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결혼식의 주례 거부 해프닝(동아일보, 1925.5.19.)
원산 시절 웃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1925년 5월 12일자 동아일보에 그의 장남 태화(泰華)의 결혼식 예고기사가 실렸다. 주례는 남감리교회 미국인 장로사, 결혼식 장소는 그가 시무하던 남촌동 교회.
결혼식은 이날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정각이 되도록 집례 목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신부의 집에서 술장사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인 장로사는 신성한 목사의 아들이 그런 집안 딸과 결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집례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이러니 조선인 목사들도 전부 사양하였다. 할 수 없이 그가 아들 결혼식 집례를 해야만 했다.(동아일보, 1925.5.19.)
철원 시절에는 유임 청원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29년 9월 그는 철원읍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1년이 되자 연회에서 타 지역으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신석구 목사 유임운동을 펼쳤다. 부임 1년 만에 교인을 배 이상으로 늘린 이런 좋은 목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인 80여 명은 연서하여 양주삼 연회장과 정춘수 철원지방 장로사에게 신 목사 유임 청원을 하였다.(동아일보, 1930.10.12.)
목회 활동 이외에 간간히 대외활동도 하였다. 철원 구역장 시절 철원소비조합 창립(1930.9) 때 이사로 참여했다. 그 무렵부터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브나로드운동, 즉 농촌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이천학우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자 그는 교회 아래층을 강의실로 제공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틈나는 대로 청년단체 같은 곳에 가서 전도활동과 함께 애국 강연을 하였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 사람을 일본인화 시키기 위해 일본어 상용(常用),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을 잇따라 강요하였다.
친일로 변질된 감리교단 지도부 역시 신사참배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안지방 감리사로 있던 신석구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목사이자 민족지사였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불경죄로 1938년 7월 천안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등창을 얻어 구금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출옥 후 그는 멀리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갔다. 1939년 5월에 진남포 지방 산유리 교회로 파송을 받아갔다. 이 교회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평남 용강군 양곡면 산유리에 속했다. 그러나 진남포에서 불과 5Km 정도 떨어져 사실상 진남포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전국에서 일본 신사가 없는 유일한 마을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역을 치른 그로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전쟁에 광분한 뒤로는 이런 시골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예비검속했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둔 1945년 5월에는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구금하였다. 그는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북한정권과 갈등... 총살로 생 마감
1945년 8.15 해방으로 일제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의 고난의 역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토가 두 동강이 나면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그는 월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북한에 남았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세력과 기독교 세력과의 갈등은 이미 예견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1946년 3월 1일 평양방송에서 행한 3.1절 기념방송이 문제가 됐다. 북한당국은 3.1혁명은 공산당이 영도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내용의 원고를 주면서 남한정권을 비방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방송에서 원고의 내용을 반박하고 북한정권을 비판했다. 이듬해 3월 1일 진남포 도립극장에서 열린 기념강연에서도 그는 비슷한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 일로 그는 두 차례나 정치보위부에 연행됐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1946년 6월 15일 그는 돌연 북한 당국에 검거되었다. 당시 기독교감리회 서부연회장으로 있으면서 그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민주당이 북한 인민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또 평안남도 광양만(廣梁灣)교회 시절에는 그들이 주는 3.1절 공로 표창장을 거부하고 용공적인 감상문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붙잡아갔다.
결정적인 사건은 1949년 4월 19일의 소위 '진남포 4·19사건'이다. 당시 진남포에서는 기독교 목사들이 주축이 돼 '맹호단(猛虎團)'을 결성해 공산정권에 반대투쟁을 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이날 새벽 3시 진남포 문애리 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그에게 평남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들어 10년형으로 감형시켰다. 당시 최고재판소의 재판장은 국어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이었다.
평양형무소 수감 중 이듬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연합군의 참전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평양을 버리고 떠나던 북한군은 이때 형무소 수감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1950년 10월 10일 신석구는 평양교외 비류(沸流)강변에서 총살로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그는 돈독한 신앙심으로 절조를 지킨 지사적 종교인이었다.
▲신석구 동상(청주 삼일공원)
33인유족회
1963년 정부는 고인에게 국민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2년에 서훈을 받은 다른 동지들보다는 1년이 늦다. 이는 그가 해방 후 북한 땅에 남은 것이 한 원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1968년 9월 정부는 신석구를 비롯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 등 독립운동가 18명을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했다.
그가 졸업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는 1978년 그를 포함해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2년 뒤에는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신석구', 1996.3
- 이덕주, <신석구>, 신앙과지성사, 2013
- 김승태, <신석구 : 자유 독립을 위한 밀알>, 역사공간, 2015
- 유준기, '3.1운동과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활동 : 양전백·신석구를 중심으로', <총신대논총> 제25집, 2006.2
- 백병권, '신석구 목사의 생애와 민족운동 연구', 목원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2
- 허돈, '은재 신석구 목사의 민족의식 재고찰 : 3.1 독립민세운동을 중심으로', 협성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8
- 조혁연,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신석구', 충북일보, 2015.3.15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충북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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