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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L 5월11일자에 실린 리노의 실험결과 논문
 PRL 5월11일자에 실린 리노의 실험결과 논문
ⓒ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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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열기가 한창이던 지난 4월 3일, 전 세계 과학계가 주목했던 서울발 소식이 하나 있었다. 한국의 중성미자 연구진 RENO(Reactor Experiment for Neutrino Oscillation, 리노)가 처음으로 그 실험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날 발표한 내용은 논문으로 작성되어 물리분야 최고의 권위지인 미국의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 PRL)에 투고되었고, 지난 5월11일 최종적으로 게재되었다.

리노는 한마디로 말해서 영광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반응로(Reactor)를 이용한 중성미자(Neutrino) 실험이다. 중성미자는 인간이 알고 있는 기본입자들 중에서 가장 아는 것이 없는 입자이다. 왜냐하면 중성미자는 다른 물질과의 반응성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매초 천문학적인 숫자의 중성미자가 우리 몸을 뚫고 지나가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중성미자는 흔히 유령입자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입자물리 실험에서는 중성미자를 검출하는 것 자체가 가장 어렵다.

자연에는 세 종류의 중성미자(전자형, 뮤온형, 타우온형)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 덕분에 신기한 일들이 벌어진다. 즉, 우리가 무엇을 관측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중성미자의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지금 가요계를 석권하고 있는 주인공은 소녀시대의 첫 유닛시스템인 '태·티·서(태연, 티파티, 서현)'이다. 이 유닛에 양자역학을 그대로 적용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이 유닛의 '얼굴'을 '관측'하면 태연, 티파니, 서현의 세 '얼굴'을 얻는다. 만약 우리가 유닛 멤버들의 몸무게를 '측정(혹은 관측)'하면 가볍다, 중간, 무겁다의 세 상태를 얻을 것이다. 이것을 편의상 1, 2, 3 상태라고 하자. (단, 1, 2, 3의 정확한 무게 순서는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1, 2, 3의 '몸무게 상태'는 태연, 티파니, 서현의 세 '얼굴 상태'와 어떤 형태로든 일대일로 대응될 것이다. 예컨대 몸무게1이 티파니고 몸무게2가 서현이고 몸무게3이 태연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감춰져있던 θ13의 비밀 밝혀낸 '리노 연구진'

실험 장비를 손질하고 있는 리노 연구진
 실험 장비를 손질하고 있는 리노 연구진
ⓒ 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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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자역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몸무게 상태' 1, 2, 3은 '얼굴 상태' 태연, 티파니, 서현과 전혀 다르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것이 핵심인데) 각 얼굴 상태에는 세 가지 모든 몸무게 상태들이 적절하게 뒤섞여 있다. 예를 들면 태연의 상태는 50%의 몸무게1과 30%의 몸무게2와 20%의 몸무게3이 뒤섞인 상태일 수가 있다. 이것을 양자중첩이라고 부른다.

양자역학의 원리가 극명하게 적용되는 중성미자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실제로 전자형 중성미자 상태(이는 태티서의 얼굴 상태에 해당한다)에는 질량상태(이는 태티서의 몸무게 상태에 해당한다) 1, 2, 3이 모두 적절한 비율로 섞여 중첩돼 있다. 뮤온형과 타우온형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중성미자의 물질상태(전자형, 뮤온형, 타우온형)와 질량상태(1, 2, 3)가 서로 섞여 있는 양상은 수학적으로 세 개의 각도와 하나의 위상(δ; 그리스문자 델타)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세 개의 각도는 1, 2, 3의 세 상태를 둘씩 짝지어 뒤섞을 때, 즉 1, 2가 서로 뒤섞이거나 2, 3이 서로 뒤섞이거나 1, 3이 서로 뒤섞이는 데에 필요한 각도이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각도를 각각 그리스 문자 세타(θ, 이하 뒤에 숫자 모두 아래첨자)를 써서 θ12, θ23, θ13이라 쓰고 중성미자의 '섞임각(mixing angle)'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숱한 실험으로 θ12와 θ23의 값을 측정해 왔지만(약 θ12=34˚, θ23=45˚) θ13의 값은 다른 두 각도보다 대단히 작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값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 리노가 측정한 값이 바로 이 θ13이다.

양자역학의 신비는 물질상태와 질량상태가 서로 뒤섞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물질상태는 놀랍게도 그 모습을 주기적으로 바꾼다. 이 현상은 중성미자 진동(Oscillation)으로 알려져 있다. '태티서'로 말하자면, 태연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티파니나 혹은 서현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자신으로 돌아온다. 이 현상은 중성미자의 질량상태가 서로 다른 질량을 가질 때 가능하기 때문에, 중성미자 진동은 중성미자가 0이 아닌 질량을 가진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실제 1998년 일본의 수퍼가미오칸데 실험에서 대기 중의 중성미자 진동을 관측한 이래 과학자들은 중성미자가 미세하지만 0이 아닌 질량을 갖는 것으로 믿고 있다.

