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슈포르 전용 잔에 담긴 트라피스트 맥주. 6,8,10
윤한샘
라 구르망디세는 경찰서 바로 옆에 있었다. 야외 테라스에 앉자 곧 벨기에식 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가 나왔다. 로슈포르 맥주처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에일 맥주는 상온에서 즐기는 것이 좋다. 알코올이 휘발되며 맥주 아로마를 한껏 끌어올려 주기 때문이다. 트라피스트 맥주잔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넓은 입구는 향을 코로 흩뿌려 맥주 고유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로슈포르 맥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성배처럼 생긴 아름다운 로슈포르 전용 잔에 마셔야 한다.
로슈포르 6은 벨기에 맥주 효모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수지와 향신료 향이 돋보였다. 7%가 넘는 알코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깔끔하고 마시기 편했다.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을 품은 로슈포르 8은 우아했다. 섬세한 감초, 흑설탕 향과 더불어 옅은 수지 향이 입안을 물들였다. 맥주가 이렇게 기품이 있을 수 있을까, 절로 웃음이 나왔다.
로슈포르 10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감동 그 자체였다. 짙은 마호가니 색은 무대를 가리고 있는 어두운 장막 같았다. 직접 마시기 전까지는 자신의 매력을 안 보여 줄 거라고 시위하고 있었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니 이내 화려한 향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건자두, 블랙베리, 가벼운 향신료 그리고 수지까지 복합적이고 미묘한 향들이 물씬 밀려들었다. 11%가 넘는 묵직한 알코올은 배경에 남아 이 모든 향을 팡팡 터트리고 있었다.
대미를 장식한 건, 막둥이 트리펠 엑스트라였다. 향긋한 배향과 수지 향이 배어있는 이 황금색 에일은 버거와 찰떡궁합이었다. 두툼한 소고기 패티는 트리펠 엑스트라의 풍성한 탄산을 만나 야들야들해졌다. 입속에서 기름기가 제거된 버거는 단숨에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보다 모든 맥주가 신선해서 좋았다. 갓 지은 밥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처럼 갓 만든 맥주에서는 살아있는 향이 느껴진다. 맥주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의 감각이 깨어있다는 의미다. 깨어있어야 반응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상에 반응하는 힘이 우리네 삶을 이어가게 한다. 맥주가 건네는 작은 메시지다.
트라피스트 맥주, 부디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기를
▲로슈포르의 막둥이 맥주, 트리플 엑스트라
윤한샘
2021년, 로슈포르 수도원의 부활을 이끌었던 아헬 수도원이 문을 닫았다. 남아있던 두 명의 수도사가 베스트 말레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아헬 '트라피스트' 맥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5년 전 아헬 수도원이 맥주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을 때, 전심으로 도왔던 이들이 로슈포르 수도사들이다. 로슈포르와 아헬 맥주는 형제와 다름없었다.
수도원이 폐쇄된 이유는 수도사들의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14개였던 트라피스트 맥주는 현재 10개에 불과하다. 자급자족이 원칙인 트라피스트에서 맥주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수도사들이 모든 공정에 참여하기에는 벅찰 수밖에 없다. 수도사들은 이제 직접 맥주를 양조하는 대신 정체성을 관장하고 관리·감독에 집중하고 있다.
아헬 수도원은 매각된 이후 다행히 양조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트라피스트 라벨을 달수는 없는 아헬 맥주는 애비 맥주(Abbey beer)가 되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해 생산량을 줄인 트라피스트와 달리 애비 맥주는 최대 생산을 추구하고 있다. 향미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정체성은 달라진 것이다.
로슈포르를 떠나며 전통과 진정성이 맥주에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언제 다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할지 기약할 수 없지만, 그때도 여전히 트라피스트 정신이 담긴 로슈포르 맥주가 남아있기를, 수도원 샘물이 마르지 않기를 기원한다. 오래된 것들이 오랫동안 이어져, 맥주 속에 문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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