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8 14:06최종 업데이트 23.05.0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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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열심히 새벽 예배에 다녔다. 뉴욕의 비싼 임대료에 허덕이던 참에 한 친구가 교회 기숙사를 알려줬기 때문이다. 버스도 있고 한인 마트도 가까운데 지금 임대료의 절반 정도만 내면 된다고 했다.

조건은 단 하나, 매일 새벽 예배에 출석하는 것. 못할 것 없었다. 아침 운동 삼아 예배를 다녔다. 건강해진 것 같고 하루도 길어졌다. 문제는... 목사님 설교가 너무 재미없었다는 것. 어느 날 목사님이 '은혜'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설마 했는데 바로 그 얘기를 했다. 


"우리는 미국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미국이 자유 대한민국에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여러분은 어려서 모를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고..."

한국에서 온 가난한 학생들만 앉아있는 새벽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강론은 끝없이 이어졌다.  

조마조마한 일주일
 

25일(미 현지시각) 미국 NBC 방송에 보도된 윤석열 대통령 인터뷰. ⓒ NBC방송 갈무리

 
저녁을 준비하며 틀어둔 NBC 뉴스에 '윤석열'이란 단어가 들렸다. 가스 불을 끄고 자석처럼 끌려 TV 앞에 앉았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앵커 중 하나가 한국 대통령을 1:1 인터뷰한다. 무슨 말을 하려나, 또 문제 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앵커 레스터 홀트의 신중하고 진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친구가 친구를 염탐합니까?" 

한국 관료 간 대화를 도청한 미국 정보기관 문서 유출 사건에 대해 윤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내용들이 있고 양국이 긴밀히 협의 중이다.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 동맹은 여전히 굳건하다"라고 대답하자 오히려 앵커가 반문한 것.  

한국 대통령은 "친구끼리는 그럴 순 없지만 국가 관계에서는 현실적으로 안 된다고 할 순 없다"며 "가장 중요한 신뢰가 있으면 관계가 흔들릴 수 없다"라고 미국인 앵커에게 애써 설명한다. 

진행자는 유출된 도청 내용을 언급하며 백악관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 공급을 압박하고 있는지 물었고 한국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자유와 인권 수호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으며 한국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도 공급해야 할 때가 온다면, 전선의 상황이 달라진다면, 한국이 국제 사회의 공동 노력을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답변이 백악관이 가장 좋아할 내용이었다. 그럴 수 있고, 지원할 수 있고 등등. 방송된 3분 30초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역시나 대만 해협 문제. 저걸 왜 자꾸 우리에게 묻냐고 혼잣말하며 대통령의 대답을 지켜보아야 했다. 

"우린 대만 해협을 둘러싼 평화와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무력으로 현상을 바꾸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냥 앞의 말만 하시지...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TV를 꺼버렸다.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미 상·하원 의원들을 앞에 놓고 하는 연설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시각 27일 목요일 오전, 세상 바쁜 양원 의원들이 국빈 연설을 듣기 위해 의회를 꽉 채웠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고 그들의 재건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며 한국 대통령은 지원을 천명한다. 현대차의 러시아 철수 소식에도 미국과 한편으로 움직이겠다는 선언 같다. BTS나 블랙핑크, 오징어 게임 얘기도 했고 의회에 진출한 한인 출신 의원도 소개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박수는 북한에 대한 내용이었다. 

"잘못된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한 정권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북한입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택한 서울과 독재와 공산주의를 선택한 평양은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도발은 한반도와 그 너머의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한국 대통령의 주장에 미국 양원 의원들은 정말 우레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5년 전 오늘 남북의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포옹할 때 그들은 이런 느낌이었을까? 식은땀이 등줄기에 흘렀다. 매캐한 화약 내의 느낌과 함께. 한 주가 무척이나 길다 싶다. 

제로콜라, 야구, 로스코 그리고 아메리칸파이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이 2023년 4월 26일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국빈만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래를 부르고 있다. ⓒ UPI=연합뉴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아메리칸 파이'라면서요?"

