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종점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버스 안내양의 적은 보수는 그들 안에서 소위 말하는 '삥땅'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저는 올해 19세인 여차장입니다. 저는 18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노동에 허덕이고 있습니다만 굳세게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을 저는 일하는 날 얻어지는 300원씩의 부수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희들 세계에서는 '삥땅'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매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만 그 '삥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 저는 영원히 교회와 등져야 합니까? 저는 정말 죄인입니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느 버스 안내양의 편지 한 통을 계기로 1970년 4월 28일 기독교계와 한국노사문제연구소는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고작 1만 800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이마저도 식대나 각종 잡부금을 제외하면 겨우 6000원 내외를 실질적인 임금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쌀 한 가마의 값이 6만 320원이었다. 월급 6개월 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야 겨우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조금씩 돈을 숨겼고 그 부수입에 의존해 가까스로 그들의 삶을 영위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누구나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버스 회사는 '삥땅'을 빌미로 버스 안내양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버스 안내양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도, 또래 여학생에게 느끼는 열등감도,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추근거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삥땅'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한 가혹행위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직접 승객에게 버스비를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날 번 돈을 입금실에 넣고 수입과 지출을 적은 일보를 차주에게 갖다 주는 모든 일은 버스 안내양의 몫이었다. 승차 감시원의 승객 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 사이에 차이가 나면 그 차액을 버스 안내양의 월급에서 차감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심지어는 돈을 숨겼다며 알몸 수색을 하기도 했다.
1966년 10월 19일 동화여객 소속 버스 안내양 권희진은 합숙소 사감으로부터 몸을 수색당했다. 이때 현금 200원이 나왔고 회사는 이를 희진이 훔친 돈으로 여겨 심한 욕설과 매질을 했다. 이튿날 오후 3시 희진은 승객을 태워 시청으로 가던 중 노량진 버스 정류장에서 도망쳐 나와 한강에 투신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1978년 10월 13일 삼화상운 버스 안내양 강미숙은 오전 8시경 버스를 타고 근무하던 중 서울시경(서울지방경찰청) 앞 정류장에서 음독 자살을 시도했다. 미숙이 자살시도 전에 가족에게 남긴 쪽지에는 회사 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입금액이 적다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이에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숙은 자살을 시도하기 이틀 전에도 회사 측으로부터 입금액이 적다며 꾸중을 듣고 몸수색을 당했다.
미숙의 동료 안내양들에 따르면 삼화상운은 매일 일과가 끝난 뒤 안내양을 몸수색해왔으며 심지어 운행 도중에도 입금액이 예상보다 적으면 여사감이 방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했다. 자살 기도 6일 만인 10월 19일 미숙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일상적 몸수색은 당시 사회 문제로까지 번질 만큼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폭력이었다. 전체 버스 안내양 중 한 명이라도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모든 버스 안내양이 도둑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회사는 도둑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형사를 동원하기도 했다. 1966년 8월 1일 버스 요금이 회수권 제도로 바뀌자 버스 회사들은 버스 안내양의 호주머니를 찢어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못하게 만들었다.
1977년 1월 부산 연산동 대창운수 버스 안내양 기숙사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2평짜리 방에 9명이 모여 살았는데 입구 쪽 난로에 붙은 불이 번졌다. 뒤쪽에 큰 창문이 있었지만 쇠창살이 박혀 있어 탈출할 수 없었다. 기숙사의 창문을 '삥땅'의 통로로 여겨 철책으로 막아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 화재로 버스 안내양 5명이 숨졌다.
저항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사업조합에서 실시한 버스 안내양 교육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이러한 노동 환경 탓에 버스 안내양들은 다른 직종의 여성 노동자들보다 일찍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1964년 1월 16일 새벽 2시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있는 삼양여객 소속 버스 안내양 74명이 합숙소를 집단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 매질을 일삼는 감독을 해고할 것 ▲ 하루 18시간 노동에 일급 50원을 인상할 것 ▲ 급식을 충분히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러한 요구에 폭력으로 응수했다.
1966년 7월 5일에는 서울승합 오류지점 소속 버스 안내양 27명이 임금 인상과 합숙소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홍성원의 소설 <흔들리는 땅>에서는 부당한 몸수색과 인권유린에 맞서 투신한 버스 안내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걔가 왜 지붕에서 뛰었지? 독해설까, 얼간이였기 때문일까? (…) 남숙이 내건 요구 사항이라는 것들도 그녀가 처음으로 내건 것은 아니다. 몸 뒤짐이 있고, 임금이 낮고, 일이 고되다는 것은 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 그러나 그것이 시정되지 않을 것도 백번 뻔한 일인 것이다.
처음 버스 안내양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버스가 이전보다 훨씬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가 될 것이며 유니폼을 깔끔하게 입은 안내원 때문에 청결함마저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61년 이 제도를 시행할 때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어린 여성을 버스 안내양으로 두어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공공연한 의도가 들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사회가 버스 안내양에게 '여성으로서' 고정된 성 역할을 기대하고 투영한 것을 의미한다.
1974년 YWCA가 공모한 근로 여성 생활수기에서 특등을 수상한 이명화 버스 안내양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야! 너거 차 몇 호고? 니 이름 뭐꼬, 건방지구나야. (중략) 손님이라 친절하게 그 손님 시키는 대로 운전수의 담배를 하나 얻어서 성냥과 같이 갖다 드렸습니다. (…) 손님, 요금 주이소. 이 가시나가 뭐라카노. 아까 전에 차비 안 주더나. 눈깔이 빠짓나? (…) 순간 나의 뺨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나며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1966년 7월 6일 자 조선일보에서는 버스 안내양이 처우 개선을 위해 파업한 사건을 두고 '여차장들 태업소동'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발행했다. 기사에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합숙소를 뛰쳐나오는 등 4시간 동안 법석을 떨었다"라고 적혀 있다. 버스 안내양이 정당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당시 인식의 반영이다. 이러한 인식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은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을 하기에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의사로부터 이것이 근거 없는 소문임을 확인받기까지 일반 시민뿐 아니라 버스 안내양 자신도 믿었던 소문이었다.
또한 운전사가 버스 안내양을 '하나씩 데리고 산다'는 소문과 버스 안내양은 성매매 현장으로 가기 쉽다는 낭설이 퍼졌고, 몸수색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피해자인 버스 안내양을 오히려 성적으로 타락한 대상으로 보기도 했다. 승객의 추행은 일상이었으며 운전수가 버스 안내양을 따로 호텔로 불러 성폭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1981년에 시민자율 버스가 도입되어 시범 운행되고 1983년부터 점차적으로 운행이 확대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하차 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생기면서 버스 안내양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의 해당 조항이 1990년 4월 삭제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젊은 세대는 버스 안내양이란 직업 자체를 모른다. 현대사에 20여 년 존재한 버스 안내양이란 직업은 어떤 흔적을 남겼고 어떤 의미로 기록될까. 그들의 가여운 존재가 기억될 수나 있을까.
글
- 황경서 :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 있다.
- 박서윤 :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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