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3 19:12최종 업데이트 24.04.1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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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다. 여기저기 동네방네 모두 꽃 동네 꽃 잔치에 새 노래는 덤으로 즐기란다. 세상사 시끄럽고 황사랑 미세먼지의 심술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봄 한 철만큼 예쁠 때가 없을 듯하다. 가만히 내가 볼 수 있던 때를 되돌아봐도 알록달록 화려한 가을이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냈다면, 울긋불긋 따사로운 봄은 갓 피어난 생명답게 귀엽고 깜찍하니 예쁘단 말이 제격이었다.

이런 봄날, 흰 지팡이 하나 들고 나서기만 해도 마음은 설레고 흥에 겨울 텐데, 어찌 집에만 머물 수 있을까. 아내와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각을 대신하는 손끝
 

눈길따라 느끼고 즐기고 알게 된다는 것,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것이리라. ⓒ 김미래/달리

 

분당 시내를 흐르는 탄천은 이미 북적였다. 삼삼오오 사람들의 웅성거림, 풀밭 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깔깔거림, 여기저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새들의 지저귐과 견공들의 기운찬 울부짖음까지. 내 팔을 잡은 아내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내 감각 기관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멸치게 떠나버린 내 시각을 대신해 청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 기관들이 그동안 해오던 역할의 몇 배나 되는 부담을 지게 된 까닭이다. 아내가 눈치챘는지 내 팔을 당겨 안았다.


"와, 너무 많네. 저쪽으로 가면 조금 한가할 거예요."

얼마쯤 걸었을까. 불현듯 따사로운 햇볕 사이로 파고드는 은은한 바람이 느껴졌다. 내 귀를 통해 본 주변도 한가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 바람이 가져온 봄소식을 한껏 들이마셨다.

한참 제 자랑에 여념 없는 꽃향기도 들어 있고, 더욱 세진 햇살도, 되살아난 물소리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아옹다옹까지 모든 게 바람 속에 들어 있었다.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바람과 만날 수 있는 바깥이 좋다. 아무리 요란스럽고 위험하다 해도 바로 이 맛에 굳이 아늑하고 안전한 실내를 떠나 바깥으로 나오는 거다. 

나만 좋은 게 아니었다. 아내도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빛을 품은 연분홍 벚꽃 그늘에 발을 붙잡히고, 샛노랑 거대한 울타리로 버티고 선 개나리에 눈길을 빼앗기고, 그들 사이 곳곳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여러 꽃들에 마음까지 빼앗겨서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단다.

"와, 예쁘다, 정말 예뻐. 저게, 저게 뭐더라? 밥풀꽃이었던가?"
"밥풀꽃?"

내 머릿속에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갓 지은 밥알이 긴 가지에 잔뜩 묻어 있는 것 같기도, 막 튀겨진 팝콘이 수북이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했던 꽃, 꽃 박사 친구와 긴급 통화를 마친 아내가 외쳤다.

"조팝나무래. 이리 와 봐요. 자, 조심조심 만져봐. 이 꽃 기억나죠?"

복슬복슬, 아직은 덜 자랐는지 별사탕만 한 탐스러운 꽃 무리가 마치 곱고 부드러운 털장갑 낀 손 같았다. 꽃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이젠 내 손도 제대로 꽃을 보는구나. 근데, 그땐 왜 그랬을까?"
"응? 그게 뭔 소리예요?"

시력을 잃고 나면 가장 먼저 시각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 손끝이다. 더듬더듬 무엇이든 만져서라도 알고 싶은 마음, 볼 수 없어도 알고 싶은 그 호기심은 때론 두려움도 이겨내고 고통 따윈 생각조차 못 한다.

나 역시 시력을 잃고 난 후에는 아무 때나, 아무 데나 겁 없이 손끝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리 조심하고 집중해도 촉각에 의존하는 손끝은 절대 시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피눈물을 통해 배웠다. 

뾰족한 무언가에 찔리기도 했고, 날카로운 어떤 것엔 베이기도 했다. 뜨거운 것에 데기도 하고, 참기 힘든 물컹함에 놀라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손끝의 촉각은 시각이 주는 빛과 색깔이란 아름다움을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것이 이런 손끝의 한계를 느끼게 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꽃이었다. 

중학생 때 진단받은 망막색소변성증은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진행이 매우 더뎠다. 덕분에 나는 마흔 살을 지나서까지 사회생활도 할 수 있었고, 내 눈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세상 만물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력을 잃고 난 후에는 손끝의 촉각을 통해 그 기억 속 세상 만물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

내가 여전히 시력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고 있던 십여 년 전의 일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거의 반강제로 나를 꽃 박람회장에 끌고 나갔다.

"이리로 와 보세요. 작약이란 꽃이에요. 자, 살짝 만져보세요. 어때요? 꽃이 참 탐스럽죠?"

