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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닷새째인 11월 18일(금) 저녁에 파리의 남서쪽에 위치한 뚜르(Tours)에 도착했다. 파리 시내에서 버스로 꼬박 세 시간. 중세 프랑스의 수도였던 뚜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아르 밸리(Loire Valley)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 강(1백 20km)을 따라 쉬농소 성(城), 샹보르 성 등 80여 개의 중세 고성들이 모여 있는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저녁은 프랑스의 유명 셰프 로엘링거의 제자가 운영하는 Barjus restaurant에서 먹었다. 3년 연속 미슐랭 스타 셰프로 선정된 바 있는 로엘링거는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에 재능이 뛰어났다고. 그에게서 7년간 요리를 배웠다는 주방장이 이날 내놓은 요리도 애피타이저부터 1코스, 2코스 등 메인 요리가 모두 해산물이었다. 지중해와 접해있는 프랑스 동남부 뚤롱(Toulon) 부근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사용한 이날 디너는 맛은 물론 아름다운 모양까지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Barjus Restaurant에서 먹은 싱싱한 해산물을 사용한 전채요리. 생굴과 생선 카나페가 나왔다.
 Barjus Restaurant에서 먹은 싱싱한 해산물을 사용한 전채요리. 생굴과 생선 카나페가 나왔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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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 기차역 앞 Le Grand Hotel에 여장을 풀고, 다음 날인 19일부터 본격적인 '유로구스토(Euro Gusto, 유럽의 맛)' 견학이 시작됐다. 시 외곽에 자리한 행사장은 호텔에서 차로 십 분 거리. 오전 열 시부터 입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날은 토요일이라 아침부터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섰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유럽 최대 슬로푸드 박람회

유로구스토 행사장 전경
 유로구스토 행사장 전경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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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에 처음 시작된 유로구스토는 2년에 한 번씩 프랑스 뚜르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의 슬로푸드 박람회다. 이번이 2회째로, 유로구스토 협회와 국제 슬로푸드협회, 슬로푸드 프랑스, 뚜르 시가 함께 개최한다. 국제 슬로푸드협회에서는 매 짝수 년에 전 세계 슬로푸드 회원과 생산자 등이 참가하는 '살로네 델 구스토(Salone Del Gusto)' 행사를 여는데, 유럽을 대상으로 하는 유로구스토는 이를 피해 매 홀수 년에 열리는 것이다.

행사에는 슬로푸드 협회에서 발굴한 수많은 프레지디아(Presidia, 전통 방식의 먹을거리 생산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사업) 생산자를 비롯해, 슬로푸드 철학에 부합하는 전통 방식으로 먹을거리를 만드는 다양한 소 생산자들이 참여해 사흘 동안 다채로운 음식 축제를 벌인다. 각 생산자는 2~3평 규모의 부스를 하나씩 받아 직접 만든 염소 치즈며 올리브 절임, 초콜릿, 햄, 또는 선조 때부터 가업으로 전해 내려온 수제 맥주나 와인, 코냑 등을 관람객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마카롱을 파는 부스
 마카롱을 파는 부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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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에서 파는 음식은 대부분 무료로 시식해볼 수 있다. 버섯, 치즈, 마늘 등 여러 가지 소스로 변화를 준 다양한 푸아그라 병조림을 파는 부스도 눈에 띄었고, 마카롱의 나라 프랑스답게 수십 가지의 마카롱을 전시한 부스도 있었다. 마카롱 한 개의 가격은 1유로에서 1.5유로(약 1500원~2200원)로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아프리카 산(産) 생선 알 절임(어란)을 파는 부스도 있었다. 슬로푸드 협회에서 실시하는 아프리카 농장 만들기 지원 사업의 하나로 아프리카에서 초청된 것이다. 화려한 아프리카 전통 의상과 머릿수건을 두른 아프리카 아줌마들이 어란 조각을 이쑤시개로 찍어 권한다. 짭짤하면서도 지방질이 많아 부드러운 어란의 맛은 황홀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200g 한 팩에 20유로, 우리 돈 약 3만원) 입맛만 다시고 돌아섰다.

치즈와 햄, 소시지 등을 파는 부스. 주말이라 가족과 함께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이 많았다.
 치즈와 햄, 소시지 등을 파는 부스. 주말이라 가족과 함께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이 많았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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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부스가 줄줄이 늘어선 행사장 안은 먹을거리 천국이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보이기만 하면 주인이 다가와 종류별로 찍어 맛을 보여준다. 사지 않고 먹어보기만 해도 눈치 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어느 부스건 음식을 나눠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넓은 전시장 한 바퀴를 다 돌면 한 끼 식사가 해결될 정도였다.

