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동상을 마주 보고 왼편에는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라는 장군의 유명한 이야기 등 어록 표석 23개가 죽 늘어서 있다. 오른쪽에는 1592년 5월 7일 왜군에게 최초로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 등 장군이 이루어낸 중요 해전을 알리는 표석 12개가 세워져 있다. 현충일 하루 뒤인 2023년 6월 7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에는 곱게 포장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정진오
전쟁 발발 한 달 보름여 만에 이순신 자신도 어깨 관통상을 입으며 조총의 위력을 몸으로 체감한 터였다. 그날에만도 많은 병사가 조총에 쓰러졌다. 이순신은 이처럼 전쟁 초기부터 조총과 맞닥뜨리면서 이게 전쟁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판단했고, 조총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때 자신 휘하에 조총 개발팀을 조직했을 거다.
이순신의 조총 개발팀은 앞에서 언급한 <화포(조총)를 봉해 올리는 일을 임금께 보고하는 장계>에 등장하는 군관 정사준,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 순천 사노비 안성, 김해 절 노비 동지, 거제 절 노비 언복 등 5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4명이 대장장이였으며, 그 중 3명은 노비였다.
팀장 격인 정사준(鄭思竣, 1553~?)은 전라남도 순천 출신으로 조총 개발 책임 이외에도 이순신 휘하에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거제 절 노비 언복은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였다. 그의 환도 제작 솜씨가 매우 뛰어났던 모양인지 이순신은 그를 가까이 두고서 환도 제작에도 참여시켰다. <난중일기> 1595년 7월 21일 자에 보면,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이 있는 곳에 각각 한 자루씩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조총 개발 과정에 참여한 대장장이가 원래는 칼 제작 전문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군대의 주요 무기가 칼에서 조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대장장이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인데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 일본의 조총 개발에도 사무라이용 칼을 만들던 대장장이들이 참여했다. 일본의 남쪽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는 1543년 포르투갈 조총을 넘겨받아 1년여의 고투 끝에 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게 일본 조총의 시초이다. 그 주역이 다네가시마에서 칼 만들던 대장장이였다.
전쟁 발발 전, 선조가 진도 군수이던 이순신을 품계를 뛰어넘어 전라좌수사에 제수한 것은 1591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자 며칠 뒤 사간원에서 들고 일어났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기는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면서 교체하라고 요구한 거였다. 선조는 이 사간원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게 '신의 한 수'였다.
이순신이 책임을 맡은 전라좌수영 지역은 요즘으로 치면 전라남도 순천시, 여수시, 고흥군, 광양시, 보성군 일대였다. 전라도 동쪽 해안가인데 좌수영이라 한 것은 서울에서 임금이 보았을 때 왼쪽이기 때문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왜군 측에서 보면 반드시 넘어야 할 물길이었다. 육로로 빠르게 북상하는 주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보충병과 각종 보급품을 실은 선박들이 남해를 통과해 서해안을 따라 한강이나 대동강까지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경상도 바닷길은 쉽사리 장악했는데 이순신이 버틴 전라도를 넘지 못해 애를 먹었고, 이게 결국은 명나라 참전과 우리 의병 조직의 시간까지 벌어주었다.
군수물자 관리에 철저했던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