바이든 대통령의 요청에 윤 대통령은 반주 없이 노래를 불러 좌중의 환호를 받는다. 노래를 부를 줄은 몰랐다는 한국 대통령의 말과는 달리 두 주먹을 흔들며 환호한 바이든 대통령은 원곡 가수 돈 맥클린이 사인한 기타를 준비해 그 자리에서 선물로 건네는 모습을 연출한다. 

바이든은 앞서 제로콜라를 즐겨 마시는 윤 대통령이 포도 주스를 마시려 하자 당신의 음료는 여기 있다며 제로콜라를 건넸다. 질 바이든 여사도 김건희 여사와 의사당 앞 워싱턴DC 국립미술관(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마크 로스코 작품들을 감상했다. 김 여사는 2015년 코바나콘텐츠 대표 시절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로스코 작품 50점을 한국에 들여와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마크 로스코' 전시회를 연 바 있다. 바이든 여사는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330명을 초대했던 2년 전 프랑스 대통령 국빈 만찬과 비교하면 비록 규모는 절반 정도였지만 그래도 노령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질 바이든 여사는 국빈 맞이에 최선을 다한 듯 보인다. 직접 한국전 참전비를 안내하고, 야구 장비를 선물하고, 김 여사의 탄생석 목걸이도 선물하면서 말이다. 

48초 스쳤던 작년 뉴욕에서의 만남과는 달리 윤 대통령의 어깨를 두드리고 엄지 '척'하고 박수를 유도하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매우 낯설고도 신기하다. 늘 야권에 언론에 노조에 불만 가득했던 한국에서의 얼굴과는 달리 어딘가 흥분되고 매우 즐거워 보이는 윤 대통령의 모습 또한 말이다. 

정상회담 하루 전 재선 선언한 바이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조업 일자리 창출 관련 행사에서 청중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고 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2023.04.25 ⓒ 연합뉴스

 
바이든의 재선 출마 선언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25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4년 재선 출마를 공식 발표한다.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이다. 몇 달 전부터 재선 출마 의지를 밝힌 바이든의 당일 NBC 여론조사 결과는 출마 반대 70%였다. 트럼프의 60%보다 높은 수치다.  

그래서 더 걱정됐다. 싸늘한 미국인들의 여론에 대한 반전 카드는 한국일까?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성대한 접대를 하며 어떤 청구서를 내밀까 말이다. 

"당신이 구축하려는 중국 반도체 확장 견제는 한국 기업들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재선을 위해 당신은 핵심 동맹국에 손해를 입히고 있는 건 아닌가?"

한·미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 LA 타임스 > 기자의 질문은 5박 7일간의 국빈 방문을 함축한다 할 수 있겠다. 바이든은 "윈윈"이라 했지만 어느 전문가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대 최고라는 120명의 한국 경제 사절단은 벌써 미국에 1000억 달러, 133조 원 이상의 투자를 안겼다.

향후 4년간 넷플릭스의 25억 달러 한국 투자가 현재로서는 가장 큰 성과일 뿐이다. 대통령이 직접 일론 머스크를 만났지만 투자 요청을 했을 뿐이다. '워싱턴 선언'은 미국의 군사적 간섭을 더 노골화한 립서비스란 분석이 높고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선 양국의 말이 다르다. 

바이든이 두 손을 번쩍 든 윤 대통령의 노래 가사는 이렇다. 
 
아주 아주 오래전을 난 여전히 기억해요/ 그 음악이 얼마나 나를 웃게 해 주었는지 / 난 알았어요. 내가 노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말이에요/ 그렇다면 잠시동안 행복했겠죠...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로큰롤 가수를 추모하는 이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느꼈어요/ 음악이 죽어 버린 그날에...

5년 전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던 그날로부터 우리는 지금 그 반대편에 와 있는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이 뛰어노는 한반도가 언제부터 전쟁을 운운하는 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미국의 은혜를 말하며 형님처럼 받들어 모시는 이들이 큰 역할을 했다 싶다. 

70년간 충분히 고통받았고 넘칠 만큼 갚지 않았나? 얼마나 더 비굴하고 더 굴종적이어야 하나? 수교 70주년 방미 뉴스 하나하나가 가슴 졸이게 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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