각 부스는 저마다 포스터와 소책자 등 다양한 홍보물을 정성껏 준비해 비치했다.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인 우리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어디에서 온 무슨 음식인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재료의 특별함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열심이다. 단순히 팔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었다.

어린 시절의 미각 교육을 중시하는 슬로푸드

유난히 사람이 몰려 서 있는 부스가 있어 가봤더니, 지역 특산물인 새 요리를 소주잔만 한 컵에 나눠주고 있다. 셰프인 듯한 사람이 요리에 대해 설명 중이다. 재료에 대해 묻자, 백과사전 같은 두꺼운 도감을 하나 가져오더니 사진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메추리 비슷한 자그마한 갈색 새다. 우리에게 뭐라고 열심히 말을 하는데, 아쉽게도 예전에 불어를 배워뒀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메시지 이상은 전달하지 못한다. 영어와 바디 랭귀지를 섞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떴다.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슬로푸드에서 실시하는 미각 교육 부스. 미각 교육 강사가 어린이에게 통에 든 시약의 냄새를 맡게 하고 있다.
 슬로푸드에서 실시하는 미각 교육 부스. 미각 교육 강사가 어린이에게 통에 든 시약의 냄새를 맡게 하고 있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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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근처에는 일정 금액을 내면 수백 종류의 와인을 무제한 시음할 수 있는 커다란 와인 바와 유기농 커피를 파는 북카페, 어린이들이 놀며 배울 수 있는 미각 교육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재생용지로 만든 상자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식재료의 냄새를 맡거나(후각) 손으로 만져보거나(촉각) 흔들어서 소리를 들어보면서(청각) 그것이 무엇인지를 맞히는 것이다. 물론 눈으로 보고(시각) 맛을 보는(미각) 테스트도 포함된다.

아직 입맛이 길들지 않은 어린 시절에 '미각'을 '교육'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배추에는 배추 고유의 맛이 있고, 호박에는 호박 고유의 맛이 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화학 조미료로 맛을 낸 햄과 소시지, 또는 피자와 치킨의 기름진 맛만을 선호한다.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의 획일화된 맛이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한 맛을 느끼는 능력을 빼앗아간 것이다. 이 때문에 슬로푸드는 어린 시절부터의 미각 교육을 매우 중요시한다.

전통 방식으로 잡은 민물고기를 직접 보여주고 요리도 해서 파는 '슬로 피시' 부스
 전통 방식으로 잡은 민물고기를 직접 보여주고 요리도 해서 파는 '슬로 피시' 부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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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반대편 뒷문 근처에는 슬로푸드 협회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인 '슬로 피시(Slow Fish)' 사업에 참여하는 생산자들의 부스가 있었다. 이곳 부스는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컸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커다란 어항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슬로 피시' 사업은 전통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소규모 어민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소규모 어업이다 보니 바다보다는 주로 민물고기가 많다.

어항 안에는 길이 1미터가 넘는 메기 등 대형 민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어망, 뜰채 등 낚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릴 적 우리나라 시골에서 보았던 도구들과 너무 비슷해서 놀랍고도 신기했다. 부스 담당자는 한쪽 벽면에 전시된 옛날 사진들을 보여주며 이 생선들의 산지(産地)와 물고기를 잡는 방법 등을 설명해준다. 물론 시식과 함께. 이날 저녁에는 인근 시농(Chinon)에 가서 이 부스를 담당한 생산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빵 굽는 모습이 신기한 유럽 주부들

뒷문을 열고 나가니 햇볕이 쏟아지는 뒷마당에 커다란 바퀴가 달린 이동식 오븐 한 대가 서 있다. 즉석에서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구워 파는 중이었다. 유로구스토에 참가하지 않는 평소에도 이렇게 오븐을 끌고 다니면서 곳곳에서 빵을 구워 판다고 한다. 앞에 몰려선 사람이 유난히 많다. 어떻게 만드느냐, 재료는 뭘 쓰느냐, 물과 밀가루 배합은 어느 정도냐 등등 빵 만드는 법을 물어보는 것이라고 동행한 불어 통역이 알려준다.

밀가루를 치대어 빵 반죽을 만드는 모습을 시연 중이다.
 밀가루를 치대어 빵 반죽을 만드는 모습을 시연 중이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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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눈앞에서 된장이나 고추장을 담그고 있었으면 우리나라 주부들이 꼭 그렇게 물었을 것 같은 질문들이다. 요즘 유럽 주부들은 대부분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고 사먹는다.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빵을 만드느니, 다 만들어진 빵을 돈을 주고 사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주부들이 간장, 된장, 고추장을 집에서 담가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산업화된 사회는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시간을 빼앗으려고 한다. 잠시 여유 있게 앉아서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등장한 것이 바로 패스트푸드다. 심지어 차 안에서 음식을 사서 한 끼를 때울 수 있도록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까지 나왔다. 그러니 시간이 걸리는 빵이나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먹을 겨를이 있겠는가.

