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에어컨 설치기사 이종석(가명)씨가 본인 키보다 큰 에어컨을 떠메고 계단으로 올라서고 있다.
 에어컨 설치기사 이종석(가명)씨가 본인 키보다 큰 에어컨을 떠메고 계단으로 올라서고 있다.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장맛비는 전날 밤부터 거세다가 잦아들다가를 반복했다. 에어컨 설치기사 이종석(가명)씨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도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10일 이씨가 에어컨 설치작업을 해야 하는 곳은 주택건물 2층이다. 그가 본인 키보다 큰 에어컨을 어깨에 메고 계단으로 올라섰다. 한 발자국을 내밀 때마다, 온몸이 휘청거렸다.

이씨는 "그래도 2층이니 다행이다"라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다세대주택의 4~5층이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현관 앞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가 에어컨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XX에어컨입니다. 일단 설치하실 자리부터 확인해 볼까요?"

에어컨 성수기... 일이 몰리면 새벽부터 자정까지 작업

에어컨 설치기사들은 “많을 때는 하루에 7건도 하는데, 밥 거르고 뛰어다녀도 자정까지 설치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에어컨 설치기사들은 “많을 때는 하루에 7건도 하는데, 밥 거르고 뛰어다녀도 자정까지 설치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이른 아침, 50평 남짓한 창고에는 에어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설치기사들이 저마다 배정된 에어컨을 2.5톤 트럭으로 옮겨 실었다. 한 설치기사는 "장마철이라 (에어컨) 성수기가 한풀 꺾여서 이 정도"라며 "한참 일이 몰리는 6월에는 새벽부터 상차를 해도 빠듯하다"고 말했다. 무게가 40kg을 쉬이 웃도는 에어컨을 옮기며, 여기저기서 "영차"나 "아이고" 같은 소리들이 쏟아졌다.

이날 이종석씨가 배정받은 에어컨 설치작업은 3건. 며칠째 비가 이어져 작업량이 반토막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2~3시간 정도 걸리는 설치시간에 이동시간을 더하면, 오후 5시는 돼야 일이 끝난다. 보통 에어컨 설치기사들은 오전 9시께에 첫 설치작업을 시작한다. 이씨가 "3건이면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것 같다"며 "많을 때는 하루에 7건도 하는데, 밥 거르고 뛰어다니면서 자정까지 설치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에어컨 설치작업은 드릴을 이용해 벽을 뚫는 일로 시작됐다. 에어컨에 연결된 배관을 건물 바깥의 실외기와 잇기 위해서다. 집 안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객이 "(벽에 구멍을 낼 때) 최대한 깔끔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종석씨에게 말을 건넸다. 이씨는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업을 했다. 어느새 이씨 얼굴에 빗물과 땀이 뒤엉켜 흘러내렸다. 그가 목에 건 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냈다.

"배관을 보기 좋게 연결하는 게 중요해요. 고객들도 가장 신경 쓰시는 부분이고요. 배관이 축 늘어진다거나 눈에 띄면 안 돼요. 그렇다고 배관을 많이 쓰면, 추가요금이 나와요. 기본제공량이 정해져 있거든요. 최대한 짧고,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이죠."

이종석씨는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로 배관을 연결하기로 했다.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공간에 이씨가 몸을 우겨넣었다. 한창 거세진 빗줄기가 이씨에게로 쏟아졌다. 갑자기 옆집 주민이 "어디회사 제품이냐, 에너지 사용 효율 등급은 1등급이냐"며 질문을 했다. 이씨는 작업을 하면서도 "요즘은 제품이 좋아져서 에너지 사용 효율 등급이 높다"고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이런 것도 다 고객관리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이종석씨는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로 배관을 연결하기로 했다.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공간에 이씨가 몸을 우겨넣었다.
 이종석씨는 건물과 건물의 좁은 틈새로 배관을 연결하기로 했다. 성인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힘든 공간에 이씨가 몸을 우겨넣었다.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뤄진 고용구조 "모든 책임은 설치기사에게"

