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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이 운영하는 space99(서울 견지동)에서 '비는 마음-제주4.3과 숭시'란 제목의 전시가 한창이다. 4월도 아니고, 제주도 아닌 서울에서 10월도 절반이 지나갔는데 왜 지금 이때 제주 4.3인가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시회에 가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임흥순 작가의 개인전 '비는 마음-제주 4.3과 숭시' 중에서 한 이미지.
 임흥순 작가의 개인전 '비는 마음-제주 4.3과 숭시' 중에서 한 이미지.
ⓒ 임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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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시란 제주 고유말로 불안한 징조를 뜻한다. 일제식민지 종식과 미군정, 남한 단독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이념의 격변기에 발생했던 '제주4.3'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대규모 국가폭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무자비하게,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사건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로 명명되기도 한다.

이 비극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무수한 이념의 대립과 분쟁의 출발점에 있었지만, 살아남은 피해자와 유족들조차도 마음놓고 울 수도, 제대로 애도할 수도 없이 재갈물린 채 금기시되어 온 사건이다. 한 순간에 삶의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그때의 불안과 공포, 그후로도 오랫동안 추모하고 애도할 수 없는 대신 오로지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비는 마음'으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이 곧 이 전시회 제목에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전시장 자체가 제주4.3이 가져다준 그 공포와 두려움, 불예측적인 상황과 비는 마음을 느끼게 하려는 듯 좁고 검은 통로를 손으로 더듬어 길을 찾도록 구성되어 있다. 학살을 피해 숨어야 했던 사람들의 동굴 안처럼 전시회를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엄습한다. 중간에 지인이 장난으로 소리를 지르며 팔을 잡아챘을 때(그는 일부러 그런 결과를 노린 것이었지만), 이곳이 세련된 도시느낌의 전시장 안이라는 걸 알고 관객으로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시는 영상과 사진, 설치작품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전시장 자체가 역사적 죽음과 삶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기반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다.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좁고 검은 '통로B'는 잊혀진 과거로 들어가는 첫 여정이며,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부유했던 '두려움과 예측 불가성'을 표현한 것이다.

검은 통로를 더듬어 지나 처음 다다르는 곳에서는 25분짜리의 영상을 만날 수 있다. 이 영상의 제목이 '숭시'다. 이 영상은 제주도 전역과 4.3사건 생존자가 몸을 피해 간 일본 오사카에서 만난 제주도민, 그리고 현재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육지 경찰 공권력과 대치 중인 강정마을의 모습을 교차시킨다. 4.3 그리고 강정마을.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space99는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 했지만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들은 필연적으로 다시 반복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임흥순 작가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제주4.3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지와 최소한의 이야기만 제시된 작품들을 통해, 역사적 비극 앞에 무력한 인간의 존재와 그들의 정서에 더욱 공감하는 것을 의도한다.

전시장 한 켠의 또 다른 코너 '사자(死者) 아카이브'에서는 제주4.3의 희생자와 무장대 총책이었던 이덕구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고 김주익 열사의 유품이나 관련된 물품들을 전시한다. 그리고 역사에 휘말린 삶과 죽음에 대한 애환을 고민하게 한다. 특히 이덕구와 김주익에 대한 헌정 영상에서는 제주 바다의 아름답고 유쾌한 풍경을 사용하면서, 망자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을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이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하늘, 한적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에 세련되고 상큼한 음악이 흐른다. 아이러니하다. 

사진 작업인 '이름없는 풍경' 시리즈와 '제주노트'는 제주4.3 이후의 기억과 사람들의 풍경을 담고 있는 이미지들로, 비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단한 삶에 대한 작가의 헌정시와도 같다.

space99는 역사 속에서 소외된 사건과 기억들이 이루어내는 중층적인 관계와 표상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서사 기억'을 기획시리즈로 선보일 예정인데, 제주4.3을 다룬 임흥순 작가의 '비는 마음'에 이어, 미군기지가 있는 동두천의 이야기를 화두로 삼은 고승욱 작가의 '말더음 2'가 준비되고 있다.

'비는 마음-제주4.3과 숭시'는 10월 7일부터 시작돼, 이달 30일까지 전시된다. 월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오픈하는데 점심시간은 피해서 가는 것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문의_02-735-5817, http://www.peacemuseum.or.kr/ 평화박물관 space99)



태그:#평화박물관, #제주4.3, #강정마을, #임흥순, #비는마음 제주4.3과 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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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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