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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앞장서고 있는 독립운동가 오정화 애국지사의 손녀 한인 3세 아그네스씨.
 미국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앞장서고 있는 독립운동가 오정화 애국지사의 손녀 한인 3세 아그네스씨.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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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화요일 오전 11시 아그네스씨를 만난 것은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였다. 까만 원피스에 초록빛 스카프가 잘 어울리는 아그네스씨는 단발머리에 아담한 체구의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우리였지만 그녀는 한복 차림의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방한 중인 아그네스씨는 미국 보스턴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가 건넨 명함에는 'Dr. Agnes Rhee Ahn' 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인 교포 2세인 아그네스씨를 알게 된 것은 여성독립운동가 오정화(1899.1.25~1974. 11.1) 애국지사 때문이었다.

오정화 애국지사는 아그네스씨의 할머니로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유관순 열사와 함께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일제의 감시를 견디지 못해 만주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며 피해 살다가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75세로 삶을 마감한 분이다. 오정화 애국지사는 2001년에 독립운동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아들의 한 마디에 한국 역사 공부하게 된 아그네스씨

부모님의 이민으로 1961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그네스씨는 이러한 외할머니의 독립운동사실을 모른 채 동양인으로서 미국문화와 생활에 적응하게 하려는 부모님 밑에서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었고 2남 1녀를 낳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아들 마이클이 10살 무렵 학교에서 돌아와 울면서 던지는 질문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왜 한국인들은 착한 일본인들을 괴롭혔느냐?"라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아들 마이클이 이러한 질문을 던진 것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요코 이야기(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를 읽고 던진 것으로 이 날부터 아그네스씨는 한국의 역사 공부를 독학으로 하게 된다. 2006년 9월 일이다.

한글을 거의 모르는 아그네스씨는 영어로 쓰인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침 중국인 2세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이 쓴 'The Rape of Nanking, 남경의 강간'을 읽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 책을 쓴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은 똑똑하고 촉망받는 젊은 저널리스트로 그의 부모는 중국출신 미국이민자였다.

아그네스씨가 충격받은 <남경의 강간>은 36세에 요절한 중국인 아이리스 장이 쓴 책으로 전 세계에 일본군의 참상을 고발한 불후의 명작이다.(왼쪽) 남경대학살에서 중국인 목베기 경쟁을 하던 잔인한 일본군 소위의 기사.
 아그네스씨가 충격받은 <남경의 강간>은 36세에 요절한 중국인 아이리스 장이 쓴 책으로 전 세계에 일본군의 참상을 고발한 불후의 명작이다.(왼쪽) 남경대학살에서 중국인 목베기 경쟁을 하던 잔인한 일본군 소위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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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가 남경대학살을 몸소 겪은 만큼 아이리스 장은 중국이 일본군에 의해 참혹한 살상을 겪은 것에 분노했고 이러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남경대학살의 현장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불후의 명작인 <남경의 강간>을 남기고 36세의 아까운 나이로 죽게 된다.

필자도 남경대학살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충격이 컸지만 아그네스씨의 충격은 나보다 몇 곱절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태어난 아그네스씨는 그때까지 그의 고백처럼 일제강점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일본제국주의가 저지른 아시아 제국의 참상에 대해서도 배운 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양인으로서 미국에서 살아남으려고 철저히 미국인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한 사람은 기념관 안의 한 신문 기사에 눈을 떼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일본군 소위(少尉)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츠요시의 기사로 그들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가 경쟁을 벌였는데 106대 105로 두 사람은 다시 연장전에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이야말로 당시 피비린내로 물든 남경의 참상을 말해주는 그 어떤 말보다 우선한다. 일본군의 잔학한 만행이 기록된 '남경의 강간'은 애국지사 오정화 여사의 손녀 아그네스씨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모국 조선의 일제강점기 역사에 대해 차츰 눈 떠가면서 아그네스씨는 평범한 의사에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깊은 관심을 두는 '신 독립운동가'가 된다. 아무렴, 독립운동가 후손의 피 속에 흐르는 유전자가 그를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다. 아그네스씨의 식민지 조선과 가해국 일본에 대한 역사공부 독학은 무서운 속도로 진전을 보였다. 그녀는 하버드대학 도서관을 위시하여 역사의 기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한 기록의 보따리는 대담을 하는 동안 가방 속에서 주렁주렁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져 나왔다.

일제강점기의 가해국인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하여 가냘픈 소녀의 체험이라는 탈을 쓴 채 <요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꾸며진 책이 미국의 초·중등학교 교재로 읽히고 있는 현실을 눈앞에 두고 아그네스씨가 받았을 충격의 크기는 안 봐도 짐작이 간다. 

