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지촌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지역 보건소에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안정리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 여성의 보건증이다.
햇살사회복지회
정부가 기지촌 여성 관리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미군 주둔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안보 문제에 윤활유를 뿌리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외화를 벌기 위해서였다.
기지촌 여성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중요한 경제적 도구였다. 1964년 한국의 외화 수입이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했는데, 같은 해 미군 전용 클럽은 그 10분 1가량인 97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69년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 지역 미군 전용 클럽 200여 개를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만 연간 6백만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클럽들은 1963년 개정된 관광진흥법에 따라 '특수관광 시설업체'로 지정되었으며, 면세 주류를 합법적으로 공급받았다. 그 대가로 정부는 클럽이 얻는 이익의 일부를 가져갔다. 캐서린 문 미국 웰슬리(Wellesley)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1960년대 '기지촌 산업'은 한국 GNP(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했으며, 성 산업이 그중 절반을 차지했다고 추정했다.
아예 국가가 적극적으로 포주처럼 나선 '아메리카타운'('실버타운'으로도 불렸다) 같은 사례도 있었다. 군산 미군기지 인근에 있는 아메리카타운은 포주가 50%, 나머지 50%를 정부가 새마을 사업 명목으로 투자한 주식회사 형태였다. 방마다 번호가 붙은 '닭장 집'에 기지촌 여성을 집단 수용하고, 주위에 담을 둘러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곳이었다.
그나마 일반인과 같은 곳에서 거주하거나 기지촌 내 상권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포주집 소속 여성과 달리 아메리카타운 내 여성은 경비까지 갖춘 삼엄한 통제 속에서 감금되었다. 정부가 직접 '여자 파는 회사'를 세운 것이다.
기지촌 여성을 안보와 경제의 도구로 대한 정부의 태도는 기지촌에서 열린 정기 강연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미군 위안부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든 위안부를 지역 재건부녀회에 가입하게 했다. 이후 이 모임은 기지촌 여성들의 '자치회'로 이어졌다. 자치회는 명목상으로 기지촌 여성이 구성한 기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와 미군, 포주가 운영하는 조직이었다.
자치회가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열 때마다 각 클럽은 무조건 고용 여성을 참석시켜야 했다. CID(미군 범죄수사대), 미군 헌병, 보건소 직원, 경찰서 서장, 군청 공무원 등이 강연에 참여했고 이들 중에 누군가가 연사를 맡았다. 핵심 주제는 성병 관리, 국가 안보 그리고 애국이었다. 기지촌 여성은 이 순간만 '외화를 버는 애국자', 심지어는 '민간 외교관'으로도 호명되었다.
"흠흠, 에,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삼인, 2005, 123쪽)
미군을 위해 살리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거나
이렇듯 한국 정부는 기지촌 여성의 성 서비스를 한미동맹과 국가 경제에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해 각종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 개인의 '안보'는 국가의 보장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미군 접대를 위한 도구로 관심을 받았을 뿐, 인권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정부는 특히 성병 관리 차원에서 이들을 매우 강압적으로 대했다. 기지촌마다 설치된 성병 진료소에서는 매주 정기적인 검사가 행해졌다. 성병 검사를 통과해야 발급되는 보건증이 기지촌 여성에게는 성매매 허가증이자 곧 주민등록증 역할을 했다. 금이가 죽었을 때, 그의 신원을 확인해준 것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평택 보건소가 발급한 보건증이었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보건증을 지녔는지를 검문하는 '토벌'을 실시하기도 했다. '합동 토벌'에는 한국측 관계자 외에 미군이 참여했으며, 심지어 미군이 독자적으로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만일 검문 중에 보건증을 제시하지 못하는 여성은 유치장으로 끌려가거나, 벌금을 내거나, 성병 관리소(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 정부와 미군은 서로 협력하여 기지촌 여성을 관리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성병의 '치료'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정부는 성병 환자를 강제 치료를 위한 격리 대상자에 포함했다. 성병 검진에서 보균자로 진단받거나 보건증 없이 성매매를 한 여성은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는 '몽키하우스'라는 은어로 불렸다. 본래는 매음굴을 의미하는 영어 속어지만 기지촌 여성에게는 "수용소 생활이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처럼 느껴진다"라는 의미였다. 이곳에 들어가면 보균 검사에서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픈 페니실린 주사를 맞아야 했다.
증언에 따르면 수용소는 이름만 성병 관리소일 뿐, 정신병동이나 구치소와 다름없었다. 병동 시설은 제대로 난방이 되지 않았고 건물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감시를 받았다. 치료 또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페니실린 주사의 쇼크 때문이었다. 쇼크가 오면 귀울림, 호흡곤란, 발한이 일어나거나 심하면 죽기도 했다.