하지만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것일수록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인 경우가 많다. 한국의 장은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온 우리 음식 문화의 정수이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조상으로부터 전해져온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음식은 내 몸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바깥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 슬로푸드의 기본 생각이다. 음식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 우주와 조상과 하나로 연결된다.

우리에게 맞는 슬로푸드 운동 찾기가 숙제

곳곳의 부스에 'Sentinelle(상티넬)'이라는 단어를 써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이 표지가 붙어있는 부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스도 있다. '보초', '초병'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프레지디아'를 프랑스식으로 바꾼 것이라고 슬로푸드 프랑스 관계자가 설명해준다. 외국에서 들어온 단어를 자기 나라 말로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 붙어있는 'Sentinelle' 표지. 이 표지가 붙어 있는 부스는 슬로푸드 협회로부터 프레지디아 인증을 받은 생산물을 팔고 있다는 뜻이다.
 곳곳에 붙어있는 'Sentinelle' 표지. 이 표지가 붙어 있는 부스는 슬로푸드 협회로부터 프레지디아 인증을 받은 생산물을 팔고 있다는 뜻이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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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에서 슬로푸드 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86년이었지만, 이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2000년대 초이다. 그나마 슬로푸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7년 남양주에 슬로푸드문화원이 개원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의 슬로푸드 운동은 이제 걸음마 단계인 셈이고, 그런 만큼 많은 숙제를 떠안고 있다.

슬로푸드라는 개념은 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음식은 국적을 넘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외국의 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슬로푸드 못지않은 우리만의 음식 전통이 있다. 집집마다 다른 고유한 어머니의 손맛, 오래 전해져 내려온 방식으로 만든 전통 음식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먹을거리를 길러내는 고유한 방법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슬로푸드 운동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전시장 한곳에서는 구세대의 조리사가 신세대 조리사에게 식재료 손질법 등을 전수해 주는 이색적인 강의가 진행중이었다.
 전시장 한곳에서는 구세대의 조리사가 신세대 조리사에게 식재료 손질법 등을 전수해 주는 이색적인 강의가 진행중이었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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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에는 시농(Chinon)의 와인 생산지 "Domaine de Noiré"를 방문했다. 3대째 와인 생산을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이곳은 연간 6만 5천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이다. 시농은 루아르 지방 안에서도 비가 적고 일조량이 더 많아 포도 재배에 적지이다. 300만 년 전까지 바다였던 이곳은 바닷물이 빠지고 조개껍데기가 침식되면서 포도 재배에 적합한 석회질 토양이 되었다.

주인장 장 막스 몬소는 적포도주, 백포도주, 로제 와인 등 직접 생산한 십여 가지의 와인을 아낌없이 내놓으며 맛을 보도록 해주었다. 와인의 이름이나 등급은 생산자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관리 당국의 평가를 거쳐야만 한다고. 와인의 등급은 해마다 생산된 포도의 품질에 따라 달라진다. 지도와 토질 분석 자료 등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내방객들에게 자기 와인을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농부를 넘어 경영자이자 장인에 가까웠다.

포도 재배에 최적의 기후와 토질, 시농 와이너리 Domaine de Noiré

와이너리 주인 장 막스 몬소 씨가 와인 저장 동굴 안에서 연수단에게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와이너리 주인 장 막스 몬소 씨가 와인 저장 동굴 안에서 연수단에게 자신이 생산한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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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슬로푸드 프랑스로부터 치즈의 last edition으로 유명한 식당이라고 소개받은 시농의 Au Chapeau Rouge Restaurant에서 먹었다. 알고 보니 이 식당의 주인은 아까 유로구스토에서 슬로 피시 부스를 운영하던 생산자 중 한명이라고. 예상대로 메뉴는 인근에서 잡은 민물고기였다.

이날 메인 요리는 좀 특별한 방법으로 나왔다. 주방장 크리스토프 드귄을 비롯한 식당 종업원들이 뚜껑을 덮은 접시를 각 손님 앞에 서빙하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일제히 뚜껑을 열어주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이날 우리의 시농 견학을 안내한 슬로푸드 프랑스 직원 사라는 이것이 "손님에 대한 최고의 예의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어찌 고맙고 감탄스럽지 않으랴. 일행은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이 영광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열심이었다.

