비탈 돌투성이였던 땅도 지렁이가 헤엄치는 촉촉한 포도밭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빨간 장화 총각이라고 부르지만 내 마음 속에 그는 호밀 청년이다. 같은 꿈을 꾸는 조금 늙은 남자와 아주 젊은 남자가 호밀을 함께 뿌리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직도 진행 중인 그들의 꿈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맛있는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날을 기다려 보지만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랴.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은 후회 없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호밀밭에 선 한국 총각과 프랑스 남자 ⓒ 신이현

 
   

기홍과 함께 한 도미니크 ⓒ 신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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