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피란민과 부상자, 팔다리를 잃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의술을 폈던 영국인 부부인 의사 존 콘스의 살아생전 모습. 옆에는 아내인 간호사 진 매리(진 그로스). 2011.6.7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때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을 받은 존 콘스(John Cornes)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을 때였는데, 놀랍게도 존 콘스는 병역거부자였기 때문에 수교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존 콘스는 24살인 1951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던 중 징집영장을 받게 되었다. 1947년부터 퀘이커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던 존 콘스에게 병역거부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퀘이커는 평화주의 전통을 가진 기독교 분파로 병역거부를 비롯해서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매우 행동적인 특징을 가진 종교이고, 평화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영국 퀘이커 봉사 협회·미국 퀘이커 봉사 위원회)했다. 퀘이커 모임에 꾸준히 참석한 존 콘스는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에 저항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퀘이커에 영향을 받아 병역거부를 실천한 것이었다.
징집영장을 거부한 존 콘스는 1952년에 재판을 받게 되었다. 20명이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18명은 병역거부가 인정되지 않고 구속되었고, 한 명에게는 병원 질서유지인을 내용으로 하는 대체복무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존 콘스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를 거부했지만 "전쟁의 공포를 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 대체복무를 하기를 희망했다.
마침 퀘이커가 조직한 재한친우봉사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한 사회를 위한 의료 지원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혼한 부부를 한국으로 보낼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존 콘스는 간호사인 여자친구 진 그로즈(Jean Grose)에게 청혼하며 한국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고 진 그로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에 가겠다고 대답했다.
양쪽 부모님이 모두 결혼을 반대했지만 퀘이커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하고 한국 군산에 대체복무로 의료봉사를 오게 되었다. 재한친우봉사회가 팀 구성을 마친 것은 1952년 말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한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고, 휴전 협정이 끝나고 약 4개월 뒤인 1953년 11월부터 재한친우봉사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역이 의료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했는데, 북한에서 온 전쟁 난민 3만 3천여 명이 군산에 머물고 있어 의료 지원이 절실했다.
존 콘스와 진 그로스는 1954년 1월 전라북도 군산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고 1956년 9월까지 군산에 머물며 전쟁 난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이어갔다. 한국 정부가 수여한 수교 훈장은 군산에서 존 콘스가 대체복무로서 행한 의료봉사가 전후 한국의 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고 사회를 복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존 콘스가 행한 의료 봉사에는 깊이 감사하지만, 그가 왜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그가 징집영장을 받은 1951년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로, 존 콘스가 만약 징집되었다면 한국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는 총을 들고 적을 죽이는 일을 거부하고, 의사로서 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택했다. 존 콘스의 의료봉사는 인도주의적인 실천이면서 동시에 전쟁에 반대하는 '병역거부'라는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존 콘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

▲2013년 1월 25일, 60년 전 한국에서 진료 활동을 펼친 영국인 고(故) 존 콘스 박사에 대한 수교훈장 수여식이 런던 주영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 부인 진 매리(진 그로스)(85) 여사는 15개월 전 작고한 남편을 대신해 박석환 주영 대사로부터 수교훈장 흥인장을 전달받았다. 매리 여사(왼쪽)와 딸 루스(오른쪽)가 훈장과 서훈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선전포고도 없이 남한을 침공한 김일성도,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압록강에서 먹겠다며 북진통일을 떠들어 대던 이승만도 서로 세계관은 달랐지만 압도적인 강한 힘(군사력)으로 상대방을 섬멸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한 것은 공통적이었다. 이 공통점의 귀결이 한국전쟁이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존 콘스는 강한 힘이 과연 평화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결국 힘(군복무)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생각에 평화적인 수단(대체복무)을 택했던 것이다. 한국 정부가 기려야 하는 것은 존 콘스의 의료봉사뿐만이 아니라, 강한 힘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약자들의 곁에서 평화적인 수단으로 평화를 일구려 했던 존 콘스의 정신이다.
존 콘스가 대체복무를 하기 위해 왔던 1954년의 한국은 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거리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넘쳐났고 병원, 도로, 전기와 같은 사회의 기본적인 인프라가 무척이나 열악한 상태였다. 지금 한국은 그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강국이자 군사 강국이다. 강한 힘이 평화를 지킨다는 언설이 무색할 만큼 이미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진 국가다.
한국의 군사비 지출은 북한의 국가 총생산을 넘어선 지 오래며, 한국보다 더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 10개국이 되지 않는다. 또한 한국은 무기 수출과 수입 모두 전 세계 10위 안에 드는 주요 무기 생산국이다. 7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것도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더 강한 힘을 부르짖고 있다. 강한 힘에 따르는 강한 책임에 대한 고민은 좀처럼 보이지 않은 채로.
70년 전에도 평화를 가져온 건 강한 힘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만약 한국이 이겼더라도 그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3년 동안 수백만 명이 죽고 다쳤는데 김일성 정권을 무너뜨렸다 한들 그것을 평화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70여 년 전, 강한 힘은 오히려 전쟁을 가져왔다. 당시 조금이라도 평화를 구축한 것은 김일성이나 이승만의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욕구가 아니라, 그 힘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존 콘스의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로서의 의료봉사 같은 행동이었다. 힘에 의한 평화는 가짜평화에 가깝다. 그 가짜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 전쟁이 될까봐, 나는 두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수교훈장을 받은 존 콘스의 이야기에 관심 갖기를 바라는 이유다.
▲녹색연합, 전쟁없는세상, 정의평화기독연대, 참여연대, 피스모모,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6일 오후 ‘건군 75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열리는 서울 세종대로 부근 서울시청앞에서 ‘힘에 의한 평화 없다 STOP ARMS RACE’ 현수막 시위를 벌였다.
권우성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