Au Chapeau Rouge Restaurant에서 먹은 디저트. 진한 다크 초콜렛 위에 얹은 달콤한 케이크가 일품이었는데,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위로 길게 뻗은 것은 주방장이 직접 설탕으로 만들었다고.
 Au Chapeau Rouge Restaurant에서 먹은 디저트. 진한 다크 초콜렛 위에 얹은 달콤한 케이크가 일품이었는데,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위로 길게 뻗은 것은 주방장이 직접 설탕으로 만들었다고.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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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구스토에서의 아쉬운 이틀이 지나고, 연수 8일째이자 마지막 날인 11월 21일에는 샤토 드 발머(Chateau de Valmer)를 방문했다. 샤토는 성곽이나 장원의 저택을 뜻하는 용어로, 앞에 소개한 루아르 강 인근의 중세 고성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방문한 샤토는 그중에서도 정원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가꾼 곳이었다. 화보나 엽서에 나오는 것처럼 일류 정원사에게 손질된 짙푸른 상록수나 화려한 장미 나무를 뽐내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아한 정원수나 꽃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엔 전부 농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작물 종 다양성 보호, 샤토 드 발머의 특별한 신념

샤토 드 발머의 여주인 Alix de Saint Venant.(왼쪽에서 두 번째) 뒤로 중세 유럽 양식으로 손질된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화재로 소실된 옛 성의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고.
 샤토 드 발머의 여주인 Alix de Saint Venant.(왼쪽에서 두 번째) 뒤로 중세 유럽 양식으로 손질된 나무 울타리가 보인다. 화재로 소실된 옛 성의 모양을 본따 만들었다고.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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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의 여주인 Alix de Saint Venant은 머리가 하얗게 센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체격에 정정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현대자동차 '무쏘'를 직접 몰고서. 남편의 증조할아버지 때 구입해 4대째 관리해온 이 저택은 이제 남다른 영감을 가진 이 노부인에 의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샤토가 되었다.

중세 샤토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라 네 개의 구획으로 나뉜 정원 안에는 유럽에서 샐러드로 많이 먹는 채소인 카르둔(Cardoon)을 비롯해 파, 상추, 무 등이 자라고 있었다. 구획의 경계 삼아 심은 키 작은 사과나무에는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열린 빨간 사과가 수줍게 영글어 있다. 농사는 모두 유기농을 원칙으로 하지만, 관광용 샤토인지라 정원의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길에는 불가피하게 제초제를 쓴다.

한쪽에는 농장의 벌레와 미생물들을 위한 겨울나기 집이 설치되어 있다. 마른 나뭇가지와 벽돌을 쌓아올린 틈 사이사이에 작은 생물들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농장에는 해충이라는 개념이 없다. 해충이든 익충이든 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재배하는 작물은 대부분 오래된 전통 품종들이다. 샤토의 농작물들은 종 다양성이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노부인의 신념에 따라 정성껏 재배되고 있었다. 원하는 이에게는 종자를 나눠주기도 한다. 방문객들은 종자와 더불어 감명과 깨달음을 함께 받아간다.

샤토 드 발머의 정원. 가운데 동그란 분수 자리를 중심으로 십자가형 길을 따라 네 구획으로 나뉜 것이 중세 샤토 정원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구획 안에는 전부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샤토 드 발머의 정원. 가운데 동그란 분수 자리를 중심으로 십자가형 길을 따라 네 구획으로 나뉜 것이 중세 샤토 정원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구획 안에는 전부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 슬로푸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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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22일은 아침 일찍부터 길을 서둘렀다. 파리로 돌아와 오후 한 시 반 비행기를 탔다. 서울에 도착하니 하루가 지난 23일 아침 8시.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서울 공기는 코끝이 에일 정도로 매서웠다. 떠날 때는 늦가을이었는데 돌아와 보니 초겨울이다. 잎을 떨군 나무도,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도, 모든 것이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절의 흐름은 자연의 순리대로 어김없이 반복된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삶도 그 순리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이번 유럽 슬로푸드 연수가 가르쳐주었다. 음식을 배우러 떠났지만 우리가 보고 온 것은 단지 음식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길러낸 농작물, 느리지만 제 속도대로 만든 음식,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 우주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만들고 먹어온 음식 속에 생각보다 많은 해답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할 것인가, 하는.

덧붙이는 글 | 지난 2011년 11월 14일~23일까지 이태리와 프랑스로 '유럽 슬로푸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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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노예로 만드는 산업화된 시스템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삶을 꿈꿉니다. 민중의소리, 월간 말 기자, 농정신문 객원기자, 국제슬로푸드한국위원회 국제팀장으로 일했고 현재 계간지 선구자(김상진기념사업회 발행) 편집장, 식량닷컴 객원기자로 일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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