리노에서도 중성미자의 진동현상을 이용해 섞임각 θ13을 측정하였다. 원자로에서 나오는 전자형 중성미자(엄밀히는 반중성미자anti neutrino이다.)는 진동현상을 겪으며 다른 중성미자로 변환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비행하는 동안 그 개수가 줄어든다. 이때 전자형 중성미자가 다른 중성미자로 전환될 확률은 와 다른 변수들의 복잡한 함수로 주어진다. 특히 중성미자가 줄어든 정도는 sin²2θ13의 값(θ13을 2배하여 사인함수를 취한 뒤 전체를 제곱한 값)에 비례하기 때문에 실제 실험에서 측정한 값은 바로 이 sin²2θ13의 값이다. 리노가 PRL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값은 sin²2θ13= 0.113±0.013±0.019이다(뒤의 두 숫자는 오차를 나타낸다).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전자형 중성미자가 진동에 의해 다른 중성미자로 바뀔 최대확률이 11.3%라는 뜻이다.

원자로를 이용해서 섞임각 θ13를 직접 측정하려는 시도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프랑스 3국이 주도하였다. 중국의 다야 베이(Daya Bay) 실험과 프랑스의 더블 슈(Double CHOOZ) 실험은 2003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2006년 3월에 공사가 시작된 리노보다 3년이나 빨랐다. 하지만 리노는 2011년 2월 설비를 완공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하였다. 이에 반해 중국의 다야 베이는 2012년 8월 완공예정이었다. 다야 베이는 리노보다 훨씬 더 정밀한 측정을 위해 더 큰 규모로 실험이 설계된 탓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이 소요되었다.

다야 베이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데는 θ13의 값이 아주 작아서 한국의 리노는 이 값을 재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했다. 실제 리노는 sin²2θ13 값이 약 2% 미만이면 측정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 다야 베이 연구진과 거의 동시에 발표된 결과

한편 프랑스의 더블 슈는 2011년 4월부터 데이터를 얻기 시작했고, 그해 11월 서울에서 있었던 중성미자 국제학회에서 206일 동안 얻은 데이터 결과를 발표했다. 오차가 커서 통계적으로 썩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이때 더블 슈가 발표한 값은 sin²2θ13=0.085였다. 이 값은 중국의 다야 베이 연구진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큰 값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중성미자 실험에서도 sin²2θ13 값이 예상보다 클 수 있다는 징후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그런 탓에 벌써 데이터를 받고 있었던 리노가 성공적으로 sin²2θ13 값을 먼저 측정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 리노는 2012년 4월경 첫 결과발표가 예정돼 있었다.

그 학회 때 영광의 리노 설비까지 보고 갔던 중국의 다야 베이 연구진은 자신의 실험일정을 앞당겨 설비를 다시 조정해서 그해 12월24일부터 데이터를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55일 간 모은 데이터를 정리한 다야 베이는 2012년 3월9일 전격적으로 그 결과를 발표했다. 다야 베이의 결과는 sin²2θ13 = 0.092±0.016±0.005였다. 전 세계 과학계는 흥분으로 들썩였다. 예기치 못한 발표도 그러했지만 sin²2θ13의 값이 상당히 크게 나왔고 오차 또한 굉장히 작아서 과학적으로 '발견(discovery)'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야 베이의 기습적인 실험과 결과발표 때문에 '세계최초'를 거의 예약해 두었던 한국의 리노는 다소 힘이 빠진 상황이 돼 버렸다. 일부 언론에서는 "다 잡은 노벨상감 놓쳤다(<조선일보>, 3월 13일 기사)"고 논평하기도 했다. 리노는 약 3주 뒤에 그 결과를 발표했으니까 '최초'를 뺏기긴 했어도 이 정도면 사실 거의 동시에 발표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전 세계의 학계 모두가 리노와 다야 베이, 더블 슈 등의 실험 진척상황을 오래 전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리노의 결과는 그 자체로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이번 결과로 노벨상을 준다면 리노도 당연히 다야 베이와 함께 공동수상할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다야 베이든 리노든 θ13의 측정만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실험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중성미자의 마지막 섞임각을 높은 정밀도로 측정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태티서'의 가장 깊숙이 숨겨진 비밀 가운데 하나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특히 이 값이 0이 아닌 꽤 큰 값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위상 δ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아직 그 값을 모르는 이 δ는 물질과 반물질(anti matter)의 비대칭성에 직결되는 변수라서, 우리 우주에서 왜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은지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눈부신 성과 뒤 '그림자'... 연구진 수와 예산에서 비교도 안 돼

리노의 중성미자 검출장비
 리노의 중성미자 검출장비
ⓒ 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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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동시'이긴 해도 역시 '최초'를 놓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다야 베이 발표가 있던 날 나를 포함해 주변의 많은 동료 과학자들이 놀라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한국의 리노가 이만큼이라도 성과를 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다야 베이와 리노가 비교되면서 한국의 암담한 현실이 눈에 밟혔다.

