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3 10:39최종 업데이트 23.08.1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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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내각 ⓒ 국사편찬위원회

 
1948년 8월 초의 최대 이슈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 구성이었다. 그해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지금의 서울 대학로 인근인 이화장에 조각본부를 설치하고 내각 구성 작업을 진행했다.

7월 27일, 이승만이 총리로 임명한 이북 출신 이윤영이 국회 인준 투표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난관에 빠진 조각 작업은 8월 2일에 독립운동가 이범석이 총리 인준을 받으면서 급물살을 탔다. 이날부터 사흘간 각부 장관들이 연달아 임명된 결과로 8월 4일에 초대 내각이 완성됐다. 정부 수립 11일 전의 일이다.


이 내각에는 독립운동가 출신이 다수 포함됐다. 국방부 장관을 겸한 이범석 총리, 농림부 장관 조봉암, 사회부 장관 전진한, 무임소 장관 이청천 등이 입각했다.

이를 근거로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을 부정하는 주장들이 있다. 국민의힘 추천으로 진실화해위원 후보자가 됐다가 지난 2월 24일 국회 표결에서 탈락한 이제봉 울산대 교수는 작년 6월 5일과 7일에 올린 유튜브 동영상에서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 것이고 북한은 항일투쟁가가 세웠다는 이야기들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오랜 해외 체류로 인해 국내 기반이 거의 없었던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한민당을 견제하고 이들을 밀어냈지만, 이들이 가장 열망하는 과제를 이루어 주었다. 1949년에 경찰력을 동원해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공격하고 친일 청산을 와해시켜 주었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그가 누구의 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기용한 것은 자신과 미국이 처한 난관 때문이었다. 그의 정부는 한반도 전체의 총선거가 아닌 남한만의 5·10 총선에 의해 구성됐다. 미군정과 극우에 의해 좌파가 힘을 잃은 뒤였기 때문에, 이 정부는 남한 내에서도 우파만 대표하는 데 불과했다.

우파의 대표성을 온전히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파인 김구조차도 총선을 보이콧했으므로 남한 우파의 일부만 대변할 뿐이었다. 거기다가 분단 정부를 거부하는 저항의 목소리가 4·3 제주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로 인한 정통성 문제를 감추는 방법 중 하나가 독립운동가나 진보 인사를 내각에 포진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이승만뿐 아니라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했다.

초대 내각 구성에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점은 이 내각에 기용된 친일파 윤치영의 존재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임명된 배경을 살펴보면,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을 기용한 동기가 한층 명확해진다.

'친일 명문가' 출신 윤치영
 

윤치영 ⓒ 위키미디어 공용


1898년 2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한 윤치영은 '친일 명문가' 출신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윤치영 편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낸 윤치오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의 동생"이라며 "남작 윤웅렬은 백부"라고 소개한다.

이 사전의 윤치오 편은 윤치오의 부인이 중추원 참의 김윤정의 딸이라고 한 뒤 "차남 윤명선은 만주국 이사관을 지냈으며, 둘째 며느리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갑순의 장녀"라고 말한다. 친일파들이 뒤엉킨 집안이었던 것이다.

윤치영은 교동보통학교·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세이소쿠영어학교·와세다대학·프린스턴대학·헤이스팅스대학·콜럼비아대학·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조지워싱턴대학·아메리칸대학을 거쳤다. 그는 학교들과만 친한 게 아니라 사람들과도 친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 사교부장과 재일조선기독교청년회 사교부 간사를 지냈고,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재미한인유학생총회 사교부장을 지냈다.

'사교' 타이틀이 많은 그의 인간관계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승만과의 친분이다.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오영섭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이승만연구원의 모태) 연구교수가 2008년 8월 <한국사 시민강좌>에 기고한 '윤치영,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공신'은 "윤치영은 1923년 하와이 체류 때부터 건국 직후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다고 평한다.

윤치영은 교동보통학교 시절인 10대 초반부터 기독교청년회(YMCA)를 매개로 23세 위인 이승만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그리고 그의 미국 체류 기간 일부는 하와이 체류 기간이었다. 하와이에 머문 것은 이승만의 요청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조성한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달하고 이승만의 사조직에서 실무를 처리하며 출판물을 발행하는 일들을 그는 해냈다.

