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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부시장> 어느 현역 공무원이 자서전 형식의 도서를 출판했다.
 <수상한 부시장> 어느 현역 공무원이 자서전 형식의 도서를 출판했다.
ⓒ 가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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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참 너무 유복하게 살았구나!"

책 뒷 표지를 덮은 느낌을 그렇게 정리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졸업 후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콤플렉스는 수치심을 넘어 스스로 비굴해지기까지 했다. 

나이를 먹어 중졸,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과정은 나와 비슷했다.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9급 공무원시험에 이어 7급 공채 합격 등 안전행정부(과거 내무부) 전입, 화천군 부군수, 강원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 원주시 부군수라는 직책에 오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현 원주시 부시장 최광철 씨의 이야기다. 그가 책을 냈다. 책은 처절하게 가난했던 이야기로 시작된다. 숨김이나 꾸밈도 없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기법이 다소 서툰 부분도 있다. 요즘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대필이 아님을 증명한다. 틈나는 대로 메모지 혹은 블로그를 통해 표현했던 글들을 종이에 옮긴 거란다. 그의 숨 가쁘게 살아온 거친 숨결이 그대로 묻어있다.

<수상한 부시장>. 그가 쓴 책의 제목이다. 수상한 삼형제, 수상한 가정부, 수상한 흥신소 등 '수상한'을 수식어를 담은 작품이 흔하다. 그런데 굳이 왜 스스로를 수상하다고 표현했을까. 책장을 넘기는 내내 궁금했다. 답은 책 표지를 덮은 후 알았다.

자전거에 미친 그는 전국일주를 넘어 대륙 등 유럽 여러 나라를 계획하고 있단다. 60이 다된 나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통기타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대체 그의 도전은 어디까지인지 그것이 수상하다.

무조건 내 잘못이다? 과연 옳은 일일까

춘계성 결막염. 그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자신의 병명을 알았다. 고치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도화지에 자신의 얼굴을 커다랗게 그렸다. 눈을 유독 크게 그리고, 그것을 벽에 붙여놓았다. 굵은 물푸레나무를 휘어 실을 감아 활을 만들었다. 그러곤 서너 발 뒤로 물러나 자신의 눈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렇게 하면 눈이 고쳐진다는 민간요법을 믿었다. (눈의 치료를 위해) 용돈을 모아 무당집도 찾았다. 자신의 불편함을 부모님께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고쳐줄 형편이 되지 못하다는 걸 어린나이에 알았다.

"주위 사람들은 나한테 눈병이 전염될까봐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다. 나도 사람들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본문 91쪽)

오후만 되면 발갛게 충혈 되는 눈. 사람들은 전염성 강한 눈병이라고 생각했다. 눈의 통증 때문에 남들처럼 오랜 시간 글을 볼 수도 없었다. 안약을 눈에 넣으면 한 두 시간 더 책을 볼 수 있었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진 못했다. 운명으로 여겼다. 그런 그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란 학력 덕분(?)에 방위병 근무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단다.

1994년, 부천세금비리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기자들은 당시 내무과 감사담당인 그는 안중에도 없었다. 관심은 오직 그 사실을 장관이 알고 있었느냐는 거였다. 보고를 했다면 장관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그는 이 사건에서 홀가분해 질수 있다. 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직무유기에 대한 징계를 감수해야 한다.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이기에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그 상황에서 '보고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랬구나!'라고 생각이 들 즈음, 책 뒤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후 잊을 만 하면 가끔 질문을 받는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이제 말줄임표(.....)로 대신했다.

많게 보이기 위해 흙더미 위에 쥐들을 덮었다

"두 뼘 마루에 열 평 남짓한 우리 집 초가지붕은 해를 넘겨 시커먼 이엉이 여기저기 함몰됐고, 흙벽은 기대면 무너질 듯 군데군데 푹 파여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이 처마 밑까지 쌓여 사립문을 열 수가 없었다. 구들장은 식어 냉골이었고, 콧등이 시려 이불을 당겨 덮으면 발가락이 시렸다. 나는 새벽이면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본문 15쪽)

아마 50대 이후의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공감할 이야기다. 당시 시골마을 땔감은 나무였다. 보일러란 단어조차 듣지 못했다. 도회지 좀 산다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연탄'이란 게 있다는 정도만 알았다. 그것이 흰색인지 검은색인지도 관심을 갖을 여유도 없었다.

시골마을 앞산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여름철 한껏 자란 나무는 모두 겨울철 땔감용이었다. 나무며 풀들이 자랄 틈이 없었다.

넓적한 돌 위에 진흙은 바른 구들은 따스함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벽이면 구들 특유의 냉기를 토해냈다.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느니 부엌으로 나가 구들을 덥히는 게 더 편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2년간 놀았다. 어떻게 시온중학교를 알게 됐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입학금이 없고, 수업료가 적으며, 누구나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 명칭은 중학교지만 학력을 인정하는 정규과정은 아니었다." (본문 27쪽)

당시 시골엔 재건중학교라는 것이 있었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였다. 대부분 다 쓰러져가는 창고를 임대해 운영했다. 선생님 한명이 국어도 가르치고 영어, 수학도 가르쳤다.

