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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뉴스 '사형수' 유인태, 사형폐지법 다시 낸다

기념일은 집단 기억 형성의 중요한 기제다. 대개 지배권력은 기념일을 제정해 국민의 통제에 유리한 담론들을 생산한다. 예를 들어 '6·25전쟁'이라는 용어는 전쟁 발발의 책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킬뿐, 전쟁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부패와 부정(민간인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을 포함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6·25전쟁' 대신 '한국전쟁'이라 부르기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통제로서의 기념일' 대신 '저항으로서의 기념일'이 있다. 이것은 지배권력이 생산한 담론을 거스른다. 일종의 '대항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지슬> <비념> 등의 영화로 잘 알려진 '제주 4·3'이라는 용어는 시대적 여건에 따라 공산폭동론-민중항쟁론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승만 정권의 토벌대가 제주도민의 1/10을 무참히 살해한 '피해대중론' 또는 '민간인 학살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지금까지 이 사건을 빨갱이의 소행으로 몰아 가족과 지인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침묵하게 만든 폭력에 저항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기념일은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집단 기억은 정치사회적 담론을 생산한다. 따라서 한 사회 내에 어떠한 기념일이 기억되느냐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나는 주로 '제주 4·3 사건'으로 기억되는 4월 3일이 또 다른 맥락에서 기념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1974년 4월 3일 유신 정권이 대학생·종교인·재야 인사 등으로 구성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즉 '민청학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시켰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불순세력'은 지난해 12·19 대선 시기에 화두가 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가리킨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기름 부은 민청학련 사건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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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1969)과 제7대 대통령 선거(1971) 등을 계기로 영구 집권의 길을 모색한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통일'이라는 명목으로 유신을 선포했다. 이러한 반민주적 처사에 대해 박형규·권호경 등 빈민 선교를 하고 있던 진보 개신교 인사들은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때 '유신독재 물러가라' 등의 내용이 담긴 전단을 돌렸고, 이것은 반유신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서 유신 선포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인 10·2시위(1973)가 펼쳐진 뒤 반유신운동의 흐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2월 말에는 전국적인 개헌운동으로 발전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런 반유신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당시 학생운동세력은 유신체제에 큰 타격을 주기 위해 이제까지 해오던 산발적 시위 대신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유인태·이철 등이 계획한 전국적인 학생시위계획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당국은 학생운동세력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가 학생들의 거사날짜인 4월 3일에 기습적인 역습을 가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을 겨냥해 선포한 긴급조치 4호는 어마어마했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 및 관련 단체를 조직·가입하거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는 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1204명이 검거됐다고 한다. 1986년 1350여 명이 검거된 건대항쟁 이전까지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인원이 검거된 것이다.

이 사건은 정권의 탄압에도 유신체제 반대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검거된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유신정권의 인권유린 문제가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사법살인'에 항의한 오글 목사를 유신정권이 추방하면서 미국 내 반한 감정이 유발되기도 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한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해 '엑스플로74'라는 개신교 대형 집회를 후원하고,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와 벽산그룹의 김인득 장로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됐던 박형규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출현은 민청학련 사건을 통해 받은 가장 큰 축복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유신헌법은 무효이다"라는 양심선언으로 구속된 지학순 주교가 15년 형을 선고 받자 함세웅 신부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최초의 반유신운동 조직인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이끌었고,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조사 발표했다. 또한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실을 세상에 알려 6월항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인권위원회를 만들었다. 인권위원회는 범교단 차원에서 기독교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자 가족이 많아지자 1973년 남산 부활절예배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목요기도회'는 정례화됐다. 이 기도회는 민주화운동의 힘을 결속시켰으며,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언론광장의 역할을 했던 이른바 '성역의 정치'였던 것이다.

4월 3일의 역사적 의의, 제주에만 있지 않다

민청학련 사건은 직접적이지 않지만 박근혜와 관련이 있기도 하다. 당시 유신정권은 김대중 납치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재일교포가 포함된 것이 문제가 돼 일본으로부터 외교 공세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8·15경축사에 발생한 8·15저격사건(문세광 사건)으로 이런 국면은 역전됐으며, 육영수의 사망으로 박근혜가 레이디퍼스트의 역할을 맡게 됐던 것이다.

이상이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4월 3일은 지금까지 주로 '제주 4·3'으로 기억됐다. 제주 4·3의 역사적 의의를 축소할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다만, 나는 4월 3일이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기념일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전국적인 반유신운동이 불발로 그치고 오히려 정권의 탄압으로 이어졌지만, 이후 반유신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국가의 폭력성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제주 4·3의 피해대중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기도 한다. 우리가 또 다른 4월 3일을 기념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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