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분노한 20대 여성들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내용으로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2016.5.23
최윤석
추모 공간에 참여한 이들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평범한 20대 여성'이라는 자신의 생애 서사가 모순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피해자의 죽음을 낯선 타자의 개별적 죽음이 아니라 성차별적 구조 속에 위치한 '여성됨'의 집합적 경험 및 삶의 조건과 연결했다.
또한 지속되는 여성 혐오와 성폭력 문화에 대한 인식은 추모의 장에 접속한 여성들을 공통의 감각으로 연결하는 기제가 되었으며 여성들이 사건에 관한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서 나아가 정치적 삶을 재구성하는 비판적 동력으로 작동했다.
결국 추모 행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특정 사건을 통한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연결됨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로 나아가고, 이를 통해 페미니스트로 정치화한 인식과 대항적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성균관대학교 교수 천정환은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 공간의 설치와 여성들의 거리 행진을 '포스트잇 민주주의'로 명명하며 여성들의 새로운 공론장이라고 하였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2021년 3월 3일 런던에서는 '영국판 강남역 살인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범한 33세 여성 세라 에버라드는 저녁 9시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친구 집을 나섰다. 이후 그는 일주일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영국 현직 경찰 남성 웨인 쿠전스(48)였다.
런던 경찰은 사건 브리핑 과정에서 "여성들은 밤늦게 혼자 다니지 말아야 한다"라고 경고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여성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영국 여성들은 여성을 보호하라는 요구를 하며 런던 클래팜 커먼 공원에서 추모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 "I am Sarha(내가 세라다)'라는 문구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추모객들은 "How many women? How many more?(얼마나 많은 여성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라는 구호를 외쳤다. 온라인에서는 '#shewaswalkinghome'는 해시태그를 붙이며 추모의 뜻을 전했다.

▲영국 런던 의회 광장에 세라 에버라드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 2021.3.15
연합뉴스
"학교 주변에서 알바를 하는 중에 진상 손님이 온 적이 있어요. 제게 막말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체적 폭력까지 가하려고 할 때 남자 직원이 나와서 겨우 저지했어요. 지금은 멕시코에 있는데 길을 가면서 운전자가 차를 멈추고 말을 걸거나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리는 것도 일상입니다. 여행지에서도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일이 항상 일어납니다."
"밤에 혼자 집에 갈 때 뒤에 누가 따라오면 핸드폰을 꺼내서 누구랑 통화하는 척해. 혼자 갈 수 있는데 왜 데리러 나왔냐고 핸드폰에 대고 혼자 말해. 내 남동생한테 밤길에 여자가 혼자 가면 뒤에 따라가지 말고 얼른 지나쳐 주든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걸어주든지 하면 그 사람이 속으로 많이 고마워할 거라고 가르쳐줬어."
"남자 친구랑 자주 싸우는데 서로 감정이 격해지다가도 나는 어느 순간 멈춰야 해. 얘가 더 화나면 이성을 잃고 나를 때리거나 죽이지 않을까 겁이 나는 순간이 생겨. 나는 얘를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도 죽일 수 없지만 얘는 마음을 먹으면 나를 죽일 수 있잖아. 나도 화가 나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 모든 걸 멈추게 돼."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20대 여성들이 한 말이다. 남성이라면 겪기 어려운 경험이자 느끼기 어려운 감정임이 분명하다.
2021년 3월 23일 서울 노원구에서는 어머니와 두 딸이 집에서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23세 남성 김태현이다. 그는 자신이 스토킹 한 여성의 집에 들어가 스토킹 한 여성의 동생을 먼저 살해했다. 뒤이어 나중에 귀가한 스토킹 한 언니와 자매의 어머니를 차례로 죽였고 체포되기 전까지 세 모녀의 시신이 있는 집에 머물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기도 하였다.
그는 추적을 피하려고 범행 도구를 구매하지 않고 훔쳤다. 휴대폰으로는 '급소', '사람 빨리 죽이는 법'을 검색했다. 가해자는 피해자 자매 중 언니를 수개월 스토킹 했다. 그러다 교제를 거부하자 당사자와 그의 어머니, 동생까지 살해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살인·강도·방화·성폭력과 같은 흉악 범죄는 3만 5066건. 이 가운데 남성 피해자는 3527건으로 전체의 10% 정도에 그친 반면 피해자가 여성인 사건은 2만 9304건으로 전체의 80%를 웃돌았다. 6.4%는 피해자의 성별이 확인되지 않았다.
교제 폭력(가해자가 연인이거나 헤어진 연인)은 연간 7000건씩 발생한다. 경찰청의 2011~2015년 통계에 따르면 교제 폭력으로 살해당한 사람은 645명이며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여성들은 길에서 스쳐 가는 사람이 무섭다는 말을 흔히 하고 더러 남자 친구도 무섭다는 말을 한다.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자장치 부착명령이 기각된 32건의 교제살인 사건 가운데에는 피해자를 21차례 찔러 사망케 한 사건도 있었다.
한승호
여성에게 일상이 된 공포와 여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여성 혐오 사회임을 방증한다. '여성이 안전할 수 없다'는 메시지는 여성의 행동반경을 제약한다. 그렇다고 범죄를 모면하려고 여성이라는 속성을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에 쉽게 노출되고, 안전해지기 위해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여성은 무력감을 느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는, 세라 에버라드 사건에 관한 런던 경찰의 브리핑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듯 '다음은 네 차례가 될 수도 있어'라는 공포의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산출한다. 여성을 무력화하고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여성 혐오에 기반한 가부장제는 스스로를 지켜내게 된다.
글
- 송하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넘치는 열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체력 탓에 고생이지만 이마저도 즐기면서 살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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