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만동포 현지조사 관련보도(조선신문, 1928.2.9.)
이 무렵 그가 중점을 둔 사안은 재만(在滿)동포 구호사업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상당수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 새 둥지를 튼 이들은 현지의 중국인 관리와 지주들의 착취와 부당한 박해에 시달렸다. 1927년 한 해만도 주거권 박탈 94건, 소작권 박탈 14건, 불법징세 14건, 이주허가증 박탈 7건, 강제입적 및 풍속변경 42건, 아동교육 방해 6건, 불법체포 및 불법과료 3건 등 총 181회의 피해사례가 보고되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각계대표 백여 명은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민세 안재홍, 중앙상무위원은 박동완 외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옹호동맹은 1927년 12월 1차로 성명서를 낸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현지에 실태조사반을 보내기로 했다. 상무위원으로 있던 박동완과 이도원(李圖遠) 등 두 사람은 1928년 1월 17일 만주 봉천으로 특파되었다. 이들은 3주일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2월 7일 서울로 돌아왔다.(동아일보, 1928.2.8.) 귀국 후 이들은 보고회를 통해 참상을 알리는 한편 중국 입적(入籍)문제 해결 및 구호금 모금 등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박동완은 일제의 주목을 끌게 됐고, 감시는 더욱 강화되었다.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을 하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때 선이 닿은 사람은 하와이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던 감리교의 민찬호·임두화 목사였다. 이들의 초청으로 박동완은 1928년 8월 25일 하와이로 떠났다. 박동완은 두 사람의 도움으로 하와이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K.C.C.)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1930년 3월 '하와이 한인협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하와이로 망명... 한글학교 운영
박동완은 목회활동 외에도 교회에 부설 한글학교를 세워 교민 2세들에게 한국의 역사, 문화 등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1년 후 그의 한글학교를 하와이 오하우 섬에서 가장 큰 한글학교로 발전시켰다. 실제로 그의 교육을 받은 한글학교 학생들은 대학 진학률이 높았으며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엇보다 후대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한편 그는 1930년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환경으로 뇌경색에 걸리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고국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교인들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 보냈다. 1931년에는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일시 귀국하였다. 6월~9월까지 석 달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YMCA 회관 등지에서 하와이 동포의 근황과 신앙생활을 알리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34년 7월 박동완은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신생명>이 폐간된 지 꼭 10년 만이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그는 "1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려고 붓대를 잡으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교차한다"며 소회의 일단을 피력하였다. 그는 또 한인기독교회 이사를 맡아 교민사회의 단합을 위해서도 힘썼다.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는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뉘어 갈등이 심했다.
1938년 8월 오랜 동안 대립관계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으로 제28주년 국치기념대회를 거행했다. 이때 그는 주(主) 연사로 나서는 등 양측의 통합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애썼다. 하와이 시절 그는 정치운동보다는 기독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교민들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1941년 초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됐다. 이승만 정권 때 주미대사를 지낸 양유찬 박사의 개인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그해 2월 23일 결국 타계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장례는 3월 1일 오후 하와이에서 각 단체 연합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박동완 부음기사(신한민보, 1941.3.27.)
그의 부음 소식은 하와이 교인언론인 <신한민보>와 <태평양주보>에만 실렸다. 국내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다. 일제의 방해로 국내에서는 부고조차 실을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한 달 뒤 가족들이 국내로 모셔와 3.1혁명 동지인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고, 1966년 묘소를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3.1혁명 이후로 그는 한복을 입었으나 바지에 대님을 매지 않았다.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는 대님을 매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또 평소 시계를 항상 30분을 늦춰 놓았다. 이는 일제가 정한 표준시각에 맞춰 살지 않겠다는 신념의 표시였다고 한다. 그는 비타협적 자세로 민족 구원의 외길을 걸은 종교인, 언론인이자 불굴의 독립지사였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박동완', 2008.12
- 황민호, '박동완의 국내 민족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8
- 임미선,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운동 연구',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6
- 박재상, '민족대표 근곡 박동완의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12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조선신문, 신한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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