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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얘기하다가 목이랑 얼굴이 빨개져도 이해해 주세요. 화병이래요. 마음에 자꾸 담아뒀더니… 얼굴에서 달아오르곤 해요."

지난 4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 홀에서 2012 노동자건강권포럼 '감정노동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서 만난 전하영씨는 인터뷰 중 손을 목과 얼굴에 가져다 대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전하영씨는 세계적인 명품 그룹인 프랑스 '루이뷔통 모에 헤네시(LVMH)'에서 판매원으로 18년을 일했다. 지금은 LVMH 노조 위원장이다.

그녀는 현재 18년 노동의 대가로 건강상에 여러 문제가 생겼다. 갑상선 문제를 비롯한 무릎과 허리 수술, 현재는 목 디스크로 어깨까지 무리가 왔다. 그러나 신체상의 문제보다 더 큰 것은 그녀의 마음에 남아있는 고통이다. "18년이 흘렀다고 감정의 상처가 무뎌졌다고 할 수 없어요. 그동안 고객들의 서비스 요구도 더욱 높아졌거든요. 심장은 멈추는 게 아니라서 계속 고통은 쌓여가요." 그녀의 목 주변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후 1시 백화점에 근무하는 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오후 1시 백화점에 근무하는 점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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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근래 속상한 일을 겪기도 했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발행되는 한정 쿠폰 북이 있는데 금방 동이 나거든요. 손님들 입장에서야 화도 나시겠죠. 그런데 손님 중 한 분이 쿠폰 북을 들고 오셨다가 소용이 없게 되자 10초 정도 저를 째려보시더나 제 앞에서 종이를 찢고 얼굴에 던지시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말끝마다 존칭을 사용했다. 그녀의 말투는 직업병으로 굳어진 듯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면서 참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주변 손님, 동료들의 시선도 아팠고요. 일주일 정도 손님들만 봐도 심장이 떨리더라고요. 잠도 못 자고. 제 가슴 속의 심장을 빼내서 씻어 내고 싶었어요."

전하영씨가 겪고 있는 증상은 '감정노동'에 따른 피해다. 국내에 감정노동 개념이 도입된 지는 약 5년. 이성종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기획실장은 "감정노동은 직업상 고객을 대하면서 원래 감정을 숨긴 채 얼굴 표정과 몸짓을 해야 하는 직원들이 늘 직업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전국서비스산업노조는 지난 1월 20일 명동 한 백화점 앞에서 '우리도 쉬고 싶다'며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에 비해 금년 설 휴일이 하루 더 줄어든 사실에 대해 서비스 노동자들이 노조를 구성해 반발한 것이다. 이를 위해 노조는 전국 시민 10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지에서 다룬 주된 내용은 '감정노동' '명절휴무' '장시간 노동' 3가지이다. 그동안 참고 견디며 표출하지 않았던 서비스 노동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노동'은 현재진행형... 은둔형 외톨이부터 공황장애까지

지난 4일 서울대방동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 홀에서 2012 노동자건강권포럼 '세션2:감정노동토론회'가 열렸다.
 지난 4일 서울대방동 여성플라자 아트컬리지 홀에서 2012 노동자건강권포럼 '세션2:감정노동토론회'가 열렸다.
ⓒ 김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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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감정노동 토론회'에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여러 노조 위원들과 다양한 서비스 노동자들이 참석했다. 2시간 남짓 진행된 토론회에서는 여러 문제해결 방안이 제시됐으며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백화점과 대형할인점 등 줄곧 유통 서비스업에서 일해 온 김지혜씨는 고객만족센터에서 근무하면서 하루에도 고객 수십 명으로부터 폭언에 시달렸다. 이후 그녀는 자주 불안함과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고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현재 그녀는 "사람 냄새만 나도 구역질이 난다"며 대인 기피증으로 집에서만 1년을 생활하고 있다.

10년 동안 의류 판매를 해온 이지연씨는 손님이 시비를 걸어오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초조해진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고 대항하고 싶은 폭발을 안으로만 삼키다보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견뎌 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안정제를 먹고 한참 앉아 있으며 분노를 견딘다. 그녀의 상태는 극도의 신경 불안으로 판단력을 잃게 되는 '공황장애'란 진단을 받았다.

마트 내 베이커리점에서 일하는 최소정씨는 근무경험이 2년 정도 될 때 쯤 지나친 스트레스로 퇴근 후 밤 11시부터 폭식을 시작했다. 결국 몇 달 사이 몸무게가 10kg 이상 는 그녀는 비만 약과 우울증 치료제를 동시에 복용 중이다.

이처럼 감정노동에 따른 피해가 다변화되고 있다. 가슴에 입은 상처는 주변으로, 신체로 번져 곳곳을 얼룩지게 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감정노동 심각성이 강조된 이후 업계에서는 감정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알선하는 곳도 생겼다.