선생님은 직업이 아닌 일종의 재능기부였던 셈이다. 변변치 못한 배움이었지만, 내 열일곱 나이에 공부를 하겠다는 용기를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관련기사).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발판으로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과정)전수학교를 다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환경. 3학년을 졸업해도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하는 학교였다. 당시 기업체에선 시골출신 공원모집을 위해 학교를 미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위병 전출입을 담당하는 김 중사는 나에게 잠깐 막사 뒤로 따라 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얼마냐고 물으니 10만 원이라며 저녁 7시에 원주시내 군인극장 옆 별다방 2층으로 가져오라고 했다. 이모 댁에서 겨우 5만원을 빌렸다. 김 중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내일 아침 집 앞 육군항공대로 출근하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갔더니 내 노란 병적기록카드가 그 곳에 도착해 있었다." (본문 49쪽)

70년대 이야기다. 사실 당시엔 돈이면 뭐든 되는 세상이었다. 방위병인 그는 집에서 4km떨어진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것보다 집 앞의 육군 항공대 근무를 원했다. 그 대가는 10만원이었다. 가치로 따졌을 때 지금의 100만 원 정도는 될 듯하다. 그로인해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는 되었다. 초병으로 근무하며 짬짬이 수학공식, 영어단어를 외웠다. 제대 후 공직자가 되는 계기가 됐다.

"내가 공무원이 되고자 했던 건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 봉사하고 공리민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국민에 봉사는 차치하고 내 코가 석자였다. 공리민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본문 52쪽)

공무원의 신조. 당시 신규직원들은 업무파악보다 이것부터 딸딸 암기해야 했다. 그래야 똑똑한 직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은 어떤가, 신규직원들에게 '왜 공무원의 길을 택했냐?'고 물으면 '인기직종이잖아요' 내지는 '땡 하면 출퇴근 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것보다 보수는 적지만, 스트레스는 덜할 거 같아서죠.' 참 솔직한 대답이다. 그러나 당시 공무원시험 응시생들에게는 그것은 생계수단이었다. 그나마 밥은 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짤리지 않으려면 앵무새처럼 '공무원의 신조'를 외워야 했다.

"새벽에 개들이 컹컹 짖어 댔다. 쥐약을 먹고 죽은 쥐를 먹은 개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소리였다. 쥐잡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날 중앙뉴스엔 1233만5277마리의 쥐를 잡았다고 보도했다.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집계를 낼 수 있을까. 전국 읍면동에서 잡은 쥐의 숫자를 보고했기 때문이다. 도청에선 증빙 사진자료를 요구했다.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흙을 두툼하게 쌓아놓고 거기에 죽은 쥐를 덮어 사진을 찍었다. 부풀려 보고한 숫자에 맞추어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본문 56쪽)

행정은 탁상이 아닌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화천군 부군수 시절
 화천군 부군수 시절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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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지금의 안전행정부) 지방재정 총괄팀장으로 근무하다가 2008년 1월1일 강원도 화천군 부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영전이었다. 20년만의 귀향이었다. 1997년 문막면 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원성군청, 강원도청, 내무부로 이어진 공직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본문 137쪽)

화천군 부군수 3년 동안 그는 무수히 많은 일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국비 확보 등 중앙부처에 근무했었다는 경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예산확보를 위해 안전행정부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와 미팅도 주선해 주었다. 그는 특별히 인구증가 시책에 관심이 많았다. 인구 한 명당 교부세 증가액은 50만 원 정도 된다. 아무나 붙들고 '화천으로 이사를 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

군부대 부사관들은 대부분 결혼을 한 사람들이다. 출퇴근 편의를 위해 지역에 거주하지만, 주소는 자신의 고향 또는 인근 시로 되어있다. 간담회를 열어 교부세 제도를 설명하고 주소이전을 부탁했다. 모두 공감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없었다. 전입 신고서를 직접 들고 군부대를 찾아 도장을 받아냈다. 그렇게 하길 3년. 2천여 명의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계산상 한해 10억 원의 교부세를 증가시킨 셈이다.  

이후 그는 강원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을 거쳐 2013년 7월 1일 원주시 부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36년 만의 귀향이다.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 출신 초등학교 졸업 청년이 부시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후배 공무원들에게 글을 남기고 싶었단다. 그래서 자신의 과오도 여과 없이 기록했다고 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하급직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예의와 관리자가 직원을 섬기는 방법도 제시했다.

과거 공무원시험 또는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겐 합격수기집인 <어머니, 아직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이란 책은 필독서였다. 흔들릴 때 자신을 바로 잡아 주는 지침서였다. 방황할 때 마음을 다잡는 구실도 했다.

<수상한 부시장>,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그리고 전국 모든 공무원들이 한번쯤 일독하길 권한다. 또 가정환경이 어려워 정규학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청년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는 사람들, 좌충우돌의 시기를 겪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참고사항 : 도서명 <수상한 부시장>, 글 최광철, 2014. 5. 10 초판 1쇄, 1만2000원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



수상한 부시장 - 가슴 뛰는 희망은 젊음이다

최광철 지음, 가문비(어린이가문비)(2014)


태그:#최광철, #원주시 부시장, #수상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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