우선 리노에 들어간 돈은 겨우 116억 원에 불과하고 연구진도 국내 12개 대학 34명 밖에 안 된다. 다야 베이의 경우 예산은 약 600억 원(더블 슈는 350억 원)이고 연구진은 중국 안팎으로 총 38개 연구기관에서 270여 명이 참가하고 있다. 리노를 이끈 서울대 김수봉 교수는 무엇보다 경쟁 연구진에 비해 부족한 '맨 파워'를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꼽았다. 순수과학 분야에서 전문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 때문에 학문의 자생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특정분야에 한정된 현상도 아니다.

리노의 경우도 우선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하다보니 모든 연구진이 2, 3명 몫을 감당해야 할 만큼 개개인의 희생이 컸다. 연구실이 아주 외진 곳에 있는 탓에 혼자 고독과 공포 속에서 연구실을 지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리노처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 연구자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이며, 이번 결과를 낸 뒤 학계를 떠난 사례도 있었다. 눈부신 성과 뒤의 그림자도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모든 악재를 딛고 리노가 학계 전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연구진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노력과 희생 덕분이었다. 외국 실험 전문가들은 리노의 예산규모를 듣고서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논평을 할 정도였으니, 이번에 리노가 성공적으로 결과를 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리노의 성공은 한국에서도 독자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대단히 높게 평가돼야 한다. 특히 이번 결과는 격년으로 발행되는 입자편람(Particle Data Book)에도 실릴 예정이다. 입자편람은 인류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아원자 세계의 모든 입자들의 성질을 총망라한 책으로서 자연과 물질의 근원을 탐구하려는 인간지성의 집결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측정한 값이 입자편람에 실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리노에 참가한 12개 대학 중 상당수가 지방대학인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전남대는 가장 많은 8명의 인원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실험에서 아주 큰 공헌을 했다는 후문이다. 국가 차원의 적절한 지원과 관리만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지방대학들이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기초과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중에라도 우리에게 큰돈을 벌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 지성의 경계를 확정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기왕의 경제적인 잣대로 묻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 지성의 경계가 넓어지면 기존의 경제성이나 시장성이나 편리함이나 이 모든 개념들이 모두 새롭게 정의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게임의 규칙에 해당하는 요소이고 우리가 흔히 '가치'라고 부르는, 돈으로도 사기 어려운 것들의 실체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성장 중심의 철학으로 경제지표상의 선진국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정말로 우리가 추구할 목표는 '가치 중심'의 철학을 가진 문명국가가 아닐까 싶다.

대선이 있는 올해, 정치권에서는 귀가 솔깃한 대형 과학프로젝트들로 다시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할 것이 분명하다. 선거철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미사여구나 장밋빛 포장은 이해해 줄 수도 있다. 다 좋은데,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도 학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렇게 어둡고 외진 곳에서 고독과 공포와 싸우며 혼자 연구실을 지켰던 과학자들을 한번은 생각해 달라는 부탁을 꼭 하고 싶다. 다른 어떤 거창한 공약보다, 대한민국의 과학자로 사는 것이 대단히 자랑스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부끄럽거나 후회스럽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일선 과학자로서의 소박한 바람이다.

리노 명단 (34명=교수16명, 연구원7명, 학생11명; 12개 국내대학)
김바로(전남대), 김병찬(전남대), 김상용(부산대), 김성현(부산대), 김수봉(서울대), 김시연(중앙대), 김영덕(세종대), 김우영(경북대), 김재율(전남대), 김현수(전북대), 마경주(세종대), 박강순(서경대), 박명렬(동신대), 박인곤(경상대), 박정식(서울대), 신진욱(서울대), 안정근(부산대), 양병수(서울대), 여인성(전남대), 유인태(성균관대), 이승현(성균관대), 이재기(부산대), 이재승(서울대), 임인택(전남대), 장지승(전남대), 장한일(서영대), 전은주(세종대), 정인석(전남대), 주경광(전남대), 세르게이 체보타료프(경북대), 최선호(서울대), 최영일(성균관대), 최원국(서울대), 최준호(동신대)


태그:#리노, #RENO, #중성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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