쭈뼛쭈뼛 겉돌기만 하는 나를 본 행사 관계자가 나를 불러서 꽃을 만져볼 수 있게 해줬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서는데 신기하게도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꽃향기에 서늘하던 내 가슴이 따뜻해졌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관계자에게 손을 맡겼다. 1초, 아니면 2초, 정말 길어야 3초도 되지 않을 그 짧은 시간, 꽃송이로 손을 뻗으면서 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보고 느낀 꽃에 대한 모든 것을 떠올렸다.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그 빛깔, 부드러운 비단 같기도, 포근한 솜털 같기도 한 꽃잎, 살짝 쥔 내 손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따뜻한 꽃송이.

그런데 꽃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내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를 관계자도 아내도 눈치챘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그게, 그러니까 꽃이, 아니 내 손에 닿은 꽃의 느낌이, 내가 생각한 꽃과 너무 다르네요. 너무, 아주 너무 달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손으로 느끼는 촉각이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일까? 아마도 둘 다였을 것 같은데 분명한 건 그때 내가 만진 작약은 내 기억 속 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너무 차가웠고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젖은 채 구겨진 벨벳 조각 같았고, 뭉쳐진 휴지 조각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땐 그랬고, 그래서 나도 너무 놀랐다.

다행히도 지금은 꽃을 만지면 다시 옛 기억 속 그 아름다운 꽃이 떠오르긴 하는데, 아쉽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기억일 뿐이지 실제 꽃은 아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만지고 더듬어 봐도 진짜 꽃의 색깔과 모양은 알 수 없단 얘기고, 좋게 생각하면 나는 상상만으로 정말 예쁘고 귀엽고 앙증맞은 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단 얘기다.

"그거, 그냥 꽃이야, 볼 거 없어"
  

눈길을 대신한 손끝으로도 느끼고, 즐기고, 알 수 있다는 것, 그것 역시 감사할 일이다. ⓒ 김미래/달리

 

아내가 내 팔을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러게, 자기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정말 볼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 같아."
"감사? 그렇지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거지. 암, 그래야 하는데... 볼 수 있었을 때 그 고마움을 알고 소중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문득 조금 전 탄천에서 부지런히 뛰노는 아이를 나무라던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눈 팔면 안 돼. 앞을 봐야지. 그러다가 넘어진다. 야, 그거, 그냥 꽃이야, 볼 거 없어. 이리 와."

예민해진 청각 덕분에 무심코 들은 소리였는데 조금 안타까웠다. 여기저기 예쁜 꽃도 있고, 귀여운 강아지들도 많은데 호기심 천국 아이가 과연 앞만 보고 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냥 꽃이니까 볼 필요가 없다고? 아이에겐 좋은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데, 왜 이 좋은 것까지 막으려는 것일까?

무엇인가 소리가 들려도, 어깨를 스쳐도, 콧속을 자극해도 무심코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것이 눈길이다. 초롱초롱 그 무엇인가를 찾고 싶고, 알고 싶던 그 호기심 가득한 눈길, 그 눈길이 없었다면 도대체 하고 싶은 것이 있기나 했을까? 우리는 이 호기심 가득한 눈길 덕분에 잘 살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볼 수 없는 나도 어떤 자극이 오면 여전히 고개가 돌아가고 눈이 깜빡인다. 그만큼 본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내 삶, 내 건강, 내 안전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내게 정보를 주고 이를 판단하게 하는 소중한 본능이다. 내게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 필요할지, 기쁨을 줄지는 누가 뭐래도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느끼는 게 최고다.

우리는 이 눈길이 주는 소중한 선물을 외면하고 사는 건 아닐까? 부모의 잣대로 아이에게 좋은 것만 보여준다는 착각처럼, 자기 경험, 지식, 편견, 삶의 무게 때문에 눈길을 따라가지 않고 봐야 할 것만 봐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삶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하는 건 아닐까?

봐야 할 것만 봤다면, 미리 봐야 할 것을 정해 놓고 있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처럼 문명을 발전시키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눈길은 삶의 원동력이다. 눈길이 가면 눈길 가는 대로 따라가야 새로운 호기심이 생기고 그래야 새롭게 즐길 수 있다. 눈길을 무시하면 새로운 건 아무것도 없다. 

사족 하나, 당연히 꽃은 눈으로 만나야겠지만 혹시 기회가 된다면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느껴보시길… 손으로 본 동백과 작약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다른지, 벚꽃과 개나리가 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차가움과 신선함은 어떨지, 진달래와 철쭉의 꽃잎 두께가 주는 기쁨은 무엇인지, 이슬 촉촉 꽃잎과 햇살 가득 꽃잎이 왜 다른지... 손으로 보는 모든 꽃이 다르고, 모든 것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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