배관연결이 끝나자, 고객이 "목이라도 축이시라"며 음료수를 내왔다. 이종석씨가 "잠시 쉬다가 하자"며 바닥에 앉았다. 설치작업을 시작한 지, 2시간만이다. 이씨가 "그래도 오늘 설치작업은 다 주택이라 다행이다"라며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칠 때, 높은 층 아파트에서 설치작업을 하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보통 에어컨 실외기를 건물 외벽에 걸린 앵글(받침대)에 올리잖아요? 바람이 심하게 불면 아찔하죠. 실제로 안전사고도 꽤 많이 발생해요.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1년에 2~3건은 사망사고도 발생하고요. 가정용 에어컨 설치기사들은 전부다 도급계약이라고 보면 돼요. 제조사가 자회사에 도급을 주죠. 그럼 그 자회사는 또 도급업체에 도급을 줘요. 마지막으로 도급업체가 설치기사들과 1년 단위로 계약을 하죠. (설치기사들은) 대부분 개인사업자예요. 그래서 안전사고 발생하면 본인이 다 책임을 져야하죠."

이종석씨가 고객에게 건네는 명함에는 제조사인 대기업의 로고가 선명하다. 그가 입고 일하는 작업조끼, 제품을 운송하는 2.5톤 트럭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씨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면, 통화 연결음으로 제조사의 홍보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고용구조상 제조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씨는 제조사가 아닌 도급업체와 1년 단위의 계약을 맺는다.

이러한 고용구조는 대다수 설치기사들에게 동일하다. 제조사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지만, '계절상품 취급'이라는 이유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다.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어지는 고용구조의 마지막에 설치기사들이 있다. 기본급이나 4대 보험 같은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직접고용이 아니기 때문에 '설치 건 당 얼마'라는 식으로 설치기사들에게 돈이 지급된다"며 "또 산재보험이 안 되니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설치기사들이 개인적인 상해보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정작 보험사들은 작업이 위험하다고 상해보험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며 "결국 설치작업 중에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설치기사에게 전가되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이종석씨도 "제조사에서 정기적으로 안전사고 예방교육을 하고, 안전띠 같은 장비도 유·무상으로 제공을 해준다"며 "하지만 근본적인 안전망(산재보험)이 없으니,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직접고용은 꿈도 못 꾸지만, 최소한 산재보험만이라도 지원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올해에도 이미 큰 안전사고가 발생했다. 설치기사들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경기도 지역에서 일하는 한 설치기사가 실외기 작업을 하다가 건물에서 추락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혼수상태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이종석씨는 "잘은 모르지만, (안전사고가 난) 그 사람도 상해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밥 때가 안 지켜져서 장염 등을 앓거나, 무거운 제품 때문에 어깨나 무릎이 다친 설치기사들이 많다"며 "그런 것들은 본인이 부담하더라도, 최소한 큰 안전사고는 도와줘야하지 않겠나"고 되물었다.

제조사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지만, ‘계절상품 취급’이라는 이유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다.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어지는 고용구조의 마지막에 설치기사들이 있다.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설명하는 도급 구조.
 제조사들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지만, ‘계절상품 취급’이라는 이유로 직접고용을 하지 않는다. 도급과 재도급으로 이어지는 고용구조의 마지막에 설치기사들이 있다. 에어컨 설치기사들이 설명하는 도급 구조.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여름 지나면 수입이 딱 끊겨"... 일용직이나 거리 노점상으로 생계

"이게 한철 일이잖아요. 여름 지나면 수입이 딱 끊기죠. 한 철 벌어서, 일 년 먹고 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게 되겠어요? 다들 생계유지하려면, 비수기에는 공사장 일용직이나 거리 노점상으로 일하죠. 저도 겨울에는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호떡 장사를 했어요."

