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일 국회 탄핵표결을 앞두고 자진사퇴를 밝힌 뒤 윤석열 대통령의 사표 수리로 방송통신위원장에서 물러나게 된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모습.
이정민
27년 검사 경력이 사회생활의 대부분인 윤석열 대통령은 원래 언론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검사들은 주변에 받아 쓰는 기자들이 넘쳐난다. 나쁜 놈들 때려잡는 게 일이고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쁜 놈 잡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고 언론과 부딪힐 일이 없거나 있어도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게 검사들이다.
하필이면 이동관(전 방통위원장)이 윤석열의 언론특보였던 건 비극이 아니라 희극에 가깝다. 이동관은 애초에 이명박 정부의 몰락에 책임이 큰 사람이다. 조중동에 종편(종합편성채널)을 안겨주고 MBC와 소송을 벌였으며, 방송사에 낙하산을 내려보내고 언론 보도에 시시콜콜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그래서 성공했나? 이명박 정부는 이동관이 잘못해서 무너진 게 아니라 이동관이 잘해서 무너진 것이다. 광우병 촛불 집회부터 시작해서 4대강 사업, 용산 참사, 천안함 침몰, 자원외교 등등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론을 틀어쥐려 했고 그때마다 지지율이 급락했다. KBS와 MBC를 잡고 종편이 거들어주면 적당히 깔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여론에 귀를 닫고 폭주하는 정권의 끝은 비참했다.
그렇다고 탁현민(문재인 정부 전 비서관) 같은 사람을 갖다 쓰라는 말이 아니고, 문재인 정부 시절 김의겸(대변인)이나 고민정(대변인)이 잘 했다는 말도 아니다. 언론과 싸우는 대통령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원래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서 더 많은 비판을 받기 마련이지만 겸허하게 비판을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극복할 때 권력의 정당성을 지킬 수 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지만 잘못을 인정해야 힘이 생긴다.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진실은 남는다.
대장동 커피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윤석열이 조우형(대장동 브로커)에게 커피를 타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커피가 아니다. 윤석열이 검사 시절 친분에 따라 수사를 축소하거나 중단했다는 의혹이 있다면 당연히 보도할 가치가 있고 윤석열에게는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애꿎은 뉴스타파를 아무리 털어봐야 윤석열이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워낙 복잡한 사건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꿀린 게 없으면 왜 이렇게 배배 꼬고 봉창을 두들기나. 긴 건 기고, 아닌 건 아니고, 까놓고 말하고 털면 될 일이다.
윤석열에게는 퇴로가 없다
윤석열에게는 지금 퇴로가 없다. 한동훈(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내세워 총선에서 선방하면 남은 3년을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만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라면 식물 대통령은커녕 조기 퇴진 압박에 시달릴 것이다. 이준석이 윤석열의 문제를 "기술적 미숙이 아니라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게 맞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가 "(내년 총선에서 지면) 레임덕이 문제가 아니라 임기와 상관없이 물러나는 것만이 '선장 없는 나라'의 혼란과 참담함을 면하게 하는 길"이라고 경고한 것은 그냥 엄포가 아니다. 2016년 10월 태블릿 사건이 터지고 용도 폐기된 박근혜를 가장 앞장서서 공격한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총선 결과와 무관하게 윤석열이 지금처럼 언론을 멀리하고 김건희(대통령 배우자)를 감싸고 돈다면 이 정권의 남은 3년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 듣고 싶은 소리만 골라 듣고 싶으면 애초에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 최승호(뉴스타파 PD)가 말한 것처럼 "언론이 질문을 못 하면 나라가 망한다."
윤석열은 KBS 신년 대담에서 "참모들이 써준 예상 질문과 답변을 보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그래서 나라 꼴이 이 모양이란 걸 알아야 한다. 국무회의할 때마다 혼자 떠든다고 해서 '59분 대통령'이란 별명도 붙었다. 최근 일련의 돌발 행동을 보면 뉴스를 제대로 보거나 읽기는 하는지 구중궁궐 용산에서 민심의 보고를 제대로 받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직 정권의 반도 안 지난 시점이니 조언을 하자면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질 사람을 가까이 두고 기꺼이 비판에 직면해야 한다. 스스로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비로소 뭐라도 새로운 걸 시작해 볼 수 있다.
윤석열과 오바마의 차이
▲2013년 11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베티 옹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이민개혁법 통과 촉구 연설 중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한 청년을 돌아보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윤석열은 대학 졸업식에서 소리치는 학생의 입을 틀어막고 끌어냈지만 버락 오바마(전 미국 대통령)는 달랐다. "청년을 막지 말라"고 경호원을 제지하고 대화에 끌여들었다. 청년은 "이민자 추방을 막아달라"고 외쳤고 오바마는 "그런 권한은 나에게 없다"면서도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이라고 화제를 넘겨받았다.
"만약에 제가 의회의 입법 절차 없이 모든 사안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미국은 법치 국가입니다. 제가 가려는 건 더 어려운 길입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따르는 거예요. 당신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 2013년 11월 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베티 옹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이민개혁법 통과 촉구 연설 중
사과의 3A는 동의하고(Agree) 사과하고(Apologize) 행동하는(Action) 것이다. 핵심은 비판을 대하는 태도가 실제로 행동의 변화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쫄리면 안 된다. 두들겨 맞을 건 맞고 반박할 건 반박하고 계속 앞으로 가야 한다. 참모들에게 예상 질문을 다시 뽑아오라 하고 기자들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디올백 의혹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많다. 다시 강조하지만 "질문을 받지 않으니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윤석열을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해도 좋을 것이다. '파우치' 하나 때문에 정권을 잃을 셈인가. 이 정도 조언을 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면 이 '입틀막' 정권은 이미 망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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