윤치영이 이승만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29세 때인 1927년 1월 7일에 보낸 서한에서도 증명된다. 위 논문에 따르면 윤치영은 그 편지에 "금일의 각하의 취하실 길은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가지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즉위한 날이 1926년 12월 25일이다. 위 편지는 그로부터 13일 뒤에 작성됐다. 세계인들이 천황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던 시기에 이승만더러 천황이 되시라고 권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이승만의 '광팬'이다.

증거가 확실한 친일

그런 광팬이 '천황의 나라'로 전향했다. 37세 때인 1935년 5월에 귀국한 뒤 이승만 계열인 흥업구락부에서 간사로 일하다가 1938년 5월에 체포된 그는 그해 9월 3일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이 한국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공안정국을 조성하던 시기에 그의 친일 전향이 이뤄진 것이다.

그는 이승만을 따를 때처럼 일본제국주의도 열심히 따랐다. 침략전쟁 자금을 모아 일제에 헌납하기 위한 가두판매 활동에도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1년) 9월 임전대책협력회 채권가두판매대에 참여"했다고 기술한다. 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도 되고,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도 됐다.

학교 이력만으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그런 풍요 위에 약간의 친일 재산이 추가로 더해졌다. 금액이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친일 기고를 통해 어느 정도의 수익이 생겨났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연재한 이력도 있고, <청년> 같은 데에 기고한 이력도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40년 1월호 <청년>에 기고한 글에서는 "우리는 한마음 한 뜻으로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하야 신성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황군의 무운장구를 축도합니다"라고 기원했다.

그는 친일 강연을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친일 기고까지 했다. 그의 친일은 증거가 확실한 친일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력을 숨기기 힘든 친일파였는데도, 이승만은 50세 된 그를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무부 장관으로 기용했다. 초대 내각에 대한 관심이 뜨겁던 1948년 8월 3일의 일이다.

그것은 파격적인 기용이었다. 그해 8월 8일 자 <경향신문>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 (2)'는 "내무에 조병옥이냐 장택상이냐? 몇 날 동안을 두고 항간에서는 멋대로들 떠드러 오다가 막상 조각 뚜껑을 여는 마당에 조·장 양씨가 모두 미끄런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라며 "더구나 기상천외한 윤치영 씨가 임명되었다는 호방(呼榜)을 듯고 나선 두 번 놀랐다"고 전했다.

이승만 초대 내각의 첫째 기준
 

돈암장에서 이승만과 함께(왼쪽 맨 끝이 윤치영, 가운데 검은 한복을 입은 앉은 이가 이승만) ⓒ 위키미디어 공용


친일파의 지원을 받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친일파의 적인 독립운동가들을 내각에 앉혔다. 이는 그가 독립운동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훼방했다는 죄목으로 1925년에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직에서 쫓겨난 그가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가 조봉암 같은 사회주의자를 기용한 것 역시 사회주의를 높이 평가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승만이 기용한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승만과 가깝거나 이승만을 위협하지 않을 인물로 평가됐다는 점이다. 1997년에 <이화사학연구> 제23·24합집에 수록된 역사학자 김수자의 논문 '1948년 이승만의 초대 내각 구성의 성격'은 이 내각의 특징을 '친이승만 계열, 이승만 지지자들'로 정리했다. 조봉암의 경우에는, 나중에는 이승만과 적대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상은 달랐지만 적대관계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들을 포진시킴으로써 친일 정부의 색깔을 누그러트리고, 진보적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써 우익·분단 정부의 색깔을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감추는 데 기여했다. 그런 효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되면서도, 이승만을 해하지 않을 인물들을 고르느라 독립운동가나 진보적 인물들 중에서 물색을 했던 것이다.

윤치영은 독립운동가로 분류되기 힘들었다. 공개적으로 전향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친일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이승만은 그런 윤치영을 파격을 무릅써가며 내무부 장관이라는 핵심 요직에 기용했다. 군대는 해방 뒤에 새로 건설됐지만, 경찰은 기존 조직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경찰이 군대보다 더 강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 장관에 친일파 윤치영을 기용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승만이 그렇게 한 것은 윤치영의 친일 이력을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윤치영이 초대 내각에 포진한 독립운동가들과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치영은 '이승만과 가깝거나 적대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기준을 충족했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다. 이승만더러 천황이 되시라고까지 했던 인물이다.

친일파 윤치영이 입각한 사실은 이승만이 초대 내각을 구성할 때 첫째 기준으로 삼은 것이 자신과의 친밀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과 얼마나 가까운가가 중요했다. 이는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나 진보 인사가 들어간 것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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