휴식을 마친 이종석씨는 배관과 배관 연결하는 용접작업을 시작했다. 이씨의 손에서 이전 작업에서 얻었을 작은 화상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그는 두 아들을 둔 가장이다. 큰 아들을 대학생이고, 작은 아들은 군대에 가 있다고 했다. 이씨는 "갈수록 올라가는 등록금 마련하려면, 여름철에 에어컨 설치하는 것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고 말했다.

설치기사들이 에어컨을 설치할 때 받는 일당은 평균 10만 원에서 15만 원 선. 여기서 자회사와 도급업체가 일정비율 떼어가면 한 달에 설치기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200-300만 원 선이다(성수기 기준). 물론, 유류비나 식비 등은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설치기사들의 작업방식은 2인 1조다. 설치기사들이 개인적으로 아르바이트 '부기사'를 채용한다. 하지만 이종석씨는 몇 해 전부터 부기사가 아니라, 다른 설치기사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일이 고되기 때문에 부기사가 며칠 하다가 그만 두는 경우가 많거니와, 치솟는 물가와 달리 제자리걸음인 도급비로는 부기사 월급주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종석씨는 "설치기사들끼리 일하면, 자기 일이니 늦게 끝나는 것과 상관없이 작업이 가능하다"며 "차라리 문제만 많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부기사 월급을 주느니, 공동으로 일하고 수입을 나누는 것이 더 속 편하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

에어컨 설치가 마무리되자, 이종석씨는 작업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땅에 떨어진 종잇조각까지 전부 주웠다. 이씨는 "제조사와 도급업체에서 작업 후에 고객에게 확인 전화를 한다"며 "이런 뒷정리 부분에서도 말끔하지 못하면, 그게 다 고객평가에 반영된다"고 말했다.

설치비를 정산하는 과정에서 이종석씨와 고객 사이에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고객이 가격을 깎아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한참이나 설득을 했지만, 결국 설치비 일부를 깎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구는 부지기수예요. 정해진 설치비가 있고, 그 일부를 설치기사가 도급비로 받는 건데 깎아주면 설치기사만 손해죠.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에요. 에어컨 설치 후에 개미가 나왔다거나, 보지도 못한 물건이 없어졌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황당한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일부 고객의 무리한 요구에도 설치기사들이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제조사가 설치작업 후 전화로 실시하는 고객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고객평가 결과는 도급업체에도 전달된다. 나쁜 고객평가가 누적되면, 재계약이나 작업배정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제조사들은 기업 이미지 때문에 설치기사들에게 친절함을 강조한다. 결국 제조불량이 아니면, 무리한 요구라도 설치기사들이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설치기사들이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 까닭이다. 이종석씨 역시 "소비자들이 설치기사들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라며 "갑인 제조사 아래에서 을인 설치기사들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에어컨 설치작업은 드릴을 이용해 벽을 뚫는 일로 시작됐다. 에어컨에 연결된 배관을 건물 바깥의 실외기와 잇기 위해서다. 집 안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객이 “(벽에 구멍을 낼 때) 최대한 깔끔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종석씨에게 말을 건넸다. 이씨는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업을 했다.
 에어컨 설치작업은 드릴을 이용해 벽을 뚫는 일로 시작됐다. 에어컨에 연결된 배관을 건물 바깥의 실외기와 잇기 위해서다. 집 안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객이 “(벽에 구멍을 낼 때) 최대한 깔끔하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이종석씨에게 말을 건넸다. 이씨는 진공청소기를 이용해,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작업을 했다.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휴식을 마친 이종석씨는 배관과 배관 연결하는 용접작업을 시작했다. 이씨의 손에서 이전 작업에서 얻었을 작은 화상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휴식을 마친 이종석씨는 배관과 배관 연결하는 용접작업을 시작했다. 이씨의 손에서 이전 작업에서 얻었을 작은 화상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 박현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에어컨 설치기사, #도급구조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