LVMH 노조 위원장 전하영씨는 "병원을 예약해 직접 치료를 받아 보았는데 사실 감정이 상처 받았을 때 치료가 필요하지 며칠 뒤 예약을 하고 병원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씁쓸해 했다. 전씨는 "나를 찾아 온 상담가를 오히려 내가 상담했다"며 "감정노동은 더 현대화되고 있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다"고 말끝을 흐렸다.

'감정노동'으로도 벅찬데 이젠 감시자까지

요새는 트위터도 무서운 존재다. 전하영씨는 "얼마 전 '지금 나는 어디 백화점 누군데 00라는 이름의 00브랜드 직원 표정이 참 더럽네요'라고 날린 트윗으로 동료 직원이 위에서 경고를 받았다"면서 "어디서 누가 날 감시하고 곧장 트위터로 날릴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병원 내 서비스 근무 업계에서는 '미스터리 페이션트'가 비상이다. '미스터리 페이션트'란 손님을 가장해 매장을 방문해 서비스를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퍼'에서 진화한 개념으로, 환자를 가장해 병원을 방문하여 병원 서비스를 평가하는 사람이다.

서울대학교병원분과 노인부장 김명숙씨는 "병원에 미스터리 페이션트가 있어 진료를 보고 우리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어떻게 대꾸를 하는지 감시한다"면서 "얼마 전에는 미스터리 페이션트가 병원 내 친절 1위인 간호사의 퇴근길을 미행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스트레스 받았던 점을 동료에게 얘기한 것을 다 녹취해서 심사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감정노동자도 모르는 '감정노동'... 얼마나 대중화 되었나?

한길리서치와 민주노총이 주관한 '백화점 및 대형유통매장 여론조사'이다.
<표본크기: 1000명, 표본 오차: 95% 신뢰수준에 ± 3.1%P,조사방법: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전화면접법>
 한길리서치와 민주노총이 주관한 '백화점 및 대형유통매장 여론조사'이다. <표본크기: 1000명, 표본 오차: 95% 신뢰수준에 ± 3.1%P,조사방법: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전화면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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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리서치와 민주노총이 주관한 '백화점 및 대형유통매장 여론조사'이다.
<표본크기: 1000명, 표본 오차: 95% 신뢰수준에 ± 3.1%P,조사방법: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전화면접법>
 한길리서치와 민주노총이 주관한 '백화점 및 대형유통매장 여론조사'이다. <표본크기: 1000명, 표본 오차: 95% 신뢰수준에 ± 3.1%P,조사방법: 구조화된 설문지를 이용한 전화면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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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2일 한길리서치와 민주노총 주관으로 조사한 '백화점 및 대형유통매장 여론조사'에 따르면 감정노동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인지는 47.2%로 50%를 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에 반해 대도시 시민들은 백화점이나 대형유통매장에서 직원 태도나 제품 하자 등을 이유로 화를 낸 적이 있는지에 대한 설문 조사에는 90.7%가 '없었다'(전혀 없었다:59.6%+별로 없었다:31.1%)고 한 반면, 7.6%는 '있었다'(자주 있었다:0.5%+몇 번 있었다:7.1%)고 응답했다. 100명 중 7~8명꼴로 손님에게 화를 낸 경험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감정노동'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 스스로 감정노동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다. 마트 내 베이커리에서 근무하는 최소정씨는 "내가 왜 우울하고 짜증나고 힘들어했는지 몰랐다가 오늘 토론회에 와서야 감정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면서 "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병원을 찾아 다녔는데 이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다"고 말했다.

로레알코리아 노조위원장 이은희씨도 "거의 20년 가까이 화장품 관련업계에서 근무했는데 감정노동에 대해 노조 가입 후 처음 알았다"면서 "제 주변에 막 입사한 젊은 친구들을 보면 가족에게 굉장히 짜증을 많이 내지만 아이들은 왜 자신이 짜증을 내는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해 이성종 정책기획실장은 "실제로 감정노동자 자신이 감정노동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감정노동 당사자들이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인데 가사 노동과 감정노동 문제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보니 직장 내 역할도 가족에서처럼 헌신적인 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점원에게 반말 않기 등 착한 소비자 운동도 필요"

노동환경연구소 한인임씨는 "세계에서 한국의 감정노동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면서 "한국은 어렸을 적에는 '싸워서 이겨라'를 강요하다가 취직을 하는 순간 '친절맨'으로 돌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게시물 하나, 리본 하나면 돼요. 예를 들면 마트 내에 '우리 마트에서는 직원에게 반말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캠페인을 하고 있어요'라고 푯말을 붙이고요. 점원 유니폼에도 캠페인 리본을 붙이도록 하는 겁니다. 이렇게 고객 응대 매뉴얼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의 인식부터 고쳐나가야 합니다. '나도 너도 같은 인격체'라는 인식이 자리 잡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한인임씨는 "이젠 소비와 생산 영역에서 '정의로운 판단'을 시작해야 한다"며 "'그동안 감정수당, 감정휴무 등 감정노동자들을 위한 많은 제안들이 나왔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소비자의 인식"이라면서 "'고객은 왕이다'라는 기본 관념에서 벗어나 소비자들에게도 '착해지세요'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김혜승 기자는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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