쇼크 발생 증가로 의사가 페니실린 사용을 피하자 1978년 보건복지부는 법무부에 공식 문서를 보냈다. 사전에 페니실린 과민성 반응 검사를 한 경우 '국가 성병 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의사를 면책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볼 때 성병 통제는 기지촌 여성의 생명보다 명확히 우위에 있었다.
공권력인 경찰도 기지촌 여성의 안전망은 아니었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의 상해나 죽음보다 오프리미트(off limit)를 두려워했다. 오프리미트는 기지촌에서 미군 관련 사고가 발생했을 때 미군을 보호하기 위해 특정 지역에 미군의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이다.
이런 조치가 내려지면 기지촌의 상권이 죽기 때문에, 포주들과 범죄조직, 상인, 공무원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는 해당 지역에서 일어나는 미군 범죄를 은폐하거나 범죄를 밝히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미군이 아닌 포주 등의 한국인이 기지촌 여성에게 폭력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은폐되었다.
최후의 안전망인 법조차 이들에게 불리했다. 미국은 한국과 1966년 7월 SOFA라고도 불리는 한미행정협정(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의 사법 권한은 크게 제한되었다. 한국인 대상 미군 범죄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 사태가 불가피했다. 미군과 가장 가까운 민간인인 기지촌 여성은 특히나 폭력의 위험에 상시 노출되었다.
죽어서야 '조국의 품'으로 소환된 윤금이

▲고 윤금이씨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1992년 10월 28일 윤금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을 알린 사람은 기지촌 여성이었다. 경찰에 접수된 사건신고서에는 최초 발견자인 셋집 주인이 신고자로 등록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지촌 자치회의 한 여성이 주인의 이름을 빌려 신고한 것이었다. 기지촌 여성이 신고하면 사건이 묻힐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는 곧 기지촌 여성 쉼터에 이 사실을 알려 다른 쉼터 모임 등에 이 소식이 퍼져나가도록 했다.
사건을 담당한 의정부경찰서는 피의자 신문 조서 등 기초조사도 하지 않고 마클을 바로 CID로 인도했다. 주한미군 피의자를 체포했을 때 한국 경찰이 행사할 수 있는 초동 수사권을 포기한 것이다.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기지촌 여성들과 동두천 사람들이었다. 동두천의 기지촌 연대 모임과 시민 모임이 사건을 적극 여론화하여 48개의 단체가 참여하는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가 꾸려졌다.
공대위는 재판마다 몇백 명이 넘는 방청객을 조직하고, 사건 발생 후 5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었다. 동두천시의 택시 기사들은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상인들은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을 벌였다.
집회와 모임에서 사람들은 '우리의 딸' 금이가 처참하게 살해된 데 울분을 토했으며, '누이의 주검이 민족의 가슴에 던지고 간 한과 분노의 씨앗'을 곱씹었다. 1년 반에 걸친 기다림 끝에 가해자 케네스 마클은 1994년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차 공판이 끝난 후 미군 범죄에 대처할 상설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공대위는 '주한미군 범죄근절 운동본부'로 전환되었다. 그 이전에도 미군 범죄가 알려져 있었지만 미군 범죄라는 하나의 신조어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92년 윤금이 사건 이후다. 이로써 금이의 죽음은 미군 범죄를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정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마지막 방점은 금이가 죽고 나서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주목받은 데 있다. 그마저도 그가 '기지촌 여성'으로서 당한 착취나 인권침해는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윤금이 추모제에서는 해당 사건에 관한 것보다 양키 반대, 쌀 수입 반대, 미군 철수라는 구호가 주였다.
금이 사건 이후에도 많은 기지촌 여성(이기순·정종자·차혜선·허주연 등)이 미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여성이 기지촌에서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포주집에 갇혀 살아갔다.
금이의 죽음 25년 후인 2017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지촌 여성 57명을 대상으로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수용한 행위는 위법하며, 국가의 일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8년 2월 서울고등법원은 같은 사건의 2심에서 "국가의 기지촌 운영, 관리 과정에서 기지촌 위안부들을 상대로 성매매 중간 매개 및 방조, 성매매 정당화 조장 행위와 위법한 강제격리 수용행위가 있었다"라고 인정했다.
국가가 기지촌 운영에 관여했으며, 기지촌 위안부를 대상으로 부당하고 강제적인 여러 조치가 있었고 이것들이 위법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3년째 보류 중이다.
금이를 살해한 주한미군 제2사단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은 한국에서 재판을 받았다.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94년 5월 17일 천안소년교도소 외국인 수용사동에 수감됐다. 마클은 잔여 형기를 1년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됐으며, 가석방 다음 날 곧장 미국으로 출국했다. 금이를 살해한 1992년에 마클이 스무 살이었으니, 그는 지금 미국 땅에서 아마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정에 출두한 케네스 마클 이병
동두천시민연대
글
- 송휘수: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어렵고 머리 아프지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신다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 황경서 :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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