그러나 아그네스씨가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문제의 책 <요코 이야기>가 15년간이나 미국 초·중등학교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그네스씨를 포함한 한인 학부모들은 이 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해 미국 공립학교 추천도서 목록에서 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아그네스씨도 그 한가운데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2007년 1월 31일 자 <연합뉴스>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미국 뉴욕의 한 공립중학교가 한국인을 가해자, 일본인을 피해자로 묘사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요코 이야기>의 수업을 30일 전격 중단했다. 또 보스턴 지역의 한 공립중학교는 지난 13년간 해마다 계속돼온 작가 요코의 학교 방문 강의를 중단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뉴욕시 퀸즈에 있는 '제67 공립중학교(MS 67)'는 지난주부터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에 들어갔으나 한인 학부모와 학생들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여 29일부터 이 책의 수업을 멈추고 교재로 나눠줬던 책을 수거했다……. "
     
요코 웟킨스(78)씨가 줄기차게 자서전이라고 주장하는 '선량한 일본인, 나쁜 한국인' 책을 한인 학부모들이 더는 좌시할 수 없어 투쟁한 저항의 결과였다. 아그네스 아들 마이클의 학교인 보스턴 도버 셔번중학교(Dover Sherborn Middle Schoo)에서도 2007년부터 이 책을 더는 학생들에게 수업교재로 쓰지 않게 되었다고 아그네스씨는 그간의 정황을 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많은 학교에서 이미 필독서에서 빼거나 뺄 것을 검토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것은 오로지 역사왜곡을 바로 잡으려고 앞장선 아그네스씨 같은 한인교포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다.

조용히 눈 감은 애국지사 할머니... 영문 한국 역사책 없어 안타까워

일본을 피해국으로 그린 <요코 이야기> 영어판을 들고 문제점을 설명하는 아그네스씨.
 일본을 피해국으로 그린 <요코 이야기> 영어판을 들고 문제점을 설명하는 아그네스씨.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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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교포 2세인 아그네스씨는 한국말을 거의 못했고 나 역시 영어가 자유롭지 않은 터라 우리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아그네스씨와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는 필자는 눈빛만 봐도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그네스씨는 필자와 대담하는 동안 두툼한 가방에서 수도 없는 서류와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유관순과 함께 감옥 생활을 했던 자신의 할머니 오정화 여사의 흔적을 찾으려고 만주 일대를 헤매고 다닌 사진도 있었다.

아그네스씨의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운동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으셨다. 생각해보면 아그네스의 할머니야말로 직접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갖은 고문을 견디며 감옥생활을 했던 분으로 당시 일본인의 조선인 학대와 학살, 착취, 강간 등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셨던 분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요코 이야기를 쓴 요코 웟킨스처럼 평화를 위해서라는 궤변을 떨면서 가증스러운 책 따위로 세상을 호도하지 않고 그 시대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조용히 침묵한 채 삶을 마감하셨던 것이다.

이번에 아그네스씨의 방한 목적은 미국인 교사의 한국문화 체험과 세미나 참석차였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미국교사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에 대해 더 잘았더라면 <요코 이야기>같은 책이 미국 학교에서 필독 교재로 채택되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에 주목하여 아그네스씨를 중심으로 한 보스톤 한인 부모들은 미국교사들이 한국 역사와 문화를 알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큰 애로사항을 꼽았는데 영어로 쓰인 한국문화와 역사에 관한 책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오정화 할머니처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비롯한 한국인의 독립운동이야기나 식민지 시절의 역사를 다룬 교포 3세, 4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어판 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일본은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책을 영어로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오전 11시에 만나 점심으로 맛있는 한식을 함께 하려던 계획도 접어두고 점심때를 넘기면서까지 장장 세 시간 넘게 나눈 아그네스씨와의 대담은 매우 뜻 깊었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대담 내내 통역을 통해 전해 들어야 하는 언어소통이 아쉬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공감하던 민족의 아픈 역사에 대한 느낌은 전혀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다.

무엇보다도 아그네스씨를 만나고 나서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1세들이 가고 2세들도 연로하여 3세들이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지금 앞으로 4세, 5세로 이어지는 미래 세대들을 위해 어떻게 독립정신을 계승시켜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더군다나 나라밖 교포들의 올바른 역사관과 독립정신의 계승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는 가운데 교포 3세인 아들세대를 위해 왜곡된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바로 잡으려고 호주머니를 털어가며 외롭게 투쟁하는 아그네스씨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필자는 그간 한국사회에서 조명되지 않은 오정화 애국지사 같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추적하여 이 분들께 드리는 헌시와 함께 일생을 소개하는 책을 내고 있는데 이번 아그네스씨와의 대담은 앞으로 발간될 <서간도에 들꽃 피다> 3권에 넣을 예정이다. 독립운동가 오정화 애국지사의 손녀 아그네스씨는 열흘 정도 한국에 머물 예정이며 도중에 중국을 다녀오는 등 분주한 일정이 잡혀 있다고 했다.

올해로 해방 67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에 경고의 끈을 늦추지 않는 한인 교포들의 노력과 그 한가운데서 열심히 뛰고 있는 아그네스씨에게 큰 응원의 손뼉을 치면서 대담을 마쳤다.

대담을 마치고 통역을 맡아 수고한 최서영씨(위), 아그네스씨(왼쪽)와 필자.
 대담을 마치고 통역을 맡아 수고한 최서영씨(위), 아그네스씨(왼쪽)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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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자보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아그네스안, #신독립군, #요고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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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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