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작> 포스터
사나이픽처스
'욕하다가 닮는다'라는 말이 있다. 남한과 북한은 체제와 이념, 사상과 문화까지 무엇 하나 겹치는 게 없을 정도로 다를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이 비슷하다. 특히 최고 권력자의 통치 및 정치 운영 방식이 정말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남과 북은 서로를 매우 적대하고 증오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서로를 매우 필요로 하고 상대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까지 쓰인다.
2018년 상영된 영화 <공작>은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선거에서 이기려는 한국의 보수 정부가 휴전선 근처의 군사적 소동을 북한에 부탁하고 북한도 그 대가로 금전거래를 요구한다는 설정이다. 이는 영화상 허구가 아니라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북풍'이니 '총풍'이니 하는 이름으로 확인되었던 사실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또 하나의 볼거리는 김정일을 연기한 배우가 얼굴, 이미지, 목소리, 행동거지까지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우보다 더 닮아있는 것이 남북의 정치와 신화다.
나라 세운 '국조' 신화로 뒤덮인 이승만과 김일성
처음은 항상 특별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라의 창건자나 지도자는 늘 특별하게 그려졌다. 한민족 첫 시조인 단군의 신화, 고구려 주몽과 신라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 조선 태조 이성계를 기리는 용비어천가 등이 대표적이다.
남과 북은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적대적으로 시작했으니 개국 지도자는 특별한 신화로 채색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첫 대통령으로 12년이라는 긴 기간을 통치한 이승만의 신화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로 시작한다.
같은 독립운동가라 해도 김구, 김규식, 안창호 등 누구와도 다르다. 영어가 능통한 미국 정치학과 철학박사로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인물과 친해 대한민국을 미국 닮은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가 아무리 많아도 나라를 세운 것은 국부(國父) 이승만이고 그에 대한 예우로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김일성 신화는 한술 더 떴다. 축지법을 쓰고 일본과의 전쟁에서 솔방울로 폭탄을 만들었으며 굶주린 백성을 위해 모래로 쌀을 만들어 먹였다거나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해 김일성만 나타나면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칭송은 높았다는 식이다. 북한에서 독립운동사나 사회주의 운동사는 모두 김일성 중심으로 정리되었다. 그의 항일투쟁은 사실이지만 과대포장 됐다.
이러한 '국조'의 화려한 권위를 바탕으로 이승만이 남한에서,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들어 놓은 권위주의 정권과 대결적 분단체제는 이후 70여 년의 현대 한반도를 결정지으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한반도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기초 지은 원조다.
유신독재와 세습 독재 뿌리내린 박정희와 김일성
이승만과 김일성이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체제를 만들어 냈던 지도자라면 박정희와 김일성은 외세의 보호막을 벗고 그보다 오랜 세월을 유일무이한 독재자로 군림하며 분단체제를 굳힌 지도자다. 또, 이승만과 김일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에 대해 적대로 일관했다면 박정희와 김일성은 국내 정치를 위해 상대 체제를 적절히 이용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때가 격변기였던 1972년이다. 그 무렵 발목 잡힌 베트남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미국은 소련과 분쟁 중이던 중국(당시 사회주의 중공)과 돌연 수교를 하며 미군 철수 분위기까지 보였다. 지금껏 체제의 맏형들만 철석같이 믿었던 남북은 갑자기 자력 방어에 내몰리게 된다. 동병상련을 끌어안은 박정희와 김일성은 비밀 특사를 오고 가게 하더니 적십자 대표단이 공개적으로 오가고 마침내 7.4 남북성명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함께 발표한다.
한순간에 평화와 공존이 일어나고 통일도 머지않은 것처럼 온 겨레를 설레게 했다. 그러나 남북 수뇌부에게는 물밑에서 이미 다른 생각이 작동하고 있었다. 남한 정부는 통일과 안보를 위해 헌정질서를 정지한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다는 발표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고 주요 인사를 체포하면서 7년의 유신독재로 들어갔다.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채택하면서 수상이던 김일성을 넘볼 수 없는 최고 존엄인 주석에 앉히며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습 독재를 굳혔다. 남과 북이 마치 전체 시나리오와 시점까지 미리 각색한 것처럼 놀라운 적대적 공생이었다.
지도자 앞에서 수첩에 받아적는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