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2 11:00최종 업데이트 23.06.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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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북한과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대결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피해를 보는 쪽은 북·중·러가 아니다. 한국의 일반 대중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다.

지난 11일 질베르 웅보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과의 면담 때 한국의 노동탄압 현실을 고발한 사람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뿐만이 아니었다. 한국노총의 류기섭 사무총장도 이 자리에서 윤 정권을 고발하면서 ILO의 적극적 역할을 당부했다. 윤 정권의 탄압을 받는 한국 노동계의 절박한 현실을 반영하는 장면이다.


지난 1월 19일 윤 대통령은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WEF) 특별연설에서 "미래세대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할 책임", "세계 시민의 자유를 확장할 책임"을 역설했다. 바로 그 다보스포럼이 지난 20일 '2023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를 통해 한국 여성들의 지위가 약화된 현실을 지적했다.

경제·교육·보건·정치 분야에서 수년째 상승 국면을 타며 작년에 99위로 올랐던 한국의 성평등 지수가 금년 들어 146개국 중 105위로 떨어졌다고 다보스포럼은 전했다. 최근 수년간에도 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윤 정부 들어 상승 흐름이 멈췄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보도에 따르면, 다보스포럼은 여성의 정치참여 기회와 관련해 "피지와 미얀마, 한국 등은 정치권력 분배 부문에서 가장 퇴보한 국가들"이라고 지적했다.

국제 언론 감시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가 지난달 3일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자유 지수는 아프리카 북서부인 감비아에 이어 세계 47위다. 촛불혁명이 난 2016년에 70위를 기록했다가 그 뒤 41~43위를 유지했던 한국의 지수가 윤 정부 들어 다시 떨어졌다.

윤 정부가 조장하는 신냉전과 이념 갈등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북·중·러가 아니라 한국 국민들이라는 점은 또 다른 분야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식민지 권력이나 해방 이후의 국가권력으로부터 피해를 본 국민들의 대항력 역시 약해지고 있다. 국가권력보다는 국민의 편이 돼야 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최근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진실화해위 김광동 위원장은 제주 4·3을 공산 폭동으로 왜곡하고 5·18 북한 개입설을 옹호할 뿐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런 그가 최근 들어 역점을 들이는 분야는 북한군에 의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다.

작년 12월 9일 임명된 그가 취임 후의 첫 현장 행보로 찾은 곳이 전북 정읍시 두암교회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월 1일 이곳을 방문한 그는 북한군에 의한 기독교인 학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면밀한 조사를 거쳐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이 미군과 국군에 의해 주로 벌어지긴 했지만 북한군에 의한 학살도 적지 않으므로, 이런 문제 제기는 일견 타당한 듯이 보인다.

학살 피해자 측을 격분시킨 진실화해위원장
 

4월 26일 서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지만 그의 행보는 실제로는 피해구제와 인권을 후퇴시키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6·25전쟁 73주년을 나흘 앞둔 지난 21일 진실화해위 제57차 전원회의에서 북한 정권에 사과와 보상을 촉구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를 포함해 국민의힘 추천으로 임명된 진실화해위원 5명은 남한 좌파가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까지 북한의 책임을 묻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야당 추천을 받은 진실화해위원 3명은 현실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단순히 구호만 외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피해자와 유족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는 격이다 등의 이의를 제기했다.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의 자산이 한국 내에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상대로 강제징용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을 상대로 그런 성과를 거두려면,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바뀌거나 북한 정권이 혁신되는 등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결과적으로 북한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의 해결을 봉쇄하게 된다. 김광동 위원장이 역점을 들이는 분야가 도리어 낭패를 볼 가능성이 현저하다. 그런데도 이 일에 매달리는 것은 실제로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별로 없음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김광동 위원장이 한국전쟁 학살 문제의 해결에 소극적이라는 점은 지난 9일의 영락교회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날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영락교회 5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보상은 부정의'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침략자에 의해 초래된 희생에 대해서는 사실을 감추고 오히려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시킨 민간인 희생을 '국가범죄다, 국가폭력이다'라는 이름으로 부각하고 교육하고 기념시설을 만들고 1억 3200만 원씩 보상해주고 있다"라며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은 주로 미군과 국군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이 부분을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시킨 민간인 희생"이라고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진실화해위원장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역사교육, 기념시설 조성, 피해 보상이 과연 필요한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주장은 학살 피해자 측을 격분시켰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유가협 의문사지회 등은 지난 16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앞에서 김광동 위원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들이 이미 수령한 보상금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으니 이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충남 서산 부역 혐의 희생 사건 유해 발굴 현장 3구역 전경. 최소 17구가 발굴됐다. 매장지인 서산시 갈산동 봉화산 교통호에서는 73년 전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정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골 60여구와 유품 등이 발굴됐다. 지난 5월 30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해 수습을 앞두고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위원장은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을 보상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됐다는 시각을 드러내는 한편, 북한군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북한으로부터 배상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한국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 방법은 실질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의 논리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에 대해 문제제기할 기회를 봉쇄하는 동시에, 북한군에 의한 학살의 해결 가능성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21일 전원회의 때 국민의힘 측 진실화해위원들은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말처럼 북한이 비슷한 입장 표명을 한 사례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2020년에 펴낸 이 연구소 김상범 교수의 <북한의 무력행위에 대한 사과·유감 표명 사례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1968년에 발생한 1·21사건(청와대 습격사건)과 관련해 1972년에 "대단히 유감"이란 입장을 밝히고, 2002년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는 입장을 표시했다. 1996년 9월의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뒤인 그해 12월에는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2010년에 발생한 연평도 포격 사건과 관련해서는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사실이라면 지극히 유감"이라고 말했고, 2020년에 발생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 때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라고 발언했다.

다른 국가기관도 아니고 진실화해위가 북한을 상대로 위와 같은 수준의 입장 표명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지, 북한을 상대로 그런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진실규명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겠는지도 의문스럽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인권위원회나 국민권익위원회처럼 국가권력보다는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 국가기관보다는 국민기관이 돼야 할 진실화해위가 윤 정부의 대북 압박에 가세하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왜곡하고 있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쪽은 북한이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들이다. 진실화해위의 움직임은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윤 정부가 조성하는 대결적 구도가 일반 대중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점이 이런 데서도 증명된다.

국민의 편이어야 할 진실화해위가 국가권력의 편이 되면 국가범죄 피해자나 유족들의 지위가 열악해진다. 이는 일반 대중의 지위를 사회 전반적으로 약화시키게 된다. 윤 정부가 요란하게 견제하는 북·중·러는 약화되지 않고, 한국 내에서 대중과 국가의 역학구도, 대중과 기득권층의 역학구도가 불공정하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의 대결 구도가 실제로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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